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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여자’가 필요합니까?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노년: 젠더, 계급, 연령의 정치학 사이


※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님이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이라는 화두로 기사를 연재합니다.  Feminist Journal ILDA 

 

‘그 일’을 하고 있는 65세 여성들

 

▶ 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 영화 <죽여주는 여자>


“할아부지들도 있고. 오십 육십된 중찔들도 있고. 그리고 그냥 뭐 칠십 팔십. 걔네들도 늙은 사람한테 올 때는 돈이 없으니깐 우리한테 오는 거야. 우리는 나이 먹었으니까 삼십 분에 2만원도 받고, 3만원도 받고, 만5천원도 받고 그러니까. 젊은 애들은 5만원도 받고, 저 유리방(손님이 여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로 되어 그 안에 여성들이 배치된 업소) 애들은 7만원도 받고 그래. 암만해도 이쁘고 젊고 지네들 맘에 쏙 드는 애들한테 가면은 돈 십만 원만 주면 잠깐 놀고 나오는 건데. 그게 좋지. 누가 나이 많은 사람이랑 놀려고 하겠어! (…)

 

종로에 ‘박카스 아줌마’들 있잖아. 나는 보지는 않았는데 손님들이 와서 얘기해. 우리가 ‘이 만원만 주세요’ 이러면 종로가면 만원이면 하고 만 오천원이면 하는데 그렇게 달라고 한다고. 그거를 깎을라고 그러는 거야. 그러면 나는 ‘그런 데로 가요. 나는 못하니까. 가시면 되잖아요. 가서 술 팔아주고 가서 재미 봐요.’ 그러면 가는 놈도 있고. 딴 데 가서 노는 놈도 있고. 남의 속만 상하게 해놓고 가는 거야. 그럼 나 혼자 훌쩍훌쩍 우는 거야. 속이 상해서.” <일다 2015년 12월 23일자 기사 “성을 파는 노년여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에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들이 만난 순자 씨의 이야기다. 인터뷰가 이루어진 2015년에 64세였으니, 2016년인 지금은 65세. 올해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녀는 곧 66세가 될 것이다.

 

순자 씨는 최근에 나온 영화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의 소영과 같은 나이다. 영화 속 허구의 인물 소영은 전쟁 통에 고아가 되어 남의 집 ‘식모살이’와 공장노동을 거쳐, 돈이 된다는 동두천에 흘러든 여자다. 흑인군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젖도 떼기 전 입양 보낸 ‘몹쓸’ 엄마다. 현실 속 순자 씨는 남편과 사별한 뒤 아이 다섯을 ‘내버리지도 않고, 방에다 불 피우고 같이 죽지도 않고’ 키우기 위해 OO성매매 집결지로 들어와 거의 30년을 일한 여자다.

 

소영은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빈 병이나 폐지 줍는 건 자존심 상해서 ‘이 일’을 한다. 탑골공원과 장충단 공원에서 박카스를 파는 그녀의 ‘죽여주는’ 솜씨는 일수를 찍고 집세를 내며 하루하루 연명할 정도의 수입을 보장한다. 이제는 막내손녀에게 갈 때마다 만원씩 손에 쥐어주곤 할 정도로 사는 순자 씨는 아직도 ‘이 바닥을’ 못 떠나고 있다. 여전히 ‘씨발년, 개같은 년’ 같은 폭언에 물리적 폭력의 위험도 만만치 않은 ‘팔자 나쁜 년’의 공간이지만, 30년 동안 먹고 잠 자고 일해 온 이곳은 그녀에게 또한 편안하고 익숙한 장소다. 자식들은 순자 씨가 이 동네에서 ‘이 집 밥해주고 저 집 밥해 주며’ 산다고 알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쿨한’ 이미지와 연기로 여자 남자 구별 없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 윤여정이 ‘박카스 할머니’ 역을 맡았다고 해서 개봉 전부터 관심을 끌었던 <죽여주는 여자>는 현실 속 박카스 할머니의 경우처럼 젠더, 노년, 빈곤을 교차적으로 질문할 것을 촉구한다. 영화를 본 네티즌들의 트윗이 증명하듯 영화는 시종일관 애잔하고 씁쓸하고 우울한 정조로 2015년을 살고 있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의 궁색하고 고단한 일상을 보여준다.

 

(‘소영’은 ‘So young!’을 한국어로 표기한 것이고, 소영 스스로도 ‘할머니, 할머니 하지 말아요. 듣는 할머니 기분 나쁘니까!’라고 톡 쏘듯 말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100세 시대를 말할 정도로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65세의 여성을 ‘할머니’라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젊은 여성들의 ‘워너비’인 윤여정이 연기하는 소영은 ‘할머니’와는 거리가 꽤 있다.)

 

영화를 보는 나는 무엇보다 심란했다. 애잔함이나 씁쓸함, 우울로 수렴되지 않는 감정의 갈래들이 을씨년스런 초겨울 날씨의 낙엽처럼 흩날렸다. 종로3가 지하철역이나 낙원상가 뒤편에서 마주쳤던 박카스 할줌마(일베 등에는 박카스 판매 여성의 ‘구매 후기’가 실리는데, 여기서 이들은 ‘할줌마’ 즉 할머니와 아줌마의 혼합형으로 불린다. 박카스 파는 여성들이 5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기 때문이다)의 모습과 함께, 위에 인용한 “성을 파는 노년여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도봉구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 1호선을 탈 때마다 그 압도적인 숫자에 놀라게 되는 ‘노년승객들’도 영화 속 탑골공원 노년들과 함께 화면에 등장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장충단 공원은 내가 꽤나 자주 가곤 하는 산책로이기도 해서 그곳에서 우연히 스쳤던 여자들과 벤치에 앉아있던 나이 든 남자들의 모습 또한 새삼 또렷이 상기되었다.

 

조력자살이라니…가당치 않은 설정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것들은 두 개의 영화적 설정과 관련된다. 하나는 소영이 세 들어 살고 있던 이태원 ‘다문화 소수자 유사 가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여주게 그 일을 잘 하는’ 여자가 죽음을 원하는 남자들을 ‘죽여주는 일’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포스터

 

트랜스젠더 ‘언니’가 집주인인 이태원의 오래된 낡은 집에 피규어를 만드는 젊은 장애인 남성과 65세의 박카스 판매여성,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여성과 코피노 소년이 함께 산다는 설정은 비록 동화처럼 보이긴 했어도 그렇게 비현실적이지 않은 상상력이다. 그런데 왜 영화는 이들을 끝까지 ‘가족’으로 주장하지 않고 소영을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하는지. 결과적으로 그 유사 가족을 피상적인 (그래서 상투적인) 소수자들의 나열 내지는 전시로 떨어지게 만드는지.

 

이 이태원 ‘다문화 소수자 유사 가족’의 설정이 실패한 것은 물론 두 번째 설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자신의 죽음을 위해 성판매 여성의 ‘손’이 필요했던 늙은 남자들의 이야기는 영화가 지향했던 사회 비판에도 불구하고 용인하기 어렵다. ‘죽여주는 여자’라는 제목의 수사학적 효과도 그래서 불순한 앙금을 남긴다.

 

이들 남자들의 나약함과 비겁함, 아니 비열함에 대해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하는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솔직히 영화적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 주길 바라는 요량도 없지 않았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영화적 설정으로만 머물 수 있는가. “그분이 너무 원해서” 독극물을 건네는 소영의 ‘공감 능력’은 남자들에게서 ‘소영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보살 아니냐. 자비를 베풀고 그 죄를 자신이 다 안고 가니까’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반응은 여성들의 몸과 그 몸을 구매하는 남성들의 화폐 교환을 기구한 운명의 여성과 그 운명에 이해와 동정으로 함께하는 남성 사이의 윤리적인 만남으로 낭만화함으로써 계급적, 정치적 맥락을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가부장적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처럼 오랜 가부장적 성 정치학의 전통에 기대어 ‘조력자살’이라는 사회적 의제를 제안한다고? 영화 속 소영의 조력자살은 영화가 의도한 것처럼 연민과 공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강제에 의한 것으로 지각된다.

 

혼자 죽는 것은 무섭고 막막하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전혀 의논한 바도 없이, 살인자의 누명을 쓸 게 명백함에도, 자살하는 자기 곁을 지켜 달라고 조르는 것은 이기심일 뿐 조력자살과는 무관하다. 재우가 당혹해하는 소영의 입에 수면제를 밀어 넣는 장면은 모텔 방에서 오럴 섹스를 해달라며 막무가내로 소영의 머리를 자신의 성기에 밀착시키는 남성 구매자의 장면과 겹쳤다. 용기 없음 때문이든, 남성성을 향한 욕망 때문이든, 이들이 소영이라는 박카스 판매 여성을 ‘이용’하는 것에는 동일한 남성 판타지와 계급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 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중에서

 

“늙은 창녀”와 남성지식인 작가의 조합

 

영화는 소영이 ‘퇴적 공간’(오근재는 <퇴적 공간: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민음인, 2014)에서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을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를 인정받지 못해 질료적이고 잉여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군이 하구의 삼각주처럼 퇴적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부른다)에서 만나는 이 남자들의 처지가 소영의 그것보다 크게 나을 게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쓸쓸하고 처량하고 비참한 노년이라는 일반화의 배경 속에서 65세에도 성을 판매해야 생존이 가능한 여성과 돈 주고 구매한 그 여성의 몸을 매개로 남성성을 확인하다가 이제 (모든 실존의 다양성을 박탈당하고) 불능, 뇌졸중, 치매라는 최소한의 생존으로 축소된 노년남성 간의 관계는 ‘동병상련’ 혹은 ‘우정’의 외양을 입는다.

 

여기까지는 있음직한 이야기다. 노동의 장에서 밀려나고 사회에서의 쓸모도 인정받지 못한 채 점점 더 가까워지는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이들은 구조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통감각을 나눌 수 있다. 도시의 인위성과 새로운 기술문명 시스템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잉여존재로서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소멸을 경험해야 하는 게 현재 노년의 실존 조건이라면, 이 조건을 젠더 규범성을 넘어 해방적 연대를 꾀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더 이상 존엄한 삶이 가능하지 않다면 단호하고 진지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동맹할 수도 있다. 이 죽음은 자신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살이 아니다. 자유죽음은 최후까지 존엄하고 품위 있게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유야말로 개인의 주권에 속한다고 외친다.

 

영화 <씨 인사이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4)에서처럼 사지마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 자유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법이 금지시킨 행동에 누군가를 조력자로 동참시키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상호이해와 설득, 질문과 논쟁의 과정을 요구하는가를 <씨 인사이드>는 깊이 있게 증언한다. 그만큼 ‘죽기를 원한다는 것’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 어긋난다고 사회문화가, 종교가, 법이, 정치가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 조력자살, 존엄사와 같은 자유죽음에 대한 화두를 깊이 있게 던진 영화 <씨 인사이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2004) 중에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죽여달라’는 청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강제일 수 있다. 특히 그/녀가 보여준 남다른 민감성이나 공감, 연민을 ‘미끼’삼아 (의도한 것이든, 결과로든) ‘살인자’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것은 더욱 윤리적으로 용납되기 어렵다. 심리적 용기의 차원 뿐 아니라, 도덕적 승인의 차원에서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자살’의 화살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것이다.

 

소영에게 강제로 부여된 ‘죽여주는 여자’의 역할은 노년에게 박탈된 사회 안전망이나 존엄의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즉 사회적으로 ‘인용할 수 있는’ 조력자살이나 존엄사 등 ‘자유죽음’의 맥락에 위치해있지 않다. 그녀에게 남자들이 ‘감히’ 이 역할을 맡길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가족도 없이 홀로 살며 몸을 파는 ‘늙은 창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무연사’로 처리될 여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20세기 말에 나온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잇는 21세기 초의 후속편 같은 것이다. 이 숨은 논리를 드러내놓고 보면, 이태원에서 꾸려졌다고 가정된 저 ‘다문화 소수자 유사 가족’의 이념조차 기만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처음부터 무연의 떠돌이 늙은 창녀로 그녀의 정체성을 못박아둔 상태에서 펼쳐진 저 비혈연 소수자 연대체는 좌파(를 지향하는) 남성(지식인이고자 하는) 감독의 취향 정도로, 또는 알리바이 정도로 미끄러진다.

 

자유죽음인가, 관심의 호소인가

 

<죽여주는 여자>에서 ‘죽여달라’ 청하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가혹한 실패와 좌절(에셰크echéc)의 삶에 결연하게 ‘아니’를 외치며 존엄을 추구하는 자유의 목소리보다는(장 아메리, <자유죽음-삶의 존엄과 자살의 선택에 관하여> 김희상 옮김, 산책자, 2010) 깜깜한 절망의 어둠 속에서 ‘도와달라’를 외치는 호소의 목소리에 더 가깝다.(어윈 슈텡겔,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전종숙 옮김, 조선일보사, 1986)

 

전자는 타협할 수 없는 존엄의 차원이고, 후자는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차원이다. 전자는 존엄을 위해 자신을 파괴한다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견디는 것이고, 후자는 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죽는 경우다. 전자의 이해를 위해서는 현상학적 내부 시선이, 후자의 심리학에는 사회학이 분석적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자유에 방점이 찍힌 자유죽음과 호소의 몸짓인 자살의 사이에 언제나 뚜렷한 금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분명 (여자 없이 홀로 사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남자들’의 ‘도와 달라’는, ‘좀 더 관심을 갖고 보살펴 달라’는 호소가 크게 울린다.

 

▶ 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중에서

 

이 영화가 ‘버려진’ 노년의 삶이 처한 비참함과 소외, 고립을 사회 문제로 공론화시키겠다는 본래 의도를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죽음 선택의 이유’를 좀 더 철저하게 철학적 인간학의 차원에서 고심했어야 했다. 또는 사회학적 분석을 원했다면 ‘죽여주게’ 성 서비스를 잘하는 박카스 할머니도, 이 여성 외에는 타자와의 교류가 전무한 노년남성의 환경도 좀 더 치밀하게, 현장 밀착적으로 탐색했어야 했다.

 

노년들이 처한 이 비참한 구조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구태여 현장 연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감독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년과 계급을 함께 보는 관점도, 젠더 관점도, 삶과 죽음을 뫼비우스의 띠로 이해하는 관점도, 사회적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 조금씩 건드려질 뿐 뿌리 깊게 반성되지도, 전복적으로 가로질러 변형되지도(trans-form) 못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다. 이 모든 의제들이 그나마 의제로서 전달된 것은 전적으로 ‘뛰어난 여배우 윤여정’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위협을 느낄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누군가가 우릴 도와줄 것이라 믿고 ‘도와주시오’ 외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죽여주는 여자>는 이런 시절이 과거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도와주시오’를 잘못된 방식으로 타전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물론 타전 자체는 의미심장하다. 오인도 이해의 필수 부분이며, 잘못 보낸 타전도 메시지의 필수 부분이다. 그래서 <죽여주는 여자>는 의미심장한 영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후는 고착된 젠더와 계급, 문명사회 규범의 틀을 거슬러 크게 한번 ‘반항’할 수 있는 인생의 시점이다. 또한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보이던 그룹이나 진영 간에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시기다. 논쟁이 들끓지 않는다면, 다섯 중 하나가 65세 이상인 100세 시대에 세대간 계급간 젠더간 평화로운 공존은 힘들 것이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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