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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도시 대구, 여성노동의 역사 조명
대구여성가족재단이 펴낸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1908년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것에서부터 ‘세계 여성의 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0여년 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도 대구의 제사공장 여성노동자들이 하루 13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불결한 숙소 환경에 견디다 못해 공장 밖으로 나와 결집했다.

 

“70여명이 파업을 결심하고 대구 정거장 앞에 모였지만 날은 춥지,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넘어가지, 갈 곳이 없어서 결국은 다시 제사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박려옥 ‘대구 섬유산업의 궤적- 대구 제사공장 여공애사’, 대구여성가족재단 펴냄,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40p)

 

이 ‘실패’한 시위는 당시 공장을 탈출하는 여공들의 실태 등과 함께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한국 여성섬유노동의 역사는 노동권은커녕 시민권도 제대로 주장하기 어려웠던 일제강점기부터 출발한다. 대구는 국내 최대의 섬유도시가 되었고, 그 중심엔 일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구술로 펼쳐진 대구 섬유산업사, 지역 여성노동사

 

올해 4월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지역여성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서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1편을 펴냈다. 여성사 관점에서 대구의 섬유산업에 대한 기록과 기억을 정리했다. 그 기억들은 대구여성 다섯 분의 생애 구술로 채워졌다. 

 

© 대구여성가족재단이 펴낸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1편  

 

이 책의 특징은 실을 뽑는 것에서부터 천과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섬유 산업의 단계에 맞춰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견직물의 핵심 원료인 누에씨를 생산하는 잠종업체의 정말분(1932년생)을 시작으로, 면방직 기술자 김상태(1938년생), 염색가공공장 설립자 류병선(1940년생), 제직공장 기술자 남두연(1954년생), 대구 서문시장에서 원단 및 한복을 판매한 여계연(1939년생)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이어진다.

 

현재 나이가 대부분 칠팔십 대인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경제성장기, 그리고 경제혼란기였던 IMF 시절도 견뎠다. 그 사이 어떤 분은 자녀에게 일을 물려주고 지금은 소일거리를 하거나 살림을 하며 손자들을 돌보기도 한다. 혹은 호황기를 벗어난 섬유산업에서 나와 청소노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여성의 노동은 쉬이 멈추지 않는다.

 

“버스타고 이 가게에 올 때는 아직도 신이 나요. 가족들은 이제 위암수술도 하고 그랬으니 아버지하고 같이 산에 등산이나 하고 집에서 쉬라고 그러지만, 여기가 궁금해서 안돼요.” (여계연)

 

여성들은 노동으로 소통하는 동시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갔다. 일을 통해 공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서문시장 내에 상인들의 친목단체나 계모임이 있습니까?) 있지요. 우리가 45명을 맞췄어. 1지구, 2지구, 3지구, 4지구, 5지구에서 사람을 맞춰서 딱 45명이야. 그 안에 옷장사 하는 사람, 주단 포목하는 사람, 이불장사하는 사람 있는데 아무래도 처음 모집할 때 나이가 비슷하게 모았지. 우리 또래를 중심으로 모았지. 그렇게 하니 서문시장에 같이 장사해도 2지구나 3지구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평생 모를텐데, 이렇게 사람들을 알게 되니 더 분위기도 좋고 그랬어요. 시장 안에서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서로 분야가 다르니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이불이나 다른 한복을 맞출려고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우리 계원들이 하는 집을 소개해주게 되지요. 그래야 거기서도 우리 면 원단 찾으면 소개를 해 줄 거 아니겠어요.”(여계연)

 

“살림도 하고, 이 집안사람들 다 먹여살린 거지”

 

사회에 만연한 통념은, 가족생계를 부양하는 것은 남편이고 아내는 일명 반찬값이나 벌어 ‘보조’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지금의 현실에도 맞지 않지만, 약 30~40년 전의 현실과도 맞지 않았다.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상당수 남성들(남편, 아버지)은 집안 살림을 돌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경제적 지원을 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딸, 아내, 엄마, 며느리 역할은 기본이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아 둘이는 먹어야 되제, 돈 조금 주는 거 갖고 그거 쓰고 나니까 이 아저씨는 일자리는 구한다 카더마는 퍼뜩 안되겠더라고 내가 보니까. 그래 못보고 있어가지고 일자리 구하러 갔지 뭐. 처음에 일하러 갈 때는 슈퍼에 가서 ‘아지매 내 한 달만 아 과자 외상 좀 해주세요. 월급 받으면 주께요’ 처음에 한 달은 아 과자 외상 갖다 줬다. 과자는 먹을라 카제 우야노.”(남두연)

 

남두연 씨는 남편의 사업이 부도를 맞는 등 경제적 어려움으로 공장에 나가야 했다. 결혼하고서 5년의 공백을 제외하면 총 28년간 내리 섬유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김상태 씨 또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공장을 다녔다고 한다.
 

▲  지난 4월 17일 대구여성가족재단이 주최한 제1차 대구여성포럼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에서 발표하는 김상태 씨.   © 대구여성가족재단 
 

“내가 이 집에 시집을 와서 40일 만에 다시 공장으로 나갔어. 왜냐면 집에 돈이 없으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우리 신랑은 집에서 돈도 안벌이고 놀더라고. 그러니 우짜노 내가 또 일하러 나가야지. (중략) 우리 영감이 돈 10원을 안 벌여다 줬잖아. 자식 네 명 공부도 시켜야 되고, 살림도 하고 내가 이 집안사람들 다 먹여 살린 거지.”(김상태)

 

김상태 씨가 처음 섬유 일을 시작할 당시였던 1950년대 초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공장에 ‘빽’없이는 들어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공장노동자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3년 간 하고서야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이후 김상태 씨는 면방직 전문가로 거듭난다.

 

“처음 공장에 들어가면 실 푸는 거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꾸리 감는 거 배우고, 거기에 미마리하는 사람이 있어. 실을 이어주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 미마리가 하는 일 그거 또 내가 배웠다니까. 실 풀면서 제대로 돌아가도록 놔두고 미마리들이 자러 들어가면 내가 거기 서서 가만가만히 내가 배웠어. 그 다음에 미마리보다 더 돈을 벌 수 있는 게 바로 공사라고 하는 도이다 기술이야.”(김상태)

 

사실 도이다는 기계 이름으로서 섬유 공정 중 ‘통경’이라는 과정을 의미한다. 김상태 씨는 실 푸는 것에서 미마리, 미마리에서 도이다라는 기술을 습득한 이유는, 하는 업무나 기술에 따라 임금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술들을 연마해나가며 ‘전문성’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여공들과는 다르게 하대를 받지 않고 ‘기술자’로 인정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기술이 있으니까 공장에서 하대하지는 못하지. 공장직원도 아니고 결혼도 했으니 말을 턱턱 놓고 그러지는 안하지. 그런데 일반아가씨들은 공장에서 이름 안부르고 ‘김양, 이양’ 이렇게 부르대. 그래도 나는 이 기술이 있다고 어디가도 다 나를 알아주고 그러지만, 아무래도 섬유공장에 댕긴다고 하면 사람들이 인식이 안 좋지. 우리 동네 할매들 보면 전부 다 섬유공장에 댕겼는데, 다들 옛날에 힘들었던 시절에 여자들이 어디 댕기겠노. 다 무슨 메리야스 공장이나 모직공장 다 다녔다. 누가 안 물으면 내가 공장에 다녔다는 말을 안하지. 그래도 나는 이런 기술로 여기 저기 댕겼다고 칸다. 그라고 우리는 기술자니까 여기저기 공장에 가도 대접을 해준다. 공장 직원들하고 같이 식당에서 밥 안먹는다. 우리는 따로 더 맛있는 거 딱 시켜준다. 그러니 공장 사람들하고 부딪힐 일도 없고 대우는 항상 좋다. 우리가 공사 해줘야 기계가 돌아가니까, 아무래도 기술이 있는 게 중요하지.”(김상태)

 

첫 단추부터 성별 분리, 벌어지는 남녀 임금격차

  

▲  대구여성가족재단이 펴낸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책에 소개된, 이정희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6년 섬유공장의 총 수는 1천368개로 전체 공장 수의 82%를 차지했다. 섬유공장의 노동자 수는 2만6천59명에 달했고 전체 노동자 수의 78%를 차지했다. 섬유공장의 특성상 여성노동자가 많았기에 약 2만명 가량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김상태 씨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수많은 대구 여성들이 섬유산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물론 남성노동자도 있었다. 그러나 하는 일이 달랐다. 문제는 이러한 성별 차이가 단순히 성별로 맡은 직종이 분리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업무에 따라 급여의 차등이 있었다.  

 

“둘 다 남동생인데 내 따라 댕기며 직조공장으로 들어왔지. 동생들도 성창직물에 들어와서 기술을 배웠지. 다 배워서는 다른 공장으로 갔지. 남자들이라 베 짜는 거를 베운 게 아니라, 기계 고치는 기술자, 직조 기계 고장 나면 고치는 기계 기사다. 내가 공장에 댕기니까 내가 이래 보니 남자들은 기계만 좀 다루면 당시는 돈을 제법 받는거야. 그래 동생들 보고 여기저기 시원찮은 데 댕기지 말고 내 따라 댕기며 직조 기계 이런거 배우라고 그랬지. 직조 기계 그것만 잘 봐도 남자는 괜찮다니까.”(김상태)

 

“기사는 기계 고치죠. 말하자면 자동차 정비기사들 고치듯이 기계도 고장이 나니까 고쳐야 되잖아요. 기사는 기계 고치고 위에 반장은 조금 되직하게 하고. 말 그대로 기사지. 기계가 고장이 많이 나거든요. 기사는 우리보다 월급이 좀 많고 반장은 더 많고 그렇죠.”(남두연)

 

김상태 씨는 남동생들이 본인이 하던 업무였던 ‘베 짜는 일’이 아니라 ‘기계 고치는 기술자’가 되도록 도왔다. ‘남자들은 기계만 좀 다루면 당시는 돈을 제법 받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섬유산업에 종사한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섬유공장에서 왜 남성과 여성의 일이 나눠졌으며 남성은 여성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을까? 1988년 대구 Y모직에서 약 한 달간 참여 관찰을 바탕으로 한 김미주의 연구를 살펴보자. “정경(세로 실을 만드는 작업)에서 남녀 직종이 분리되는 이유, 그리고 남성들이 하는 비밍(경사를 기계 빔에 감는 작업)이 어려운 숙련노동이라고 인정되는 이유는 ‘힘’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나사 조임’ 일을 주로 남성들이 하기 때문”이라며 노동의 가치가 저울질 되는 기준을 ‘물리적 힘’에서 찾고 있다. (김미주 ‘성, 숙련, 임금’, 조순경 엮음, <노동과 페미니즘> 189-190p)

 

그리고 이 “남성적 특징이라고 간주되는 ‘힘’은 여성이 가지지 않은 숙련노동의 ‘상징’이 되어 작업장 내 남녀 노동의 분리와 평가의 기준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남성노동과 여성노동이라는 성별 분리된 노동으로 첫 단추가 꿰어지고,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여성은 미숙련노동, 남성은 숙련노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성별 임금 차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여성 생애사는 왜 기록되어야 하는가

 

“노조 생기니 거기도 좋더라. 돈 안올려준다고 낮에 부장이, 부장도 못당한다. 노조가입은 반장까지만 가입해야 되거든요. 부장이 있거나 말거나 기계 쫙 세워버린다 점심시간에. 임금인상 안해준다고. 쫙 세우고 노래 부르고 놀고. 노조위원장이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르고 놀고 위원장이 돌리라 카면 돌리고 이렇다. 그래서 월급 올라갔죠. 인상됐어.”(남두연)

 

남두연 씨는 마지막으로 다녔던 섬유공장에서 노조 활동을 통해 월급이 인상된 적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불발된 제사공장 파업 때와 달리, 반세기를 훌쩍 넘은 후에 대구의 여성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 현재 남두연 씨는 공장을 그만두고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한다. 앞으로 계획은 “일하다가 몸 안 좋으면 일 안하고 돈 쬐매 벌어놨으니까 그걸로 잘 쓰고 잘 놀고 그러면 되지”라고 말한다.  

  

▲  4월 17일 제1차 대구여성포럼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에서 이미원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대구여성가족재단  

 

이미원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대구, 섬유 그리고 여성> 발간사에서, 이번 대구여성 생애사 1편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계속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닌 찾아내지 못한 이야기들”로서 지역 여성의 다양한 삶을 발굴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이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제 섬유도시는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고 이 흐름은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섬유산업과 여성, 지역의 여성노동 등 주류 산업과 노동의 역사 언저리에 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해 남겨놓지 않으면 그냥 잊힐 수 있다. 심지어 잊힐만한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여성사는 매번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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