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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것,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이 언니의 귀촌> 전북 남원의 대안학교 교사 혜선(하)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아이들의 상처가 나의 상처와 만날 때

  

“아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가 있어요. 아이가 화를 낼 때마다, 아이에게 물어보세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그 화가 무엇을 향한 것인지. 그렇게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 올봄, 아이들과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꽃과 세월호 리본은 모두 아이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 혜선 
  

늦은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요사채(승려들이 거처하는, 절에 있는 집) 마루에 앉아 선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된다. 아이들이 화를 낼 때마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를. 나의 마음 속에도 응어리진 상처 같은 것이 있다. 때로는 아이들의 상처가 나의 상처와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대안학교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도보여행을 많이 한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도 해마다 봄이면 길을 떠난다. 아이들과 함께 2주간 쌀과 밑반찬을 짊어지고 다니며 하루에 20킬로미터씩 걷고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잠을 잔다. 아이들과 24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순간도 있다.

 

올 봄, 열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할 때였다. 어느 날 하루를 마치는 모임 시간에 나눈 이야기다.

 

‘아까 저녁때 OO이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제가 화를 낼 일은 아니었어요. 화를 낸 것은 제가 잘못했어요. OO이에게 미안합니다.’

‘혜선쌤이 미안하다고 하시니까… 저는 그때 아, 혜선쌤이 많이 힘드시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나에게 있어 산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 피하거나 끊어낼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사람은 성장한다고 했다.

 

나는 이곳 산내에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안에는 지리산 지역 마을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와 여성농업인센터, 어린이집과 대안학교 같은 조직들이 있다.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은 산내라는 지역에서 어울려 살아가지만, 급여를 받으며 각자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공동체로 살아가기, 세 번째 해를 맞이하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면접을 볼 때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에서의 생활은 일반 직장 생활과는 다른,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을 그저 ‘주말에 더 많이 출근해야 되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주말에 더 많이 출근해야 함에도 이곳으로 오는 것을 선택했던 이유는, 진실되게 살아가고 싶어서였다. 나를 더 순수하게 해주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   재작년, 아이들과 섬진강 길을 걸으며  © 혜선  

 

첫해에는 많은 것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한해 더 있어보기로 했던 것은, 1년의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에는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해 안 되는 저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자 나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과도 잘 못 지내고 저 사람과도 잘 못 지내는데,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게 되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또 한해 더 있어보기로 한 이유는, 뭘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도망가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여기서 풀어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해를 맞이하게 되었던 봄, 난 수녀가 된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몇 년 만에 연락이 된 친구에게 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내 말을 다 들은 그녀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누군가를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처럼, 공동체의 다른 누군가도 그만큼 너를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그 사람도 너처럼 그렇게 애쓰고 있을 거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너랑 함께 살려고 누군가가 그토록 애쓰고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인지도 몰라.’

 

나를 사랑할 용기를 준 산내의 인연들

 

내가 산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학교와 숙소다. 학교에서는 사십여 명의 아이들과 열명의 교사들과 함께 살아간다. 숙소는 산내에 온지 얼마 안된 공동체 활동가들의 초기 정착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가족 숙소와 독신자 숙소가 있는데, 독신자 숙소에서는 두 명의 여성 활동가가 함께 생활할 수 있다.

 

처음 산내에 왔던 6개월간은 같은 학교 선생님 댁의 옆방에서 지내다가 활동가 숙소로 옮겨왔다. 활동가 숙소에서는 최대 만 2년까지 지낼 수 있는데, 나에겐 이제 그 기간이 다 되어간다.

 

           ▲   활동가 숙소 커튼. 먼저 떠난 활동가가 헌옷으로 한땀한땀 만들어 놓고 갔다.  © 혜선 
 

나는 독신자 숙소에서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산내에서 세 번째 해를 맞이할 때까지, 함께 살던 선생님들은 차례 차례 이곳을 떠났다. 지금은 올 봄에 새로운 선생님이 와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새로운 선생님이 오기까지 옆방이 비어있었던 몇 달이 혹독하게 추웠다.

 

지리산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많이 불고, 무엇보다 길다. 내가 혼자 어떻게 지난 겨울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옆방 선생님과 수다를 떨면서 맛있는 것을 해먹는 것이 산내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함께 살았던 활동가들은 혼자 산내로 왔던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을 만나서 함께 살아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선물이었다. 결혼을 해서 떠난 분도 있고, 전에 살던 곳으로 다시 간 분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혹 내가 네 번째 해를 맞이하지 못하고 산내를 떠나게 된다 할지라도 내 젊은 시절의 들끓는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그녀들이 언제나 그리울 것이다.

 

사실은 떠나게 되는 것을 종종 생각한다. 흔한 말로 집도 절도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올해가 마지막일 수 있다 생각하기에 감사한 것들이 많다. 산속에 하얗게 무리 지어 피어나는 찔레꽃에도 감사하고, 맑은 날 밤이면 교무실에서도 보이는 장터목 산장의 불빛에도 감사하다. 어떤 계절에, 어떤 날씨에, 어떤 시간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매일 다른 빛깔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지리산의 장엄한 풍경에도 감사하다.

 

똥 푸고 난 오후에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바위 위에 드러누워 바라보던 뱀사골과 노고단 방향의 능선 같은 것, 어느 날 문득 교무실에서 천왕봉뿐만 아니라 반야봉이 바라보이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날의 기쁨 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리산과 산내는 내게 많은 인연을 선사했다. 학교 공동체는 나 자신의 온갖 모습과 맨 낯으로 만나게 해주었고,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는 그런 나 자신을 사랑할 용기를 주었다. <지글스>에 글을 쓰면서, 함께 책을 만드는 마을 여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이렇게 못났구나’하는 자책을 멈출 힘을 얻는다. 나의 감각, 나의 느낌, 내가 경험한 인생을 믿을 힘을 얻는다. 글쓰기는 나의 구원이었다. 함께 글을 쓴 여자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는 나의 구원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에게 바침”

 

누구에게나 자신에게만 주어진 삶의 과제가 있다. 나는 그 숙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두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그 숙제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이 언니의 귀촌> 연재에 먼저 글을 쓴 산하님이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다가 마침내 못해서 비혼의 삶을 이어간다’고 하셨을 때, 이 이상 지금의 내 삶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다가, 간절히 결혼하고 싶었다가, ‘마침내’ 못해서 비혼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데, 혹시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내 숙제를 풀어나가야 할 힘이 오롯이 내 안에 있어야 함을 알겠다.
 

           ▲ 지리산에서 글쓰는 여자들, <지글스> 모임날 서로의 글을 읽으며 울고 웃으며.    © 혜선 
  

몇 년 전에 “미안합니다”라는 시(?)를 썼던 적이 있다. 에세이스트 김현진의 글을 좋아했는데, 그분의 칼럼 중에 ‘재능도 없는데 예술 하려고 해서 미안해요’라고 끝나는 글이 있었다. 거기에 마음이 울려서 혼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페이스북에 쓴 거였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고 창피한데, 작년 여름 <지글스>에 쓴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에게 바침”이라는 글에 이 시(?)를 넣게 되었다.

 

“미안합니다, 이 나이 먹도록 시집 못 가서, 미안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파악하게 해드릴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남들 시집갈 때 시집 못 가고, 남들 애 낳을 때 애 못 낳아,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일 수 없어 미안합니다.

 가난한 주제에 예술 하려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뛰어난 재능도 없어, 미안합니다.

 월세 보증금도 없으면서 해외여행 다녀와서, 미안합니다.

 멀쩡한 직장들 때려치워서, 미안합니다.

 그러고도 행복해지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찌질한 사람이어서, 미안합니다.

 서글픔에다 유머와 위트를 섞은, 아름답고 교양 있는 시를 쓰고자 했는데,

 결국 이렇게 끝맺어 미안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미안하다, 씨바.” -<미안합니다>

 

<지글스>에 글을 싣고 나서,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 일차원적인 시에 공감해주신 것에 나는 놀랐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만 주어진 삶의 과제가 있다. 그 과제를 따라 살다 보면 세상이 당연한 듯 요구하는 길을 따르지 못할 수도 있다. 세상이 나를 어여삐 여기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가 온 마음을 다해서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랬을 때 다른 사람들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 그랬을 때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표현이라고,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신 친구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그 분은 또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마음과 의지와 목숨을 다해서 노력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사랑에도 해당하는 말인 것을 알겠다.

 

<지글스> 봄호가 나온 후 있었던 모임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목이 메어 글을 읽지 못하던 나를 대신해 <지글스> 편집장님이 “미안합니다”를 읽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깨달았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는 것을. 난 내게 주어진 내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것,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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