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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좋은 사람’이란 누구일까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⑪ 인품에 대하여 

 

 

※ 10여년 전, 한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북한이주여성 효주 씨가 북한의 서민문화와 남한에서 겪은 경험을 전하는 <북과 남을 가로지르다> 칼럼이 연재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릴 적 꿈속에 등장한 ‘김정일 지도자 선생님’

 

북한에서 존경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문득,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북한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을 꼽자면, 자동적으로 김일성 3부자가 떠오른다. 지금은 김정은만 생존해있지만, 아직도 북한 주민들은 ‘김부자 바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학창시절 배우는 <공산주의 도덕> 과목에는 웃어른을 존경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형제와 친구들과 화목하고 서로 친근하게 지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 또 그 부모가 존경해야 하는 분들이 있으니, 바로 조상님이 아니라 김일성 일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김일성 일가를 따르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도덕 시간에 배운 ‘어른을 존경하라’는 내용은 곧 김일성 일가를 존경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나는 학창시절에 가끔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선생님(당시 호칭)과 결혼하는 꿈을 꾸었다. 얼마나 흠모하고 존경해왔으면 꿈속에서 결혼을 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워 펑펑 울었겠는가. 깨어보면 허황된 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설레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그런 꿈 이야기라도 함부로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어서, 혼자 무슨 큰 비밀을 간직한 사람마냥 소중하게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좀 창피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이야기하기에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만, 아마 북한에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나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도, 동생도, 부모뻘 되는 연배도 ‘동무’

 

북한에서는 이렇게 김일성 3부자를 위에 두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동무’와 ‘동지’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물론 사석에서는 그냥 아무개야, 이름을 부르거나 오빠, 동생, 친구로 통하지만 공공장소에선 무조건 동무, 동지로 부르게 되어있다. 공식적으론 친구들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다 ‘동무’로 통하고, 평상시엔 아저씨나 아바이 호칭을 붙여 부른다.

 

인민학교 때부터 선생님은 서로 ‘동무’를 붙여 부르도록 하였고, 학교에서 허물없이 아무개야, 라고 이름 부르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그런 호칭을 들은 사람이 칠판에 이름을 적도록 하였다. 그렇게 적발이 되면 하교 때 선생님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오는 일도 많았다.

 

간부급, 당비서나 작업반장들에게는 ‘동지’ 호칭을 붙여 부른다. 동무보다 조금 격이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이 동지라는 말도 총회 장소에선 동무로 바뀔 때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주간 생활총화에서는 비록 당비서나 작업반장일지라도, 또 기업소 간부일지라도 호상비판이나 사상투쟁을 할 땐 ‘동무’라고 부르며 호된 비판을 할 수 있다.

 

                                          ▲  수해 복구를 하는 북한 주민들.    © 손그림- 효주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아무개 선배’ 하거나 ‘내 후배야~’ 하는 말을 듣고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는 선후배 간에 선이 그어져 있고, 후배가 선배를 깍듯하게 대하고 선배는 후배를 챙겨준다. 지금은 나도 이런 호칭이 익숙해져서 ‘동무, 동지’ 하는 딱딱한 말보다는 구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 철저한 규율과 조직 체계가 몸에 밴 나로서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은 어수선하고 정리정돈이 안 되어 있고 사람들이 동분서주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면서, 남한사람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름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고,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하면서 타인과 소통해나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사람들이 ‘절제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북한에서 살 때가 ‘꼭두각시 같은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나라에서 사람의 인격까지 메마르게 한다’

 

북한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은 진실하고 겸손하며 책임감과 배려심을 갖춘 사람일 것이라고 본다. 북한말로 ‘도덕적으로 갖춰진 사람’이다. 집안 성분이 좋고 많이 배우고 잘생기고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북에서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을 때까지는,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서로가 돕고 이끌며 화목하게 살아왔다고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식량을 보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충성심이 밥 먹여주냐’고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라에서 사람의 인격까지 메마르게 한다’는 말도 돌았다. 

 

                            ▲  어려움 속에서 해맑게 장난 치는 아이들.    © 손그림- 효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세상이 사람들의 성향을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고 생각한다.

 

북한사람들은 수령이 없으면 조국도 없고 이 세상은 살아갈 수도 없는 암흑천지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김일성의 부고를 듣는 순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수령이 죽을 수도 있는 건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한숨을 내쉬면 외할머니가 그때마다 ‘누가 죽었냐? 한숨 소리에 땅이 다 꺼지겠다’ 나무라곤 하셨는데, 그게 이런 뜻이었나 보다 싶었다.

 

가뜩이나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는데, 김일성 사망 후 배급마저 끊기고,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공장에 기계가 서고, 직장에 일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기차역전과 장마당에는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집 없이 떠도는 북한 아이들을 칭하는 은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기와 도둑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옛말에 ‘먹을 것이 흔해야 집안이 흥하다’라는 말이 있듯, 밑천도 없이 배급만 바라보고 살던 북한사람들이 대책도 없이 식량난을 맞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도와주고 하는 이야기는 무색해지고 막막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특별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야 한다며 김일성 3부자를 찬양하는 노래와 구호들을 내놓았다. 먹어야 일을 하고, 먹어야 수령을 따르지 않겠는가.

 

지금도 당 간부들은 살이 찌고 배가 나오고 얼굴에는 기름기가 번지르르한데 주민들은 피골이 상접해 한끼 식량을 구하려고 백리 길도 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 아무리 TV에서 김정은이 환한 미소를 띄우며 절룩거리는 다리로 각 지방과 군부대를 현지지도 한다고 선전을 해도, 안팎으로 변해가는 민심을 바로잡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주민들의 민심을 얻으려면 먼저 간부들부터 국민과 고락을 함께하며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주민들을 좋아해주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워낙 순수한 사람들이라, 조금만 숨통을 틔워주고 고충을 헤아려준다면 당을 따르고 받들 텐데…. 나도 아는 것을 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혹은 외면하는 것일까.

 

좋은 사람이란, 어려울 때 알 수 있는 법

 

풍요롭지는 않았어도 서로 돕고 살아가던 시절에는 돈이나 직업, 학력보다도 사람의 성품과 도덕성, 예의를 더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식량난을 겪으면서부터는 무엇보다 돈이 우선이고, 줄이 어느 쪽인지 따져가며 사람을 상대하고 인연을 맺는 사회가 되어갔다. 모두 잘 먹고 잘사는 공평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남한보다 더한 자본주의 사회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식량난을 겪으면서 비로소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진짜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참말이라는 것을. 건강하고 여건이 좋을 때는 좋은 친구인 것마냥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정작 내가 병이 나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거들떠도 안보는 것이었다. 인생이 서글퍼졌다. 하긴 다른 사람 굶을까 봐 도와주면 내가 죽을 판인데, 누굴 돕고 말고 하겠는가.

 

▲  국경을 넘다 죽은 사람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 질때가 많다.  © 효주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무정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무섭게 퍼져나가는 전염병, 결핵 등으로 죽어나갈 때, 아픈 나에게 다가와 말 한마디라도 ‘꼭 살아라’, ‘죽지 말고 버텨라’ 하며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굶주림 속에서 견뎌내고 두만강에 떠밀려 가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런 말 한마디의 기적 같은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진정으로 존경할만한 인물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가장 힘들었던 1990년대 후반기 아파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던 나에게 다가왔던 한 젊은 여자분이 떠오른다. 생면부지의 그 여자분은 내게 북한돈 2백원을 주면서 ‘이 돈으로 먹을 것 좀 사서 먹고 기운 차려 꼭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남편을 잃고 직장에 다니며 두 아이와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에 도움을 준 배급소 소장님도 나에겐 고맙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당시에 배급소에 어쩌다 쌀이 들어와도, 직장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식량을 타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배급소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소장님은 쌀이 들어왔을 때 남겨놓았다가 우리 집에 직접 가져다 주셨다.

 

아마 이분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남모르게 좋은 일을 많이 해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으로 탈출을 시도할 당시, 나와 일행을 데리고 가던 할머니가 ‘꼭 살아야 한다’면서 양강도 대홍단의 어느 진펄에서 개구리 알을 비닐봉지에 담아와서 내밀며 ‘이거라고 약으로 생각하고 꼭 먹어야지, 안 그러면 죽는다’고 하여 먹었던 기억도 난다. 이분은 우리를 중국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그것은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엄중한 범죄이지만, 그분이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고마운 한국사람들을 만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다.

 

나는 죽음으로의 기로에서 내 삶을 건져준 사람들에 대해 늘 생각하고, 고마움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 효주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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