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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성폭력을 저지를까 걱정해본 적 있어요?’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4. 피해와 가해의 가능성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남아도 성폭력 피해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한다

 

아동 성범죄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아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남아도 성폭력을 당한다. 대검찰청의 주요 범죄 별 기초통계(2014)에 따르면 13세 미만 아동 성폭력(강간 및 강제추행) 피해자 중 여아는 89.9%, 남아는 10.1%였다. 아들은 성폭력에 있어 ‘직접적 피해’를 당할 일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피해 비율로 봤을 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로 인해 아들들은 제대로 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할 때가 많다.

 

성폭력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문제이다. 아동 성범죄의 경우 그 아이들이 피해 대상이 된 것은 단지 성별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동이 가진 권력의 취약함 그 자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아이건 남자 아이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남아에게도 성폭력 피해에 대해 주의를 주고 신경을 써야 한다.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자 본격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 및 성교육을 시켜보려고 했다. 유아기 성교육보다는 좀더 나아간 정보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료를 모으다 그간의 아동 성폭력 예방에 대한 주의 사항들이 ‘여성맞춤형’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었다.

 

성폭력 예방교육은 가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아닌, 피해 당하지 않는 방법이 주 내용이다. 성범죄 피해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통계까지 뒷받침되어, 결국 이런 교육은 ‘여자애들용’이라는 느낌만 갖게 했던 것이다. 여전히 성폭력 예방을 위해 많은 부모들이 여성으로서 올바른 자세와 태도, 가치관을 가지라는 성적 통념들을 읊어대는 경향이 있다. 학교의 성폭력 예방교육도 비슷하다. 초등학생이 되면 아이들도 점점 성폭력은 ‘여자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런 교육이 아들에게 적합할 리가 없지. 남자인 아들에게 자기 일이라고 여겨지는 내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이래야 여성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꼴이니 앞뒤가 맞을 수가 없다. 또한 종국에는 ‘여자는 이런 거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까 저어하게도 됐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고 온 지인의 고학년 아들 녀석이 ‘임신하는 여자애들이나 조심해야 할 이야기’를 자기가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지 않나. 그러면서 ‘여자애들한테는 이것도 해선 안 된다 저것도 해선 안 된다, 같이 놀라는 건지 놀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한탄도 했더란다. 이러다가는 회사원이 되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고 와서는 ‘여직원과 말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할 꼴이라며 지인이 뒷목 잡던 기억이 난다.

 

가해하지 말라 vs 피해 당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성폭력을 마치 성별 문제인 것처럼 여긴다. 여자들 이야기, 여자들 사안, 그래서 ‘여성 문제’. 성폭력을 예방하자면서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은 잘해야 생물학 혹은 임신대백과, 못하면 꼰대스런 생활 준칙이다. 이유는 항시 ‘피해’ 측면만 강조되는 데 있다.

 

“~하지 마라. ~하면 큰일난다.”

 

아이들은 이런 말들을 기억한다. 이런 구문은 옳은 일과 그른 일의 기준과 그 한계를 명시한다. 더불어 죄책감도 가르친다. 다만 그런 말들 속에서도 서로 명백히 다른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가해’하지 말라는 게 요점이고 하나는 ‘피해’당하면 안 된다는 내용을 품는다. 그래서 하나는 잘못된 행동의 기준을 배우게 하지만, 다른 하나는 자책하게 만드는 기준을 배우게 한다.

 

1) “물건 던지지 마라, 친구 때리지 마라, 욕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2) “거기 이상한 아저씨 나타나니까 가지 마라, 그런 옷은 입지 마라. 네 몸 만지지 못하게 해라.”

아들과 딸, 누가 어떤 말을 더 많이 듣게 될지는 뻔하다.

 

최근 유행하는 육아서에서는 “~하지 마라”식의 부정적인 표현 대신 “던지지 말고 말로 하자, 친구를 좀 배려해줄래, 예쁜 말로 다시 해볼까.” 이렇게 긍정적인 표현과 청유형으로 부드럽게 아이들을 대하란다. 아들엄마들이 참을 인(忍)자 백 번씩 손바닥에 그려가면서 그렇게 바꿔 말해도 요점은 아이들의 행위에 제한을 두고자 함이고, 잘잘못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두 번째 방식의 말들은 그런 변형도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청유형으로 바꾸면 더 난감하고, 부드럽게 말하면 시대착오적이라 웃기기까지 하다. “큰 길로 낮에만 다니자, 누가 널 쳐다보거나 만질 수 있으니 긴 치마나 바지만 입도록 하자.”

 

내 아들을 뭘로 보고!?

 

정말 웃긴 일은 2013년 일어난 아동 성폭력 범죄 총 1천51건의 가해자 99%가 남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성폭력이 여자들 문제라고? 거의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 거의 대부분의 가해자는 남성. 황당하게도 이것처럼 성별이 ‘균등’하게 이루어진 일을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최소한 피해-가해 양 측면만 동일하게 사고해도 여자들 문제라는 말 따위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피해를 줄이는 일은 무엇보다 가해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일에 있다. 모든 도덕적 가르침은 가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때리지 마. 욕하지 마. 폭력은 안돼. 차별하지 마!

 

하지만 성폭력 문제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드물다. 특히 ‘아들’에게 성폭력의 가해 가능성에 대해 주의를 주는 부모는 흔치 않다. 기껏해야 요새는 애들도 시시해서 하지 않는 ‘아이스께끼 같은 것 해서 여자애들 놀리면 성희롱이야’ 라고 주의 주는 수준일 뿐이다. 아들들은 간과된 피해 가능성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도 놓친 가해 가능성의 대상자이기도 하단 말이다.

 

주변 아는 아들엄마들에게 물어봐도 좋다. “아들이 혹시 성폭력을 저지를까 불안하거나 걱정해본 적 있어요?” 물론 친밀함의 정도나 아들의 나이에 따라 수위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이 휘둥그래 눈을 뜨고 ‘내 아들을 뭘로 보고 이딴 질문을 하냐’ 할 것이다.

 

친구에게 조심스레 비슷한 말을 던진 적이 있다. “얘, 미쳤나 봐. 네 아들이나 내 아들이나 잘 크고 있어. 그런 애들 절대 아냐! 어린 애들한테 뭔 소리야.” 친한 친구라서 나는 도리어 위로를 받았다. 내 아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올바르게 크고 있는지 말이다.

 

누가 모르나. 내 아들 착해! 나도 알아. 근데 그게 뭐? 더 착해지라고, 때리지 말라고 혼내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잖아. 왜 달라?

 

일찍, 많이 가르칠수록 좋은 일 아닌가

 

▲  정은의 빨강그림판 <touch me NOT>    © 일다 
 

2013년 발생한 성폭력 범죄 중 소년범(18세 미만)은 7.6%였는데, 대부분 호기심(29.2%), 우발적 동기(28.9%)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다. 소년범들은 학교 동창(52.9%), 동네 친구(32.4%) 등 일괄해 ‘친구’들과 공범인 경우가 많다. 이런 소년 성폭력범들 중 아동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경우는 21.4%나 된다.

 

통계를 참고 삼아 추론해보자면 중고등학교 남학생들 무리가 자신들보다 약자인 주변의 어린 여동생을 대상으로 성적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사실 여성들은 이것이야말로 시나리오라기보다 진짜 현실임을 직감한다. 위 통계는 심각한 수위의 성범죄, 이미 유죄 확정된 경우를 대상으로 하지만, 보다 낮은 수위의 다양한 성적 가해들이 이런 식의 패턴 안에서 숱하게 벌어진다.

 

그런데도 엄마가 되면 특히 아들엄마가 되면, 내 아들만은 이 시나리오 속에 넣지 않게 된다. 그런 시나리오 속에 들어갈 아들들은 애초에 따로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 아들은 ‘주’가해자가 아니라 친구들 때문에 휘말린 것이라고 한정한다. 성폭력의 가해자는 남자이지만 내 아들은 절대 성폭력의 ‘가해자’일 수 없다는 생각은 굉장히 팽배하다.

 

아들은 직접적 피해가 없기에 성폭력 문제에 관심이 덜하다는 말. 이 말은 실은 아들의 가해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아들엄마가 막다른 길에서 하는 표현에 불과해 보인다.

 

이런 생각들을 만들고, 전파하고, 확대시키는 주범은 물론 언론이다. 변태적인, 괴물로 태어난 성범죄자라는 식의 왜곡되고 호도된 이미지를 만드는 언론, 아주 악질이다. 그런 가해자 이미지에 자신이 낳고, 기르고, 사랑하는 아들을 대입하고 싶은 부모는 없다. 나도 싫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렇지만 덕분에 우린 언론 탓만 하면서 어른 노릇, 부모 노릇 거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애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충고할 때, 애를 사기꾼 될 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될까 저어하던 적이 있었던가? 애가 흉악범이나 살인마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친구 때리지 말라고 혼을 냈다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던가?

 

아들의 성적 행동에 대해 미리 주의를 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고, 어렵고, 심각한 일인가. 그냥 거짓말처럼, 친구를 때리는 일처럼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위험한 행동을 할 때마다, 어리면 어릴수록 일찍, 많이 가르치면 좋은 일이잖아.

 

성폭력 예방교육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삶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 가해의 기준과 맥락을 가르치고 그런 행동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게 하는데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아들의 성폭력 가해 가능성에 대해 힘을 쭉 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경직된 생각을 쫙 풀고, 가볍게, 포괄적으로.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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