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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육체 페미니즘’이 말하는 몸 이야기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1. 19. 07:30

‘육체 페미니즘’이 말하는 ‘몸’ 이야기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9) 「뫼비우스 띠로서 몸」 <일다> www.ildaro.com
 
다시 이맘때가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이후 이미 한 해가 끝나버린 느낌을 가득 안고 남은 한 주를 보내다보면 어느덧 새해가 시작 된지도 며칠이 지나 있는 그런 시기. 분명 그 며칠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다지 달라질 것도, 어딘가 많이 변해있는 것도 아닐 텐데 으레 사람들은 이맘 때 서로에게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가짐, 결심, 계획 등을 인사로 묻곤 한다.
 
사실 매 순간 몇 개의 세포가 무수히 죽고 또 태어나고 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보면 우리는 항상 변하고 있고, 무언가를 기억하고 망각하고 있으며 결국 변하지 않는 것 같으나 동시에 변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한 속성으로 인해서 어느 순간 문득 바라본 자신이 낯설어지기도 하는 것일 테다. 굳이 새해 결심, 계획들이 없더라도 우리 모두는 오늘도 무언가 일상적이며 또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규칙들과 규범들과 관점들을 체화하고 있는 중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마음의 대립항으로서 열등하게 간주되었던 몸이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에서 몸에 대해 문제인식을 공유하게 된 것은 ‘마음/몸’이 수많은 대립쌍들과 더불어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유의 근본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궁극적으로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대립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의 이분법을 넘어서

▲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의 책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 2001)    
 
이분법적인 사고의 예들은 우리 주변에 매우 흔하다. 그것이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것과 더불어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분법이 지닌 폭력성이라는 것은 마치 양 극단인 것처럼 보이는 두 항이 실제로는 대립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가령 A/B라고 한다면 사실상 B는 A와 대립하는 대등한 실체가 아니라 단순히 'A가 아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B라고 이름 붙여진 - 사실상 ’A가 아님‘ - 은 결국 A를 정의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B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결코 여성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여성은 남성의 대립항으로서, 남성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부차적인 존재였으며 그 여성의 이름은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어머니, 아내, 소녀, 누나 등등이었다. 동시에 A가 아닌 것으로서의 B는 언제나 A에 비해 부정적인, 열등한 속성들을 담지한 결핍된 상대편으로 서열화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는 몸에 관한 페미니즘의 입장 중에서도 ‘성차’에 주목하여 육체 페미니즘(Corporeal Feminism)이라는 이론적 영역을 개척한 페미니스트로 여겨진다. 이번에 소개하는 「뫼비우스 띠로서 몸(Volatile Bodies: Toward a Corporeal Feminism)」은 그러한 그녀의 이론적 작업의 큰 흐름과 주장들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책에서도 간략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데, 몸을 둘러싼 페미니즘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평등주의 페미니즘으로서 여성의 몸을 하나의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이자 방해물로 인식한다. 즉, 여성의 몸이 지닌 특수성 -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 으로 인해 여성이 공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사적 주체로서 잠재적으로 모성이 될 몸 안에 폐쇄되어 버림으로써 여성의 자기실현이 억압당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구성주의 페미니즘으로 앞서 평등주의 페미니즘과는 달리 생물학 그 자체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계가 여성에게 억압적인 방식으로 생물학을 조직하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몸은 이데올로기가 적용되는 단순한 도구이며, 변화되어야 할 것은 몸 그 자체가 아니라 몸에 대한 태도이고 믿음이며 가치가 된다.
 
그로츠는 위의 두 입장 모두를 거부한다. 우선 그 두 입장 모두 여전히 마음/몸의 이분법적 틀 내에서 머무른다는 것과 몸은 그렇게 수동적이지도 않으며 이데올로기와 몸의 상관관계는 그들의 주장처럼 단순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몸은 의미와 의미화 작용, 그것을 재현하는 체계가 짜이고 구성되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성적인 차이는 사회적인 인정과 재현을 요구한다. 이런 것들은 테크놀로지의 혁신이나 이데올로기적인 평등이 달성된다고 해도 부인되거나 극복되지 않을 차이다. 생물학적이건 문화적이건 간에 이런 차이는 근절할 수 없다. 이들 차이는 문화적인 각인과 표식을 요구한다. ... 성적으로 특수한 것으로서 몸은 성적으로 결정되는 방식에 의해 몸에 투사된 의미를 코드화한다. 따라서 전(前)문화적, 전사회적, 전언어적인 순수한 몸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회적이고 담론적인 대상으로 환기시키며 몸을 욕망, 의미화, 권력의 질서에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77-79쪽)
 
하이힐을 신는 것과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
 
페미니즘의 세례를 막 받기 시작할 무렵, 사소하지만 나름 심각했던 고민들 중에 한 가지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는 것,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과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페미니스트 언니들의 책들에 따르면 하이힐과 화장은 남성의 시각적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자기 몸에 스스로 부과하는 일종의 억압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나를 정말 심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어쩌나-나는 하이힐도,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도 좋아한다는 것에 있었다. 개인의 취향과 상관없이, 화장을 하지 않고 하이힐을 포기하면 성 중립적인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유치한 한 때의 고민은 어쩌면 보다 큰 문제로 확장시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현실에서의 여성은 결코 남성이 될 수 없다. 여성이 남성이 되는 방식이 하이힐과 화장으로 상징되는 여성적 기호들을 폐기시키는 것에서부터 사회에서 남성들과 경쟁해 ‘유리천정’을 뚫고 여성들이 ‘지향할 본보기’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여성이 되어야 할 기준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여성은 아무리 ‘남성적’이 되어도 결국 남성에 미달할 수밖에 없다. 남성은 결코 성별중립적인 대상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남성이 되었다고 인정받는 여성의 경우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녀에게는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별도의 성별화된 미덕, 이중규범이 부과된다.

 
“성적으로 다른 몸에 남근적 위상이나 거세된 위상을 덧붙이는 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몸이 경험하고 주어진 의미가 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내재적 조건이 된다. 되돌아갈 수 있는 자연적인 몸이란 없다. 가부장제의 왜곡과 기형화를 제거하고 변형시키기만 하면 언제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그처럼 순수한 성차란 어디에도 없다. ... 남자 몸의 "남성성"은 여자 몸의 "남성성"과는 동일한 것일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각인된 몸의 유형은 그로부터 출현한 젠더의 의미와 기능에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44-145쪽)
 
구성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젠더는 생물학적 토대에 첨가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경험한다. 그 경험은 결코 그 자체로서 진리의 원천이자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인 힘들 바깥에 존재하지 않고, 몸을 통해 구성되고 만들어진다.
 
경험은 해석을 통해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나면 그 결과물로서의 경험은 결코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경험이 일정한 서사 속에 배열되어서 그 맥락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설명해 내려고 할 때서야 비로소 경험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거다 러너의 여성사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가 해낸 위대한 것은 개별적이고 파편화되어 이야기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의 경험들을 모아 의미의 배열을 만들어 냄으로써 기존의 남성성의 권력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폭력들을 고발해 냈다는 것이다.
 
순수한 성차가 존재하지 않듯이,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백지 상태의 몸이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의 몸이 겪어내는 경험들도 결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 경험은 재해석 되어야만 하며, 그러한 경험이 형성되기까지 작동한 권력을 분석해 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응당 페미니스트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성 중립적인 삶의 행동 양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이 아니라 왜 페미니스트의 존재 방식을 하나로 규정하려고 하는지, 성 중립적인 것에 내재된 범주 구분 자체의 권력적 함의 등을 의심하고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은 페미니즘 자체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론이자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똑같은 현실이 다르게 인식되고, 그 이전까지 사실이었던 것들이 모순이 되어 불편하게 다가온다. 일상 속의 산발적인 경험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맥락에서 다르게 해석되고 ‘재위치’지어진다.
 
페미니스트를 하나로 정의되거나 규정되거나, 완결지어질 수 없는 존재로 본다면, 이는 페미니즘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살아가는 것이고, 고민하는 것이고, 그리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이 지나고, 또 몇 번의 계절을 더 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속에서 고민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추은혜 / 미디어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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