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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에 열을 올리는 어른들을 보며 
 
남미 화가 보테로(Botero) 전시회가 끝나가고 있던 터라 짬을 내 지난 주 일요일에는 전시회에 다녀왔다. 방학이 끝났는데도 일요일이어서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평일이었다면 좀더 쾌적한 상황에서 그림을 관람할 수 있었겠지만, 통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전시 끝 무렵이라 그런지 관람이 힘들 정도로 사람이 붐비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서너 살 가량의 어린 꼬마를 안고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그림보다도 전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보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어린아이가 뭘 알까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고흐의 밤 풍경이 그려진 우산을 쓰고 나간 적이 있었다. 나를 보고 대여섯 살 아이가 손가락으로 우산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키며 “별이 빛나는 밤이다!” 외친 걸 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문화적 자극을 받고 자라는 것이 나쁘지 않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우리 어렸을 적보다는 정말 똑똑하고 아는 것이 참 많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를 안고 있던 여성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말한다.
“춤추는 사람, 댄서, 댄서, 댄서, 음악가, 뮤지션, 뮤지션, 음악가, 뮤지션....”
 
아이가 듣거나 말거나 그녀는 작품 옆에 붙어있는 제목을 한국어와 영어로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벽에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글이 나타나자 영어로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열심히 시키는 부모들이 많다는 말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말로만 듣던 일을 직접 보니 좀 어안이 벙벙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자극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정도는 척척 알아보는 아이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동 발달 장애’ 치료실을 운영하는 한 선배를 통해, 어렸을 때 너무 과도하게 영어교육을 받은 아이들 중에는 영어는커녕, 한국말도 잘 못하게 되어 언어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긍심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특별히 애국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고유언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여러 차례 경험했다.
 
외국인 친구들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자주 묻는 질문은 “너희는 어느 말을 쓰니?”였다. “한국말!”라고 대답하면, 거의 대부분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한국말? 한국말이 있어?”라고 되묻곤 했다. “그럼! 언어는 물론, 문자도 있어!”라고 대답하면 다들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날 프랑스 식민지를 겪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은 옛날에 그들 고유의 언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두 프랑스어를 공식어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 사람들만큼 불어를 잘한다. 나는 이 젊은이들 중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면화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마치 자기가 프랑스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해서든 공부가 끝나면 프랑스에 정착하고 싶어 하고, 프랑스 국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입 받아온 사람들에게 모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나는 그런 아프리카 친구들처럼 불어를 잘 하지 못했지만, 한번도 그것이 창피하지 않았고, 불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해 비웃음을 받아본 적도 없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해야 하는 건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 때이고, 자기 나라 말과 글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날 본 화가 보테로만 해도 그림 속에 남미의 정신과 문화를 담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부모가 많았으면 좋겠다.  ▣ 정인진 <좋은 부모는 아이와 함께 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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