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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넷째 이야기① 
 
작년 7월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일 많은 비가 쏟아지던 장마철의 어느 날 아침. 가늘고 촘촘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밤사이 빗장을 걸어놓은 대문을 열기 위해 우산도 없이 후다닥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에 대문을 열고 어스름 땅거미가 지는 저녁에 대문을 닫는 건, 뭐랄까. 일상에 특별함을 불어넣는 작은 의식과도 같은 느낌이다. 대문을 열고 닫음으로써 나의 하루가 힘차게 시작되고 정갈하게 갈무리되는 듯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그날도 나는 왠지 모를 설렘에 휘파람까지 날려가며 대문을 활짝 열었고, 바람에 닫히지 말라고 여느 때처럼 나무문짝 아래에 돌을 괴어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집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것이 내 눈에 띄었다. 대문 옆 문간방 아궁이 안에 엎드려 있는, 작고 까맣고 부드러운 털을 지닌 어떤 것. 나는 그게 고양이임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동물 중에서 그토록 작은 공간에, 그처럼 등을 유연하게 말고 엎드려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고양이밖에 없었기에.
 
도시 뒷골목에 갇힌 공포의 이미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나. 하덕규, 함춘호라는 뮤지션으로 이루어진 <시인과 촌장>을 매우 좋아해서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듣곤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양이'라는 노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 노래는 내게 대단히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로 시작되는 몽환적인 전주는 물론, 점차 빠르고 경쾌해지는 리듬과 시적인 가사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할까. 조금 과장을 하자면 고양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그 노래를 듣는 잠시 동안은 고양이 예찬자로 둔갑해 버릴 정도다.
 
하기야 누군들 "빛나는 두 눈과, 하얗게 세운 수염과, 허공을 휘젓는 귀여운 발톱을 지닌" 우아한 동물에 반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것이 "창틀 위를 오르내릴 때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캄캄한 밤중에도 넘어지지 않으며, 높은 곳에서 춤춰도 어지럽지 않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면.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사정은 달라진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양이들은 우아하고 아름답기는커녕 하나같이 뻔뻔하고 공격적이며 지저분하다. 그래서 도저히 곁에 두고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돌아보면, 고양이에 관해 내가 갖는 이런 이미지는 확실히 서울에 살면서 형성됐지 싶다. 부모님에게서 독립이란 걸 하고 나서 처음 몇 년 간 수도권을 맴돌다가 마침내 서울에 '입성'한 것이 이천 년 봄. 홍제동을 시작으로 명륜동을 거쳐 중곡동에서 서울생활을 마무리하기까지, 나는 보증금에 월세를 얼마간 내야 하는 고만고만한 방들을 거처로 삼아 지냈다.
 
순전히 세를 놓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이는 똑같은 모양과 구조의 다세대주택들이 즐비한 골목은 햇빛이 들끓는 한낮에조차 늘 얼마간은 서늘하고 꿉꿉했는데, 그래서인가는 몰라도 후미진 어딘가에는 주인 없는 개와 고양이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기 일쑤였다.
 
어려서부터 소도시에서 성장하여 집 동물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던 데다 한 번도 반려동물이란 걸 길러본 적이 없는 탓인지, 혹은 나도 모를 어떤 이유에서 그저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큰 탓인지, 아무튼 나는 동물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외모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품위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유기동물을 반길 이유는 없지 않은가. 반기기는커녕 나는 오히려 그들이 눈에 띄면 먼저 피하는 쪽이었다.
 
그들의 조심스런 발걸음과 주변을 살피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것들 특유의 방어본능으로 보였고, 나는 그것이 언제든 전투적인 성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문 앞이나 전봇대 옆에 놓인 쓰레기봉투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사람 발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휙 돌려 쏘아보는, 일명 도둑고양이라 불리는 것들은 내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대상이었다. 먹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까. 그들은 여간해서는 물러서지 않았고, 내가 용기를 내어 발을 크게 쿵쿵거리거나 소리를 질러도 외려 내 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 낮게 갸르릉거리며 위협적인 태세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냥 조용히 그들 곁을 지나쳐 집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있다면 오죽 좋았겠는가. 문제는 내가 그럴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집을 불과 3, 4미터 앞에 두고도 한창 식사 중인 그들 때문에 이십 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밤이면 그 공포가 더욱 심해져, 나중엔 귀가 시간이 좀 늦어지기라도 하면 고양이가 대문 앞에 있을까 미리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내게 오버도 정도껏 하라며 비웃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 역시 한낱 길고양이들 앞에서 무력해지는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우선은 그들이 내 눈 앞에서 좀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훨씬 컸다.
 
그들에게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게 있다면
 
고양이에 대한 나의 이미지와 무지막지한 공포가 바뀌게 된 첫째 계기는 인도 여행이다. 인도 남서쪽에 자리한 께랄라 주의 바닷가를 집시처럼 펄럭이며 돌아다니던 시절.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묵든 어느 카페에 가든 어느 요가센터에서 수련을 하든, 거기엔 꼭 두어 마리의 고양이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분명 내가 서울 뒷골목에서 경험한 길고양이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아파트 실내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처럼 깨끗하고 털이 잘 빗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비교적 실내와 실외를 자유롭게 왕래했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되 가끔은 바깥에서 사냥 본능을 발휘한 흔적으로 입가에 뭘 잔뜩 묻혀 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품에 안기거나 무릎 위로 올라오는 대신, 그저 테이블 사이를 무심하게 거닐다가 꼬리로 슬쩍 다리를 건드리곤 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버려진 것도, 사람 손이 지나치게 많이 간 것도 아닌, 그저 사람과 한 공간을 나눠 쓰는 고양이였다.
 
이상한 것은 그런 고양이들은 나에게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갑자기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거나 좋아진 것도 물론 아니었다. 다만 고양이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 나 자신을 지켜보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다. 고양이에게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게 있다면 인간 중심의 현대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을 바로 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나 또한 지금 이 순간 가장 자연스러운 나로 살고 있기에 저들을 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니겠냐고.
 
그 후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시골 사는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다. 굉장히 크고 살찐 두 마리의 고양이가 사람보다 더 가볍게 집 안팎을 드나들며 어디든 자기가 원하는 곳에 머물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친구 말로는 길고양이를 거둔 거라는데, 그래서인지 집안에서는 사료를 먹지만 바깥에 나가면 급격히 야생성이 살아나 쥐를 쫓고 종종 죽은 새도 뜯어먹는다고 했다. 인도라면 몰라도 우리나라의 보통 가정집에서 그처럼 자유롭게 고양이를 풀어놓고 키우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집 안에서만 키우든가 아예 집 밖에 내놓고 키우지 그래? 들락날락하면 집이 지저분해지잖아. 피 묻혀 오고 그러면 좀 찝찝하기도 하고."
 
"안에서만 키우면 고양이가 답답해서 못 살지. 내놓으면 다시 길고양이가 될 확률이 크고. 야, 그런 거 다 떠나서 사람은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는데 고양이한텐 왜 그걸 못하게 해야 하는데? 개는 남의 밭을 짓밟고 똥도 막 싸서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묶어서 키우지만 고양이는 괜찮아. 그리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얼마나 털을 열심히 핥는데. 아마 웬만한 사람보다 더 깨끗할 거다."
 
이런 걸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친구 덕에 나는 또 한 번 고양이의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시골이야말로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터전이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여리고 가냘픈 너의 등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도 고양이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하지만 내 친구처럼 실내에서 키우면서 동시에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보장하는 집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대부분은 밖에 놓아기르며 때맞춰 밥이나 주는 정도로 보인다. 고양이 입장에서 보면 신체이동의 자유와 식량이 보장되는 생활이랄까. 그러니 우리 동네 고양이들에게 내 집 네 집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열린 대문으로 불쑥 들어와 앞마당을 유유히 가로질러 집을 한 바퀴 휙 돌고 나가거나, 만만한 담벼락 혹은 지붕에 올라앉아 햇볕을 양껏 쬐다가 그것도 지루해질 즈음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다.
 
도시에서 살 때처럼 고양이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포함한 모든 동물)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언젠가는 시인과 촌장이 노래한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신비로운 놈으로 한 마리쯤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될지도 모르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내 친구처럼 방목해서 자유롭게 키울 자신은 더더욱 없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돌봄의 기질과 성품 자체가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동네 고양이들이 수시로 우리 집을 들락거리는 지금 상황이 딱 좋기도 하다.
 
작년 여름 비 내리는 어느 날 아침, 우리 집 작은 아궁이에 엎드려 쌔근거리는 새끼 고양이를 보았을 때 내가 적잖이 당황한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아니, 이 아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설마 너 우리 집에서 살려는 건 아니지? 이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면 정확할 듯.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고양이와 좀 놀아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의 등에 살짝 얹었다. 그가 어서 깨어나 앙증맞은 목을 돌려 내 쪽을 보기를, 장난꾸러기처럼 빛나는 꼬리를 달랑거리며 대문 밖으로 줄행랑치길 바라면서.
 
그러나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다만 느꼈을 뿐이다. 내 손가락 아래서 숨을 쉴 때마다 희미하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그 고양이의 등이 무척 여리고 가냘프다는 것을.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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