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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남자아들, 나는 여자엄마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학교로 간 아들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아들의 입학과 나의 불안

 

걱정과 불안이 하루를 지배하던 때였다. 거짓이나 과장 없이 딱 그런 시기였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한두 달 전부터 1학년 1학기 내내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린 기분이었다. 핸드폰에 학교 전화번호나 다른 아이 엄마 번호만 떠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름 배포도 있고 깡다구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성격이나 가치관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던 주제와 이야기들에 휩쓸리고 부딪히기 일쑤였다. 수시로 상처를 입고 작은 상처에도 커다란 부상을 입은 듯이 엄살을 떨었다.

 

아들 녀석이 사건사고 많이 치고 다니는 녀석이냐고요? 우선은 그럭저럭이라고 해두지요. ‘딱 수컷이구만.’ 하는 농도 듣고 그만큼 사고도 치지만, 열 번의 기우제 끝에 비 한번 내리듯이 ‘아우, 댁의 아들이면 걱정 없지요.’ 하는 말도 듣는 걸 보면 막 나가는 녀석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내 맘의 롤러코스터는 아들내미가 사건 사고치는 것과는 실상 무관했다. 그러니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는 근 6개월 혹은 8개월 정도의 시간을 평온이라는 단어와 멀리 살았었다.

 

반면 아이는 정말 평온했다. 이건 다소간의 거짓과 포장이 조금 더해졌다. 딱 내가 이 녀석에게 느낀 배신감의 크기만큼. 이 녀석도 생애 처음 거친 풍랑을 맞이하여 어지간히 좌충우돌하긴 했다. 그러나 나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파도를 그럴듯하게 타는데, 기특함과 배신감이 범벅이 되어 자랑스러움과 억울함을 함께 삼켜야 했던 시간이 참 많았다.

 

‘엄마, 바다엔 원래 파도가 있어. 그것도 몰라? 어른 맞아?’ 하는 맹랑한 눈빛과 말과 행동들. 때론 무덤덤하게, 때론 다소 거칠게, 때론 슬쩍 비껴도 가면서 노련하게 풍랑을 헤쳐 나가던 녀석. 그런 녀석을 바라보면서 덕분에 나도 안정을 찾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우린 폭풍의 2013년 봄과 여름을 보냈다.

 

단지 생물학적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 아이가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 단체성교육을 받으며 찍은 사진.  © 김서화 
 

대체 초등 입학이 뭐라고 이런 오버스러운 삶을 살았노라 고백하느냐고? 그러게요. 대체 초등학교 입학이 뭐길래. 정말이지 이 질문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이 물었는지 모르겠다. 답은, 없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종종 사람들은 쉽게 부모에서 학부모가 되어서, 즉 ‘공부’라는 것을 시켜야 하니 고민이 큰 줄 안다. 그런 단언적 판단에 기대어 간편하게 많은 엄마들을 극성엄마 취급한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입학시켜보니 학업은 정말이지 부차적이고도 부차적인 문제였다. 대부분 엄마들의 진짜 걱정이란 폭넓게 말해 아이의 ‘인간관계’, 아이의 ‘사회생활’이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니, 이건 너무 거창하니까 아이를 양육하다 보면 아이의 상황과 주 양육자의 상황에 따라 ‘가장 험난한 시기’가 한두 번씩 도래한다. 나의 경우 그저 첫 번째 험난기가 그때였나 보다, 하고 이제는 좀 덤덤히 말할 수 있다. 적당히 안정을 찾아가면서, 그래서 조금씩 나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되면서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했던 걸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짜증나게도 답의 대부분은 이 녀석이 아들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더 사실적 표현을 하자면 ‘내 아들’이라는 녀석이, 직립했으나 아직은 인간이라 칭하기 힘든 수컷동물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이런!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지금은 둘째 덕분에 충실한(?) 주부로 살고 있다지만, 나는 나름 사회학을 공부했고, 페미니즘 세미나를 제일 좋아했고, 무릇 섹스 혹은 젠더와 같은 단어들을 둘러싼 복잡한 철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과학적, 의학적 논의들을 읽고 고민해왔다. 그런데 그냥 이 녀석이 오로지 생물학적 ‘남자’라는 이유로 내 인생이 이토록 꼬인다고 단박에 말해버리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내가 진짜 무식해진 거야, 이 자식이 정말 단순하게 사는 거야?

 

이런 주장은 여러 이유로 거부감을 유발할 수 있다. 솔직히 쓰고 있는 나 스스로가 납득하기 힘든 얘기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런 날 것 같은 표현으로밖에 당시의 기분을 전달할 수 없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학교 적응 기간 동안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례들은 죄다 ‘성차’와 연관된 사건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토록 생물학적, 본질적 성차를 맹신하게 되었던 적이 없던 것 같다. 나 정말 이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는가 싶은 불안이 들었다. 그게 내 불안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남아, 여아 두 패거리 사이의 평행선

 

초여름이 오는가 싶은 날이었다. 제법 뜨거워진 볕을 받으며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가 노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해본 사람만이 아는 정말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제발 집에 좀 가자. 몸도 만삭인데(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안될 말이지만 차라리 니들 한 판 싸우지 그러냐 싶은 심정이 들 때.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어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싸운다. 미안하다. 내가 몹쓸 상상을 했구나. 그런데 요 녀석들 주변으로 여자, 남자 떼를 지어 모이며 거의 패싸움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엄마들도 한둘 모인다. 너네 왜 그래, 싸우지마. 말로 해. 야, 너네 떨어져. 등등.

 

사건을 요약하자면, 그날 수업 시간부터 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싸웠다. 여자아이는 글씨도 잘 못 쓰는 데다 다소 둔한 덩치 큰 남자아이를 계속 ‘너 바보냐~ 어떻게 이것도 못하냐’ 핀잔을 주었고, 남자아이는 욱하는 대로 여자아이를 큰 주먹으로 퍽퍽 쳤다. 물론, 퍽퍽 친 남자아이는 담임에게 혼쭐이 났다. 싸움의 여파는 하교 후 운동장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자주 그랬다더라. 나의 관전 포인트는 그 둘의 싸움에 대한 주변 아이들의 평가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정확하게. “OO이가 제일 커. 힘도 제일 센 거 너 몰라?” 그러니까 힘센 놈한테 함부로 덤빈 네가 바보라는 요지. 그럼 여자아이 무리는 남자아이들 모두야 말로 바보 중의 상바보 라는 식으로 바라보며 “그게 뭐? 우리 다 1학년이거든.” 한다. 같은 학년 같은 반 ‘평등’한 우리인데 뭔 헛소리냐는 요지. 덧붙여 “그렇다고 때려?” 한다. 어떻게 글 쓰고 말하는 인간이, ‘평등’한 우리끼리 때리냐는 거다. 폭력적이게 말이다. 남자아이들은 “억울하면 너도 때려. 못 때리지? 거봐, OO이가 제일 세다니까.” 하며 두 패거리 사이의 무한 반복이 시작된다.

 

우와, 대단히 징후적이었다. 남녀가 무릇 이렇게 세상을 다르게 살아간단 말인가. 이걸 인정을 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OO이는 정말 제일 힘이 세고 덩치도 가장 크다. 거짓말 조금 보태 나만 했다. 그러나 모두 평등하고 우리 이제 말로 하고 말로 이해해야 하는 ‘학생’이 되었잖니.

 

‘내 아이가 남자구나’ 하는 경험

 

아들도 열심히 ‘남자 편’에서 ‘여자 편’을 힐난하며 덩치 큰 녀석들 뒤에서 ‘힘’에 굴종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쫑알대고 있었다. 집에서만 보던 아들은 아이들 무리 속에서 만나면 내 아들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집에서는 제법 엄마아빠와 대화로 일을 풀고, 활달하더라도 폭력적이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 속에서는 훨씬 더 위계에 순종적이고, 무리 속에 있기 위해 목숨 걸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적으로 보일만한 행동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일들은 자주 있었다. 아이의 학교생활과 함께 내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보였던 것 같다. 아들 키우는 엄마들은 ‘내 아이가 남자구나’ 하는 이런 경험을 조금 이르면 유치원 때, 늦으면 초등학교 고학년 전에는 겪는 듯하다. 여자 셋이 모이면 어떻다는 속담 마냥 남자 셋이 모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되는 첫 순간은 늘 오기 마련이라는 거다. 혼란은, 난 그런 남자아들의 행태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또 이해해야만 하는 여자엄마라는 거다. 오 마이 갓!

 

나는 점점 성차에 기대어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했다. 솔직히 여러모로 편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행동과 말투, 생활태도 등을 ‘이놈이 아들이라 그래’, 혹은 ‘사내녀석들이란 별 수 없구만’, ‘머스마라 그러니 이해해.’ 라고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나와 다른 부분, 생각의 충돌이나 갈등은 너와 내가 성별이 달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마무리 지었다. 넌 남자아들이고 난 여자엄마니까!

 

처음 마주한 학부모-엄마라는 역할, 확실히 복잡해진 아이의 본격적인 사회생활, 나에게 떨어지는 의무와 책임감, 추가로 뿌려지는 죄책감 등등 내 맘 속에는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 뭐든 빨리빨리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게 기댈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 최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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