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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성폭력의 경험, 내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10. 24. 07:0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내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꽃을 던지고 싶다> 20. 빛나는 자아의 목소리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우린 모두 여섯,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  차마 열어보지도 못했던 어릴 적 일기장은 온통 상실에 관해 쏟아내고 있다.   © 너울 
 
책장을 정리하며 버릴 책을 정리하던 중 꽃무늬 화사한 표지의 일기장이 한 권 툭 하고 떨어졌다. 차마 열어보지도 못했던 어릴 적 일기장을 무슨 보물처럼 이사 다닐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띄엄띄엄 기록된 것들이 채 한 권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온통 상실에 관해 쏟아내고 있다.
 
차마 읽어보지 못했던 기록들을 따라 가면서 내 안의 깊은 우울을 들여다 본다. 화사한 표지와는 달리 ‘죽음에 관한 기록’이라는 제목이 달린 일기장. 나는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 기록들은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온전한 형태를 갖지 못한 일기장을 보며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89년 7월 어느 우울한 날
‘평화의 시대는 끝이 났다. 나는 불안의 시대로 걸어 들어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나는 나를 잃었고, 혼돈만이 남겨져 있다. 내가 사유하는 모든 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나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임을 나는 증명해야만 한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은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어버린 그런 존재 말이다.’
 
1989년 9월 어느 비 오는 날
‘기도.. 나의 기도는 끝이 없다.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길.
어제는 니체에 관한 책을 읽었다.
 
<신은 죽었다>
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 신 따위가 존재한다면 나에게 이런 불행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신이라면 자신의 피조물을 이따위로 버려두면 안 되는 것이니깐. 그래, 당신의 존재를 믿게 하려면 나의 기도에 응답해줘 그럼 당신을 믿지. 나에게 내일이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게.’
 
1990년 봄
‘나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인가?’
 
1990년 봄의 끝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라고 끝난 일기장.
내가 느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상실했다고 여긴 것일까? 내가 찾고자 했던 나는 무엇일까?
 
성폭력의 피해는 무언가를 상실했다고 여겨지게 한다. 누군가는 자신감을, 누군가는 신뢰를, 누군가는 믿음을 상실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나 자신을 상실했다고 여겼다. 나의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줄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하기에 ‘나는 누구일까?’ ‘지금의 내가 성폭력 피해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나인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특히 내 자신이 싫어질 때 ‘이건 내가 아니야. 다 피해 때문이야.’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의 삶은 그 상실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는 여행과 같았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내 안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그런 여행.
 
‘빛나는 별이 쏟아지고 인적이 드문, 바람소리만 나를 스치는 그런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러 갈 거야.’
 
그런 바다를 꿈꾸고 막상 도착한 곳 그 어디서도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나의 여정은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나는 파괴적으로 되어갔다. 나는 나의 본질이 아니므로 상처를 내어도 혹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일부러 힘든 상황들을 만들어 가며 ‘네가 이래도 살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니라 여겼으므로..
 
시간이 흐르고 일기장 속의 어린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것도 너라고’. 그 말에 원망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 당시에는 나는 그게 최선이었으므로, 비록 나를 부정하고 학대하고 위험하게 했지만 살아내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알기에.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폭력 피해로 내가 상실한 것은 나의 본질이 아니었다. 내 안에는 빛나는 여러 자아들이 있고, 성폭력 피해는 그 자아 중 일부에 생채기를 낸 것뿐이다. 상처받은 자아에 가려있던 빛나는 나의 자아들이 이제야 나에게 손을 내민다. 자신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고 내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돌봐주지 않고 방치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 뒤에서, 오랜 여행을 마친 지친 순례자의 모습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함을 깨닫는다. 오래 전에 써두었던 고통이 이제야 그 빛을 반짝인다.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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