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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피해자다움’ 사슬 묶인 성폭력피해자들
항거불능요건 완화하고, 비동의 간음죄 신설해야 

 
<필자 박선영님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위원이며 일다 편집위원입니다.―편집자 주>
 
미국의 저명한 형법 교수인 수센 에스트리치는 <법 앞의 불평등한 여성들>(원제 “Real Rape")에서 자신은 운 좋은(?) 성폭행 피해자였다고 고백한다.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으로 흑인 남성이었고, 성폭행 후 자동차와 돈을 빼앗아 도주해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가해자가 백인남성이었고, 아는 사람으로 그가 돈도 차도 빼앗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면?
 
다른 범죄와 달리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가해자는 동정 받는 참으로 이상한 범죄다. 성폭행 피해자가 이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다워야’ 한다.
 
지난해 12월 인터넷을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쇄도했던 수원지방법원의 판결은 피해자가 이른바 ‘피해자답지 않아서’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사건이다.
  
수원지방법원은 12세 소녀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돌아가며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성인남성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 소녀는 검찰 조사에서 "술을 마시고 나니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가 나이 어린 소녀이고 음주를 한 사정은 인정되나 심리적 또는 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피해소녀가 사건 당일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고,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성관계 직후 혼자서 옷을 챙겨 입고 여관을 걸어 나왔고, 피고인들에게 차비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형식적인 사정만 가지고 12세 소녀가 3명의 남성과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판단한 것은 12세 소녀의 상황 판단력, 위기 대처능력과 심리적 상태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성인남성중심의 판단기준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법원은 성폭행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간음 당시 행사한 유형력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면 성폭행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해 오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경우, 성폭행 직전 피해자가 시아버지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도 시아버지에게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도중 피해자가 침묵하거나 가해자와 대화를 했을 경우, 성폭행 당한 이후 피해자가 잠을 잔 경우나 주변인에게 태연한 경우 등은 피해자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의 성폭행 주장은 신뢰성을 얻기 어렵다.
 
극도의 공포로 인해 6층 모텔방에 뛰어내려 전치 20주의 상해를 입어도 청바지와 속옷이 가지런히 놓여있으면 동의에 의한 성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성폭행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은 배척되고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성폭행의 보호법익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데, 극도의 항거불능을 요구할 이유는 없다. 성폭행 피해자의 항거불능 요건을 완화하거나, 폭행·협박의 정도에 따라 법정형을 달리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는 않았으나 상대의 의사에 반해 성폭행을 한 경우는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것을 통해 성폭행 처벌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필요하다.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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