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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집단체조를 보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집단체조, 일명 매스게임. 수만 명이 동원되는 이 집단체조에서 개개인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된다. 개인을 죽이고 하나의 큰 전체를 추구하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당연히 그 덩어리는 한 개인이 마주하기에 너무나 거대하다. 따라서 “많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들이 선택했던 장엄미 혹은 숭고미의 과시”는 북한의 집단체조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규모나 완성도가 현격한 차이로 떨어지더라도, 나 역시 학창시절에 그런 전체를 추구하는 집단의 움직임을 미약한 수준이나마 분명 겪었다. 그건 주로 운동회라는 이름으로 치러졌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연습했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기특한 장관이었을 테고, 동료들과의 하나됨을 즐기는 또래들도 있었겠지만, 어릴 때부터 매사에 불만이 많았던 나에게는 그런 고난이 없었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 투덜투덜.

대니얼 고든의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

<어떤 나라>의 두 주인공 현순과 송연은 적어도 그런 애매한 목적의식 없이 그 힘든 집단체조에 참가해서 다행인 걸까? 열세 살의 현순은 말한다.

“장군님 앞에 나서기 전에는 아, 정말 얼마나 가슴도 떨리고 심장도 떨리는지…. 그때는 정말 온몸이 너무 떨려서 온몸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혼났댔습니다. 그러나 정작 장군님 앞에 나서서 동작을 한다고 생각하니, 장군님이 날보고 울지 말고 잘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아 저절로 마음이 기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에 집단체조가 너무 힘들어 도망친 적이 있던 현순이지만 곧 스스로가 ‘자유주의를 버리고’ 하나가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레이터는 뒤이어 말한다. 집단체조는 이들의 인생이고, 김정일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고.

집단공연이 낯설지 않은 나도 북한의 ‘작품’을 보면 전율을 느끼는데, 하물며 서구권 영화감독의 눈에 보인 북한은 어떻겠는가. 비록 북한이 끊임없이 ‘핵, 주체사상, 독재정권, 악의 축, 집단체조, 식량난’의 키워드로만 읽히는 것에 찬성하지 않지만, 이 장대한 스펙터클에 연출자가 충격을 받고 시선이 단단히 붙잡혔으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어떤 나라>를 만들었음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집단체조의 중요성이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북한은 강고한 사상 체계를 확립해 인민들에게 주입해왔으며, 그 속에서 탄생한 집단체조의 중요성이 무척이나 크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연 참가자에게는 강한 집단의식이 요구되며, 보는 사람은 집단의식의 가치와 지도자에 대한 경외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집단체조에서는 한 사람의 작은 실수라도 전체 공연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집단에 헌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주의적 행위를 집중 조망하는데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건 아닌지, 서구인의 눈에 보이는 ‘신기한 나라 북한’을 피상적으로 그려낼 뿐인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니얼 고든 감독이 집중한 것은 21세기 초 평양에서 살아가는 두 평범한 소녀의 삶이다. 섣불리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주의하되, 내레이터의 개입은 용인한 다큐멘터리. 즉 설명적 양식과 다이렉트 시네마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

집단체조라는 극단의 전체주의적 행위를 그리면서도 그 수만 명의 구성원 중 두 명의 삶 속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아우르고자 한 감독의 노력이 엿보인다.

이밖에도 <어떤 나라>는 미국의 적대국가로서만 서구에 알려진 북한을 비교적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해본 다큐멘터리로서 의미가 있다. 영화는 북한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인 정치적 판단을 유보한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등장인물들의 인터뷰와 북한의 풍경, 선입관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노력으로서 과도하지 않은 지식이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외적으로 생각을 하게 이끌어낼 뿐이다.

현순과 가족의 인터뷰에서 북한 주민들의 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읽어낼 수 있고, 김정일의 생일이 가장 큰 명절이라는 것과 평양이 ‘보여지는’(showcase) 도시로서 그곳에 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상 고든 감독이 본 모습은 북한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평양의 모습이라고 한정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먼 나라인 북한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가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의 주된 이야기인 집단체조로 돌아가 보자. 인터뷰와 두 소녀의 일상생활 사이사이에 삽입된 매스게임 쇼트들은, 붙들린 서구의 놀라운 시선을 그대로 나타내듯 빈번히 오래 나타나고 있다. (만일 이 영화의 유일한 선정성이라면 집단체조와 행사라는 소재 그 자체일 것이다.) 현란한 장면을 효과적으로 담으려는 듯 원거리 촬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리듬의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각 쇼트의 길이는 짧은 편이다.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고 난이도의 동작들을 해내는 수만 명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꿈틀거리는 일종의 거대한 동물체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 감독은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며 이들이 개개인으로 구성된 것임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짓고 집단체조를 하는 아이들과 박수 치며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집단체조 훈련은 어린 학생들이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한 김정일의 말대로, 그 거대함을 통해 결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보여주기’를 그대로 담담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인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써 지킨 중립성이 큰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아무리 그 영화가 정치적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도, 보는 이의 정체성은 복잡다단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어떤 나라>가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책임감, 현순과 송연의 삶도 진실이지만 그 외의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자의 답답함 때문이다.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북한은 멀게만 느껴지는 ‘어떤 나라’라는 것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노조수연 
 
[2008 북한 소식] 북한주민을 위한 촛불은 누가 들어줄까 / 식량난 속 경제주체가 된 북한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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