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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는 ‘일시적 감정’ 아닌 ‘구조’의 문제

여성단체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긴급 집담회서 대책 촉구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여성들의 추모와 말하기(speak-out)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애도와 공감을 표하며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 데이트 폭력, 길거리 괴롭힘, 여성 비하 발언, 성차별 경험들을 쏟아내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째인 어제(27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는 지난 24일에 이어 <나쁜 여자들의 밤길걷기>가 열렸다. 같은 날 신촌 연세로에서도 <반여성혐오 자유발언대>가 진행됐다. 부산 서면, 대구 중앙로역, 수원역 앞에서도 추모와 자유 발언대가 진행되었다.


▶ 5월 24일 밤 강남역 부근에서 진행된 <나쁜 여자들의 밤길 걷기> 참가자들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다. ⓒ 일다

 

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살해사건을 두고 ‘여성혐오’ 사건이라 이름붙인 데 비해, 강신명 경찰청장은 “혐오는 의지가 들어가야 한다”면서 이 사건은 조현병 환자의 ‘비의지적’ 행위, ‘묻지마 범죄’이기 때문에 여성혐오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대책으로, 3개월간 여성범죄 대응 특별 치안활동, ‘스마트 워치’ 지급, 정신질환자를 강제입원 시킬 수 있는 ‘행정입원’ 조치 등을 내 놨다. 또 서울시는 서울시 내 남녀공용화장실 전수 조사를 하고 남녀 화장실 분리 설치와 관련된 법 개정안을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은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들의 절규나 고백과는 접점이 거의 없어 보인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이자 ‘여성살해’ 범죄

 

지난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는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과 이후 나타난 흐름을 진단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여성폭력의 현실을 짚어보는 자리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8개 단체가 함께하고 있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이 자리에는 4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고 시종일관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 5월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 ⓒ일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혹은 증오범죄’(hate crime)이자 ‘여성살해 범죄’(femicide)”로 정의했다.

 

이 교수는 “많은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는 걸 불쾌해 하면서 ‘나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아’라고 반응하거나, 강신명 경찰청장처럼 ‘혐오는 의지적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단순히 혐오를 감정적인 것, 일시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나영 교수는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낸시 초도로우의 분석을 빌려 “여성혐오는 위계적인 젠더 질서 즉 성차별 구조와의 연관성 속에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성차별 사회에서 남성들이 자신의 특권이자 우월적 지위인 ‘남성성’이 훼손당했다고 느낄 때, 무시당했다는 굴욕감은 여성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이것이 폭력적 행위로 발현된다는 것.

 

이번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범행 동기를 말했다.

 

“무시당했다는 느낌, 굴욕감, 이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대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행위다. ‘평소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말은 ‘평소 내가 무시해 온 여자들이 감히 나(남자)를 무시해서 용납할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이나영 교수)

 

김수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또한 “여성혐오는 현실 사회에서 성에 기초한 폭력, 차별적 언행, 공공연한 차별 등이 만연할 수 있게 하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정서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또 “여성혐오는 최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유구한 역사와 그 역사를 같이 한다. 또한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동시대적인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 <나쁜 여자들의 밤길 걷기> 행진에서 여성들은 “우리가 밤길을 걷는다고 살해당하거나 성폭력을 당한다면,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여성혐오 사회의 잘못이다”라고 외쳤다.  ⓒ일다

 

경찰이 ‘혐오범죄가 없었다’ 단언한 건 무책임한 행동

 

법사회학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증오범죄법이 제정되어 있는 나라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증오범죄(hatte crime)는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며 장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성별정체성 등에 근거한 적대 또는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를 뜻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증오범죄법을 제정하고 ‘편견 동기’를 가진 범죄인 경우 가중 처벌 하고 있다. 독일은 2015년 형법을 개정해 ‘범죄자가 지니는 인종의, 외국인 배척의 또는 그 밖의 인간 경멸의 목적’을 양형 사유에 추가했다. 영국은 1998년에 만든 ‘범죄와 질서파괴법(Crime and Disorder Act) 28조에 “가해자가 범죄를 행하거나 행하기 직전 또는 직후에, 피해자를 향해, 피해자의 인종적, 종교적 소속 집단에 근거한 적개심을 드러낸 경우 가중 처벌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홍성수 교수는 “이렇게 증오범죄법이 제정되는 이유는 증오범죄가 사회의 중대한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이 평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처럼 피해자가 속한 집단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또 집단 간 긴장을 유발해 사회 안전을 해치기도 한다.”

 

그러나 홍 교수는 “혐오범죄는 주로 그 표적 집단(이주민, 성소수자 등) ‘전체’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데 비해, ‘김치녀’로 대표되는 한국의 여성혐오는 (혐오자들이) ‘일부’ 여성이 문제라면서 ‘여성 집단 전체’의 문제로 규정하는 것을 피해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여성은 양적으로 인구 절반을 차지하는 다수라는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현재 한국의 ‘여성혐오’는 증오범죄법에서 규정하는 일반적인 혐오 표현이나 증오범죄와는 다른 양상이 있다”고 설명했다.

 

홍성수 교수는 “증오범죄법이나 범죄학적 관점에서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을 ‘증오범죄’로 규정하는 것에는 판단의 여지가 있지만, 범죄 직후 이어진 사회적 반응은 ‘증오범죄’의 징후와 매우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피해자가 속해 있는 여성 집단 전체에게 가해진 충격과 공포, 그런 사건의 배경과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집단 간 갈등의 격화 등”이 바로 그 징후인 것.

 

나아가 홍성수 교수는 “경찰이 혐오범죄에 대한 정의를 갖고 있지도 않고 수사가 충분히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혐오범죄가 아니며 한국에는 그동안 혐오범죄가 없었다’고 단언한 것은 너무 성급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홀에 마련되어 있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 공간.   ⓒ일다

 

여성들의 요구와 무관한 대책 내놓는 정부

 

집담회 참가자들은 경찰 등이 내놓고 있는 대책이 이번 사건의 근본적이 대책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강남역 추모 게시판에 붙어있던 수많은 포스트잇 중에 ‘남녀 공용 화장실을 바꿔달라, CCTV를 설치해 달라’는 내용은 본 적이 없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여성들의 고백은 이 문제가 개인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별 권력관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걸 맞는 대책을 내어 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나영 교수도 “경찰이 사건의 본질과 여성들의 문제 제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경찰의 해법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도 우려가 된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내놓은 대책은 보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보호하는 ‘오빠 국가’의 구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런 사건을 낳은 성차별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봉쇄하고 다시 ‘위장된 평화’를 가져올 뿐이다. 결국 성차별 구조는 재생산되고 ‘가부장’ 국가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홍성수 교수 또한 “혐오와 차별적 의식이 살인사건 같은 강력 범죄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 데이트 폭력, 직장 내 성적 괴롭힘, 고용차별 등 수많은 유형, 무형의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경찰의 ‘강력범죄 치안대책’은 문제의 한 측면만 다루는 대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덧붙여서 “혐오의 근간이 되는 차별을 규제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나랑 기자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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