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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방울들이 마침내 바위를 뚫으리니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22. 수적천석(水滴穿石) 

 
※ 시골마을 예술텃밭 스물두 번째 이야기는 지난 7월 한 달간 화천에서 열린 <텃밭예술축제>의 마지막 주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수적천석(水滴穿石):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마침내 바위를 뚫으리니.
 
텃밭예술축제 세 번째 주간의 제목은 수적천석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진행되었던 프로그램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야기해 보려한다.
 
인도 전통연희 ‘모히니야땀’과 ‘오딴 뚤랄’에 빠져들다 

▲ 오탄 뚤랄 공연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인도의 배우 슈레쉬     © 뛰다 
 
첫 번째 프로그램은 인도의 전통연희 ‘모히니야땀’과 ‘오딴 뚤랄’ 수업이다. 이 수업을 위해 지난해부터 뛰다와 이런저런 교류를 이어가고 있는 인도의 극단, 아디샥티(Adishakti)에서 두 명의 배우가 찾아왔다. 이 두 명의 배우들은 인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통연희학교 칼라만달람(Kalamandalam)을 졸업한 뒤 극단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전통연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현대적 맥락에서 해석해내는 작업을 오랜 시간 해 온 극단 아디샥티의 배우들은 전통연희의 전문가이면서도 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맥락의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축제 일정상 3일 간의 짧은 워크숍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뛰다의 배우들과 공개 모집한 외부참여자들은 인도 전통연희의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리드미컬하고 정교한 표현에 푹 빠져들었다. 이틀째 수업을 마치던 날에는 인도로 유학을 가겠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전통 속에 담긴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전통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로든 여전히 우리 가슴을 뛰게 할 때에만 유효한 것이랄까.
 
하지만, 텃밭을 방문한 인도의 두 배우가 자국의 전통연희를 통해 한국의 배우들을 감동시키고 전통의 힘을 느끼게 만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사라져가는 자국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자국의 전통문화를 들여다보고 이를 복원했던 사람들, 카스트 제도 안에 갇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여러 형식들을 대중들에게로 가져오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 전통문화를 지금 여기와 만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그리고 부럽게도 아직 전통문화와 가치를 비교적 온전하게 간직한 채 살고 있는 인도의 시골사람들 등등.
 
수적천석(水滴穿石).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은 긴 시간 속에서 한 방울의 물방울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의 노력이 모여 시간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뚫고 인도에서 한국까지 흘러와 시골마을 예술텃밭에서 그 꽃을 피운 게 아닐까.
 
거장의 질문, “당신은 한국인이라 말하기에 충분한가?”
 
예술가들과 함께 세상에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예술가들이 그들의 세계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온갖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때로 현실감각고 없고 자기중심적인 예술가들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온 힘을 기울여 만들어 낸 아름답지 않은 결과물에 좌절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경험들이 이들을 예술텃밭에 모여 앉게 만들었다. 이름하여 ‘프로듀서 캠프’!
 
예술텃밭에서 2박 3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고충을 나누며 해결책을 모색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이들은 ‘거장’이라고 불러 마땅한 대선배님을 모시고 말씀을 청해 듣는 특강을 기획했다. 공간사랑 극장장(1977–1987), 1998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주간 예술감독, 다움아카데미 원장, 추계예술대학교 예술경영대학원장(2000–2002), 한국문화의집협회 이사장, 베를린 아태주간행사 총감독(2005) 등등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한국문화계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수많은 흔적을 남겨온 강준혁 선생이 바로 그 특강의 주인공이다.
 
요즈음엔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된 ‘기획자’라는 말도 선생께서 처음 고안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긴 세월 예술과 함께 해 온 선생님의 특강은, 잘은 몰라도 현실의 온갖 벽 앞에서 해결책을 찾아 분투하고 있는 동년배 기획자들보다는 함께 특강을 들은 예술가들의 가슴을 더 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선생님은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품격과 예의’의 상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신정보나 유행을 따를 때 그러한 것들의 태반이 상품적인 가치로 존재한다는 것에 주의하라, 상품을 다루는 순간 문화기획자가 아닌 ‘흥행사’가 된다, 새롭고 창의적이더라도 천박하거나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없는 것을 내보이는 것을 경계하라, 특히 우리 민족의 취향과 기질을 모르거나,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경우에는 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으셨다.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가?”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지식과 소양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인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충분한 한국인’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나를 거듭거듭 공명시켰다.
 
수적천석(水滴穿石). 매 순간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고 의심하고 온 몸을 던지는 노력 없이 바위는 뚫리지 않는다. 아주 당연한 듯 보이는 사실들도 사실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충분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나는 앞으로 미약한 노력이나마 계속해 나가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충분한 한국인이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선생님의 그 물음이 가슴을 울리던 시간을 다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인도 한국 일본 극단의 만남: ‘문화’는 공유하는 것 

인도전통연희 모히니야땀 수업 중 왼쪽이 인도의 배우 니미 라펠.  © 뛰다 
 
텃밭예술축제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인도, 일본, 한국 삼 개국의 극단과 프로듀서들이 만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가칭 ‘무빙 아시아 프로젝트(Moving Asia Project)’였다.
 
최근 사 년 동안 여러 가지 기회를 통해 개별적 만남을 가져 온 삼 개국의 단체들이 좀 더 긴밀한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새로운 자극과 기회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생긴 결과물들을 주변과 나누고자 예술텃밭에 한데 모이게 되었다.

인도의 극단 아디샥티(Adishakti), 인도와 한국의 문화교류를 위해 설립된 인도의 비영리 단체 인코 센터(Inko; Indo-Korea), 일본의 ‘새’ 극단, 한국의 프로듀서 집단 아시아나우(Asianow), 그리고 한국의 극단 뛰다. 이렇게 다섯 개 단체가 모여 함께 무엇을 해 나갈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논의했다.
 
다시 한 번 강준혁 선생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문화란 개인의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문화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뛰다는 서울에서 화천으로 이주한 뒤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어가면서 문화가 가지는 그러한 속성을 깊이 체감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이번에 모인 다른 단체들의 경우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소비되어 사라지는 문화가 아닌 나누어 풍성해지는 문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해와 상대방의 그것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는 문화,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를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문화.
 
모두들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남과 만나는 것의 시작은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자기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쌓아 온 발걸음에 더해 함께 나누며 걷는 길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 막 낯선 풍경 속으로 내딛는 그 첫걸음은 많이 어설프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걷고 걷다 보면, 더 많은 발걸음이 쌓이다 보면, 분명 함께 걷는 많은 발자국들과 더불어 굳건하고 아름다워지리라. 水滴穿石.

황혜란_배우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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