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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52) 죽음에 대한 사색 
 
유방암에 걸려 투병하던 중, 암이 폐로 전이되었다는 40대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항암제에 내성이 생겨, 자신의 몸을 고통스러운 임상시험의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처절하게 죽음과 싸우고 있다 했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생명체의 자연스런 본능이니, 이 여성의 태도가 특별히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이 여성이 좋은 죽음, 평화롭고 존엄한 죽음의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죽을 순 없다
 
물론, 이 여성의 사례가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익숙한 현실이다. 한 의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현실을 용감하게 직시하고 신체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황폐화시킬 일체의 임상적 치료를 직접 끝내고, 다가오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병세를 확실히 이해하긴 해도, 거기에는 항상 거부감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의식적으로 그 현실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거부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셔윈 B. 뉴랜드,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세종서적, 1995)>, ‘11. 희망, 그리고 암환자’)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머리로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막상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죽음에 저항한다.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어 그것을 끝내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의 준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설사 우리가 죽음을 준비해 본들, 죽음이 우리의 계획을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예상한 대로 죽기는 어렵다. 심지어 때로는 죽음이 불공평해 보인다.
 
사실, 바라는 일을 모두 이루고 죽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각자 죽지 못할 나름의 이유를 대며, ‘지금 죽을 순 없다!’고 죽음 앞에서 아무리 항변해보아도 소용없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지나친 거부는 좋은 죽음의 기회를 잃게 만들 따름이다.
 
죽음의 장소가 된 병원

▲ 필립 아리에스의 책 <죽음 앞의 인간 (새물결, 2004)>
 
좋은 죽음을 가로막는 것이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만은 아니다. 그 집착을 부추기는 외적 상황, 즉 사회문화적 상황도 무시할 수는 없다.
 
몇 년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옆에 관을 내려 보내는 통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그런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은 드물다. 부고를 듣고 찾아가는 곳은 어김없이 병원 장례식장이다. 다들 큰 병에 걸렸다 싶으면 병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임종을 맞는다. 곧 이어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
 
우리 가족만 보더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평소 생활하며 머물던 방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더 나중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는 병원의 침상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병원에서 죽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자신의 방대한 저서 <죽음 앞의 인간(새물결, 2004)>에서 이런 현상을 ‘죽음의 의료화’라고 표현한 바 있다. 현대인의 죽음은 다름 아닌 ‘병원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병원은 환자를 회복시키는 장소, 혹은 치료의 실패로 환자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정상적인 죽음, 즉 의료진이 예견하고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죽음의 장소가 된다.” (필립 아리에스, 같은 책, ‘12. 역전된 죽음’)
 
이처럼 오늘날 병원이 치료와 회복의 장소에서 죽음의 장소가 된 까닭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는 의술이 발달했기 때문이고, 또 그 기술을 가정에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의사인 버나드 라운은 <치유의 예술을 찾아서(몸과 마음, 2003)>에서 병원에서의 죽음이야말로 죽음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일상을 꾸려온  집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고, 병원이 죽음에 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주장과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내 생각에도 품위 있는 죽음, 평화로운 죽음이 들어설 자리는 병원에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며 생명연장의 기록 세우기에 급급한 곳이 어찌 죽음을 맞기에 적당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죽음을 최대한 늦춰, 살아 있는 시체를 만들어 이윤을 창출하는 병원이 어찌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병원이 죽음의 장소가 되어버린 데는 죽음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 사람들에게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 죽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죽음이 우리 평온한 삶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에만 급급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서 죽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병원에서의 죽음이 더 개선되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은 삶의 거울’

▲ 버나드 라운의 <치유의 예술을 찾아서(몸과 마음, 2003)>  
 
아무리 죽음을 거부하고 통제한다 해도 죽지 않는 생명체는 없다. 다만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 짧은 시간이나마 자연에 따라 살다가 만족하면서 우리의 여생을 마쳐야 한다. 마치 올리브가 익으면 자연을 칭송하고 지금까지 자기를 키워 준 나무에 감사드리면서 떨어지는 것처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제 4권, 48)
 
로마 철학자가 전하는 이 죽음에 관한 구절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좋은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좋은 죽음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때, 또 죽음이 언제 어느 때 우리를 찾아온다 해도 그동안 주어진 삶의 충만함에 깊이 감사할 줄 알 때 가능하다. 죽기 전까지 살아온 삶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하지 못하면, 존엄한 죽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좋은 죽음은 참으로 드물다. 좋은 죽음이 드문 까닭은 무엇보다도 좋은 삶이 드물기 때문이리라.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삶의 정점이기도 하니까, 결국 살아온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 각자의 죽음은 자신의 삶과 닮은꼴이다. 그래서 죽음을 ‘삶의 거울’이라고도 표현하나 보다. 아름답게 살지 못했는데,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까?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사람에게 가족이나 의사가 그의 남은 삶을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인생을 잘 살아왔다면 잘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한 시인이 기원했다는 ‘각자에게 알맞은 죽음’이란 것도 생각해 보면, ‘살아온 것처럼 죽게 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병원에서의 죽음이 만연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시인의 기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죽음의 외적 여건은 각자에게 알맞은 죽음을 허용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죽음을 ‘실패’와 동일시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끝없이 지체시키는 데 골몰하는 병원에서 존엄한 죽음을 만나기 힘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향해
 
비록 죽음의 외적 조건이 좋은 죽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좋은 죽음을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좋은 삶을 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사는 동안 삶에 최선을 다했다면, 언제 어느 때 죽음을 맞더라도 좀 더 담담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죽음을 향한 여정에 있어,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죽음이 실패도 불행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의 정점, 완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이건, 질병의 고통이건, 마음의 상처건, 힘든 삶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꾸준한 자기훈련, 자기성장의 과정 없이 누구도 단번에 큰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다. 종교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적 성장을 통한 영혼의 각성이 어찌 하루아침에 얻어질 수 있겠는가. 삶 속에서 죽음의 사색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좋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티벳의 승려들이 소망하듯이, 죽음의 순간이 설사 눈부시게 밝은 빛과 통합하는 멋진 최후의 경험은 아닐지라도, 나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평안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 야심찬 의사들의 손에 내맡겨져 온 몸에 주렁주렁 튜브를 단 채, 비극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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