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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생계형 알바를 하는 청년여성들>② “힘내, 민정!”



※ 직업이라고 하기엔 불안정하고 열악하며, 아르바이트라고 하기엔 장시간 일하고 급여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른바 ‘생계형 알바’를 하는 10대, 20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이 기획은 빈곤-비진학 청년들의 진로 탐색과 자립을 돕는 협동조합 <일하는 학교>와 은평구청소년문화의집 <신나는애프터센터>와 함께하며,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학교 밖 청소년으로 처음 인연 맺은 ‘민정’

 

민정은 스물여덟 살 청년이다. 어릴 때부터 빈곤했고, 직업을 가지기 시작한 지금도 빈곤하다. 부모나 가정의 돌봄을 거의 받지 않고 성장한 청년이기도 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학교 밖 청소년이기도 했다.

 

나는 10년 전 한 대안학교에서 열여덟 살 민정을 처음 만났다. 민정은 학생이었고 나는 담임교사였다. 경험 없는 신입교사였던 나는 민정이 겪고 있던 빈곤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 자세히 물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그냥 같이 공부하고 노는 일들만을 할 수 있었다.

 

10년이 흐른 지금에야 민정의 지난했던 삶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민정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성숙과 여유를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밥하는 다섯 살 아이

 

▶ 민정은 다섯 살 때부터 밥을 해먹었다. 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지금도 밥을 혼자 챙겨 먹는다.  ⓒ이정현


“제대로 밥을 못 먹고 자랐어요. 아빠는 일 때문에 늦는 날이 많고 지방 내려갈 때는 한 달 씩 안 들어오기도 했어요. 밥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못 먹고 굶는 날이 많았죠.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 늘 영양실조 상태였어요. 고도빈혈 때문에 툭하면 쓰러지고 그랬어요. 어릴 때 못 먹어서 지금도 저는 뼈가 약해요. 잘 부러져요. 자주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키도 작은 거 같아요.”

 

“다섯 살 때부터 압력밥솥에 밥을 해먹었어요. 언니랑 둘만 있는데 너무 배가 고프니까 방법도 모르면서 밥을 했어요. 언니는 겁이 많아서 그런 거 할 엄두도 못 냈거든요. 처음에는 다 태워먹어서 아빠한테 엄청 맞았어요.”

 

“학교 준비물 사야 하는데 아빠한테 돈 달라고 말하기가 무서워서 문방구에서 ‘찰흙’같은 거 몰래 훔치고 그랬어요. 한번은 ‘바비인형’이 너무 갖고 싶어서 몰래 들고 나왔는데 그걸 주인이 알았나 봐요. 아빠한테 연락 와서 그 날도 엄청 두들겨 맞았어요.”

 

민정은 성남 구도심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산중턱에 늘어선 허름한 다세대 주택단지, 그곳의 한 지하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빠, 그리고 언니와 함께.

 

건설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집을 비우거나 귀가가 늦는 날이 많았다. 어린 자매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가끔씩 위층 사는 아주머니가 어린 자매를 불러다 밥을 챙겨주기도 했지만, 이웃의 선의가 일상을 모두 책임져줄 수는 없었다.

 

민정은 그 집의 화장실을 기억했다. 집 바깥에 있던 공용화장실. 민정의 집에 화장실이 없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공용화장실에 가야했다. 열네 살 때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민정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집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거였다.

 

두 번 떠난 엄마, 가족이라는 ‘애물단지’

 

가족에 대해 물으면, 민정은 강압적이고 때때로 폭력을 휘둘렀던 아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먼저 묻기 전까지 엄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궁금했다. 민정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민정과 언니를 떠났을까. 왜 어린 자매를 지하 단칸방에 남겨두고 다섯 살 아이가 스스로 밥을 짓게 내버려 두었을까.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집을 나가버려서 엄마 얼굴을 모르고 자랐어요. 언니는 엄마 얼굴을 아는데 저만 몰라서 속상했죠. 그러다가 열다섯 살 때 언니랑 가출해서 엄마를 찾아갔어요. 그때 엄마를 처음 만났어요. 엄마가 방도 구해주고 생활비도 내주고 해서 6개월 정도 잘 지냈어요. 언젠가 엄마랑 같이 살게 될 기대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저랑 언니가 살던 방에다 편지를 남겨두고요. ‘미안해, 더 이상 엄마 찾지 마’ 뭐 이런 내용이었어요. 전화번호도 바꿔 버렸더라구요.”

 

그렇게 민정은 엄마와 두 번째로 헤어졌다. 그리고 민정은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렸다.

 

“나에게 가족은 없다, 나는 고아다. 언니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민정이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빠는 집에 ‘아줌마’를 들였다. 아빠의 여자친구였다. 이후로 그 아줌마와 15년을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에는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사춘기, 반항심, 성격 차이는 민정과 아줌마의 긍정적 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정은 아빠와 아줌마가 사는 집에서 자취를 하는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다.

 

“그냥 각자 자기 인생 사는 거예요. 집에서는 잠만 자요. 서로 마주치거나 얘기할 일도 없구요. 어쩌다 마주쳐도 무시하고 빈정대는 말만 듣게 되니까, 웬만하면 방에서 안 나와요. 아빠랑 아줌마도 자기들끼리 살고 저는 신경 안 써요. 밥도 딱 2인분만 지어서 자기들끼리 해먹어요.”

 

“저한테 가족은 애물단지 같아요. 도움이 안 될 거면 짐이라도 안 되면 좋겠는데… 제가 결혼해서 가족이 생긴다면 ‘나하고만 다르면’ 좋겠어요. 내 아이들이 저처럼 주눅이 들거나 남의 눈치 보면서 살지 않기를 바래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너무 학대받고 엄마 없다고 놀림 받고 그러니까 자존감 떨어지고 자신감 없고 소심했는데. 그런 게 되게 콤플렉스였어요. 내 자식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검정고시 학력 ‘어린 여성’의 빈곤노동이란…

 

▶ 빈곤은 그저 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빈곤은 그저 ‘빈곤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가지는 것들을 앗아간다. 그 상실은 삶을 뒤흔들고 상처를 내고, 힘을 내려는 순간마다 나타나 다시 넘어뜨린다. 세상사람 누구나 당연히 경험할 것 같은 ‘학교’ 따위도 마찬가지다.

 

“열일곱 살 때 학교를 그만뒀어요. 고등학교 입학한지 일주일 만이었어요. 여럿이 같이 지각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저만 꿇어앉히고 혼을 내더라구요. ‘딱 봐도 삐딱해 보여’, ‘등록금은 왜 아직도 안냈어?’ 이러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그 다음날부터 학교를 안 나갔어요. 그러다 일주일 만에 자퇴서를 냈죠.”

 

“중학교 때부터 학교 다닌 기억이 별로 없어요. 처음에는 대인기피가 심해서 학교생활이 어려웠어요.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엄청 낮고 주눅 들어 있었어요. 사람 눈도 못 쳐다봤고 맨날 집에만 있었어요. 2학년 때는 가출해서 1년 내내 나가 있었고, 3학년 때도 결석을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고등학교 안갈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매년 7만 명 넘는 청소년들이 학교를 떠난다. 그 중에 상당수는 민정과 같이 빈곤의 영향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학업 중단’은 20대, 30대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좀처럼 생계형 알바, 빈곤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학교 다닌 기억보다 일한 기억이 많아요. 아빠한테 돈을 못 받으니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알바를 했어요. 처음에는 써주는 데가 없어서 전단지 알바부터 했구요, 주유소, 백화점, 편의점, 피씨방에서 알바를 많이 했어요.”

 

“스무 살 때 검정고시 합격하고 나서부터는 취업 준비를 했어요. 사무직 취업하려고 국비직업학원에서 전산회계랑 엑셀, 워드 이런 걸 배웠어요. 조그만 의료기 회사, 인터넷쇼핑몰, 관세사무소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어요. 그런데 대부분 일을 오래 못했어요. 평균 3개월 정도.”

 

검정고시 출신의 고졸 학력,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대인관계의 어려움. 게다가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여성노동자’에게는 취업을 하는 것도, 그곳에서 버텨내는 것도 너무 힘겨웠다.

 

“의료기 회사에서는 성희롱이 심했어요. ‘너 어디 제모 했냐?’, ‘쓸 거는 몸밖에 없다’ 이런 말 듣고 엄청 울었어요. 쇼핑몰 회사에서는 노총각 사장이 절 계속 꼬시려고 해서 힘들었어요. 회식 만들어서 맨날 술 먹이고 어디 데려가려고 하고. 관세사무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 스펙이 엄청나서 위축이 좀 됐어요. 업무 용어도 너무 어렵고 일도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그만뒀어요. 계속 그렇게 일을 오래 못하고 그만두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의지가 약해보여서 자존감이 엄청 떨어졌었어요. 어떻게든 버텨내면 뭔가 될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돌파구를 찾아서, 학점은행에 등록하다

 

이후로 몇 차례 취업과 실직을 반복하면서 민정은 회의를 느꼈다. 의미 없는 일들에 자신이 소모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확고하게 ‘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찾게 되었다. 전문적이고 의미 있는 일.

 

“스물세 살 때 사무직 일이 잘 안 구해져서 편의점 알바를 1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가 ‘사회복지사’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뭔가 확고한 내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 얘기 들어주는 걸 잘했고 몇 마디 조언해주면 ‘너무 고맙다, 힘이 난다’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런 걸 직업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더라구요.”

 

사회복지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대학공부에 대해 조언을 구할만한 친구나 지인이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어린 시절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점은행제’에 등록했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할 수 있고 빨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을 병행해야 하는 민정에게는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다.

 

“아무 정보 없이 시작한 거여서 처음에는 제가 하는 게 사이버대학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학점은행제는 사이버대학처럼 소속 학교가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졸업을 빨리 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모르는 게 있어도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고, 사람들한테 학점은행제에 대해 설명하기도 어렵더라구요.”

 

▶ 국가평생교육진흥원 학점은행 사이트 (www.cb.or.kr)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까 일주일에 3일은 55만원을 받으면서 약국에서 일을 했어요. 학비, 교통비, 핸드폰비, 식비하고 나면 한 푼도 안 남아서 힘들었죠. 일 안하는 날에는 컴퓨터가 있는 언니집, 친구집 왔다 갔다 하면서 인터넷 강의를 들었구요.”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만 공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함께 공부하고 경쟁도 할 수 있는 친구도 없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컴퓨터, 인터넷, 프린터 등의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한 환경들도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민정의 새로운 도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공부하기 어려운 물리적 환경이 아니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아무도 나를 격려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였어요. 하나같이 절대로 사회복지사 하지 말라고 말리는 거예요. 힘들다고. 제가 좀 믿었던 사람들이 ‘네가 사회복지사를 하겠다고? 잘 생각해본 거야?’ 이렇게 말해서 서러웠어요. 내가 처음으로 뭘 마음먹고 해보려고 한 건데… ‘힘내, 잘할 수 있어!’ 이렇게 파이팅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2년간 고생해서 어렵게 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었지만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검정고시 출신, 학점은행제 학력에, 이력서에 쓸 만한 마땅한 자원봉사나 활동 경력이 하나도 없었던 민정은 좀처럼 취업 관문을 뚫지 못했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한 달을 넘기기 어려웠다. 취업을 하는 것도, 사회복지사 업무를 습득하고 적응하는 것도 버거웠다.

 

“백 군데 넘게 지원을 했는데 면접 연락 온 데는 서너 곳밖에 없었어요. 중간에 요양보호센터랑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기는 했는데 오래는 못했어요. 요양보호센터는 최저임금도 안주면서 토요일까지 일을 시켜서 그만뒀고요. 성폭력상담소는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알아서 배워서 해야 했는데, 일이 어렵고 제가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만뒀어요.”

 

민정은 자신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은 것’이 사회생활에서 큰 장애가 된다고 느꼈다.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인맥이 없어요. 취업 준비할 때 대학 다닌 친구는 교수님이 정보도 주고 어디 추천도 해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인간관계도 너무 좁아요. 보통 사람들은 고등학교, 대학교 때 친구가 제일 많은데 저는 그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대학 나온 친구들 만날 때는 좀 어색한 게 있어요. 학교 어디 다녔냐고, 몇 학번이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학점은행제를 설명하기 어렵거든요. 걔들은 주로 일반 캠퍼스 생활을 얘기하는 거고. 어떤 애들은 ‘에이 그게 학점만 딴 거지 무슨 대학이야?’ 이렇게 말해요. 대학을 안 나온 애들은 학교 얘기를 안 하지만, 대학 나온 애들은 꼭 학교 얘기를 하더라구요.”

 

▶ 민정은 자신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은 것’이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큰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사회복지사가 될 거예요”

 

궁금했다. 민정은 자기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빈곤에 대해서, 그리고 학력과 기회의 한계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세상을 탓하고 싶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민정은 여전히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해서 노력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한 거 같은데, 제 인생의 노력점수는 7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아요. 그때 왜 공부를 안했을까? 왜 더 열심히 일 안했을까? 왜 더 못 버텼을까? 이런 아쉬움이나 후회가 많아요. 경제적인 문제나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으니까 일에 집중을 못하고 설렁설렁 할 때가 많았던 거 같아요.”

 

“사회복지사 자격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지금은 학점은행제로 아동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2년 공부하면 보육교사 자격증이 나와요. 사회복지사 자격에 그거까지 있으면 지역아동센터 같은 곳에 취업하는데 도움 될 것 같아서요.”

 

올해 초부터 민정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학교 밖 청소년 대안학교의 보조교사 역할이다. 하루 네 시간 일하고 60만원의 월급을 받는 파트타임 일자리. 자신의 역할과 위상이 불명확해서 민정은 혼란과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수업 못 따라가는 애들 도와주거나 학교 안 오는 애들 연락하고 불러오는 보조교사 역할을 해요. 수업이나 캠프 참가 안하려는 애들 꼬시고 다독이는 역할도 하구요. 그런데 말이 선생님이지 직접 수업할 수 있는 과목이 없으니까… 명확한 내 업무도 없는 것 같고 위치도 불안정하게 느껴져요.”

 

“그래도 저만의 강점이 있어요. 담배를 피우는 애들이 많은데, 저도 어릴 때부터 담배를 폈으니까 같이 담배 피우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게 되요. 그래서 저를 유독 따르는 아이들도 생겼어요. 가르치는 것도 없는데 얼마 전에는 제 생일이라고 애들이 초코파이 쌓아 만든 케이크로 깜짝 파티도 해줬어요. 눈물 나더라구요…”

 

민정에게 사회복지사의 꿈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과 닿아있었다. 민정은 ‘사회복지’를 통해 자신의 상실과 아픔을 스스로 극복하고 채워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민정이 꿈꾸는 사회복지사는 ‘무책임하게 떠나버리지 않는 사회복지사’였다.

 

“끝까지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어릴 때 가출해서 엄마 만났다가 헤어졌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 아동보호기관에서 6개월 정도 상담을 받았는데, 그 상담사에게 마음열고 의지하면서 안정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전화했더니 일 그만뒀다면서 다른 상담사를 연결해주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기가 차던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구나. 다 때려치우자’고 생각했어요. 다시 방황이 시작됐죠.”

 

“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제가 아무리 힘들고 더 좋은 일자리가 생기더라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힘내, 민정!


이틀간 민정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 속 민정의 삶은 비극과 부조리로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민정은 그 이야기를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털어냈다. 내가 자꾸만 빈곤에 대해 물으니 민정도 빈곤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민정은 빈곤에 눌려 허덕이거나 우울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민정은 빈곤을 삶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건들처럼 여겼고,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민정은 빈곤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아니면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 존경과 미안함을 느끼며, 민정에게 뒤늦은 응원을 보낸다.  힘내, 민정!  


민정은 청년들이 취업, 연애, 결혼을 포기한다는 ‘5포 세대’, ‘7포 세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월급 백만 원만 받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생각했고, 보증금 5백만 원에 월세 30만원 짜리 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민정은 곤궁한 중에도 어떻게든 여유를 만들어 사람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여행을 다녔다.

 

나는 민정의 이야기에서 존경심을, 한편으로는 미안함을 느꼈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견뎌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른’의 얼굴로, ‘교사’의 이름으로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정이 사회복지사라는 새로운 꿈을 가졌을 때 힘껏 박수를 보내고 격려하지 못했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민정의 안간힘과 분투에 함께하기보다 한 발 물러서 지켜보며 짐짓 평가하고 있었으니까…

 

민정의 꿈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자신의 바람대로 한결같은 사회복지사가 되고, 당당하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는 가정을 꾸리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민정의 바람들에 공감하고 격려해주면 좋겠다. 

 

늦었지만 나를 부끄럽고 미안하게 만든 민정의 근성과 단단함에 박수를 보낸다.

뒤늦은 격려와 응원도 함께.

 

“힘내, 민정!”   ▣ 이정현 <일하는 학교>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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