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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인도네시아 아체③ 삼빠, 삼빠, 삼빠 

▲ 사진 설명: 말링게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하며 짐을 내린지 한나절 만에 우리는 삼빠(쓰레기) 더미들과 마주쳤다.

 
나는 끼니때마다 “마깐(Makan)~! 마깐~!” 외치며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밥 먹어, 밥 먹어, 하는 인도네시아 말이다. 사람들 밥을 챙기는 건 내가 좋아서 떠맡은 일들 중 하나이다. 왁자지껄 모여드는 사람들 뒤로 느지막이 나타나는 프레자에게 밥도 푹 퍼 주고 반찬도 더 놓아주면서 하는 말은 “마깐 바냑(Makan banyak)”이다. 마깐 바냑, 많이 먹으라는 잔소리다. 프레자가 헤실헤실 웃는다.
 
한동안은 “아빠 이니(Apa ini)? 아빠 이니?” 하면서 다녔다. ‘아빠 있니?’처럼 들리지만 이곳 말로 ‘이게 뭐야?’라고 묻는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키며 아빠 이니? 하면 아이들이 그건 안징(anjing,개)이라고, 자궁(jagung,옥수수)이라고, 붕아(bunga,꽃)라고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열정적인 춤이 연상되는 말 ‘삼빠(sampah)’도 여기서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삼빠 때문에 마음이 좀 복잡하다. 처음 말링게 마을을 돌며 길을 익힐 때, 길 양 옆으로 끝도 없이 널려있는 쓰레기 더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핏 보기에도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대부분이다. 야자수 즐비하고 하얀 파도 부서지는 바닷가 풍광에 감탄하며 짐을 내린지 한나절 만에, 나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아주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학교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먹고 버린 과자며 음료수 봉지들이 운동장을 골고루 뒤덮고 있었고, 어딜 가나 쓰레기가 발에 차이는 곳에서 아이들이 예사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쓰레기에 대한 교사들의 감수성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대만이나 한국에서 온 이들은 이거 심각하다 입을 모았고 인도네시아 청년들은 그냥 덤덤히 듣고 있는 쪽이었다. 
 
▲ 사진 설명: 구멍가게에는 일회용 세제와 샴푸들이 넘쳐났다.  © 진형민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칠십 년대 우리나라의 거리 풍경도 너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길가에는 항상 쓰레기들이 굴러다녔고 버스 타고 가다가 쓰레기를 창문 너머로 휙 던지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한 번씩 학교에서 동원된 아이들이 나무젓가락을 들고 동네를 돌며 쓰레기를 줍곤 했지만 며칠만 지나면 다시 그대로였다.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구호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서야 쓰레기들이 제때 쓰레기통 속에 버려졌고, 그렇게 모여든 쓰레기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조리 땅에 묻히거나 불태워졌다. 그렇게 또 다시 십여 년이 흐른 뒤에 쓰레기의 분리수거가 시작되었으며, 비로소 재활용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긴 시간 동안 느리게 진행된 변화였다.
 
그러니 그 나라 혹은 그 사회의 속도를 살피지 않은 채 내 기준만을 앞세워 왈가왈부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아무리 선한 뜻을 가졌다 할지라도 바깥의 입김과 손길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인 호의는 역시나 곤란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 비닐과 플라스틱들이다. 쓰레기 넘쳐나던 내 어린 시절에는 그래도 과일을 사면 종이봉지에 넣어주고, 우유를 병에 담아 팔았으며, 집엣 그릇 들고 가 두부를 사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엔 비닐이 흔전만전하다. 달라는 대로 덜어서 파는 밀가루며 설탕을 모두 비닐에 담아주고, 큰 페트병에 담긴 음료수도 비닐에 조금씩 따라서 팔고, 세제나 샴푸도 전부 작은 비닐에 담긴 일회용품뿐이다. 게다가 잠깐의 필요 뒤에는 그 모든 비닐들이 아무데나 픽픽 버려져 저렇게 쌓여가고 있다. 
 
▲ 사진 설명: 먹이사슬을 보여주며 쓰레기 문제는 우리 삶의 문제라는 걸 알려주고자 했던 수업   © 진형민 

 
아직 상수도 시설이 없어 우물물을 길어다 쓰고, 석유곤로에 들어가는 석유가 귀해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해먹고, 마을을 통 털어 구멍가게 두세 개가 전부인 이 외진 마을에서 비닐은 가장 쉽게 누릴 수 있는 문명이자 쓰레기의 원천이었다.
 
의식의 변화는 더듬더듬 이루어지는데, 자본의 힘으로 값싸고 편리해진 것들은 빠르고 집요하게 삶을 파고든다. 그게 꼭 필요한 건지 아닌지 따져볼 새도 없이, 언제 어떻게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지 헤아려 볼 틈도 없이 물밀듯이 밀려드는 중이다.
 
토요일엔 따로 정해진 수업이 없다기에 아이들과 운동회를 하기로 하였다. 몇 가지 놀이와 간식을 준비해가지고 학교로 갔다. 지저분한 운동장을 같이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쓰레기 잠깐 줍고 놀까? 말을 꺼내 본다. 그냥 몇 개씩만 줍자 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누가 누가 쓰레기 많이 줍나’ 놀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남이 먼저 주을 세라 쓰레기를 향해 부지런히 뛰어다녔고, 뒤꼍에 있으나 마나 하게 서 있던 학교 쓰레기통도 오랜만에 배가 불렀다. 그리고 우리들은 갑자기 훤해진 운동장에서 줄다리기도 하고, 신발던지기도 하고, 과자 따먹기도 하였다.
 
그 다음 토요일엔 바닷가에 나들이가자 하였다. 바닷가까지 걸어가는 길목에는 교사들을 심란케 했던 그 쓰레기 더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아이들이 줄서서 또랑또랑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동안 교사들은 대수롭잖은 얼굴로 길가 쓰레기들을 주워 자루에 담았다. 아이들에게 쓰레기 줍자는 말을 먼저 하지 말자고 교사들끼리 미리 약속을 해 두었다. 선생님들이 무얼 하는지 힐끔대던 아이들이 저희끼리 수군수군 댄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가는데 아피드(Afid)가 쓰레기 하나를 주워 교사가 들고 있던 자루에 얼른 담는다. 아피드는 몸집도 크고 영리해서 남자아이들이 큰형처럼 따르는 녀석이다. 그러자 아피드랑 친한 아이들이 성큼성큼 쓰레기를 주워 나르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여자 아이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조그만 허리 구부려 쓰레기를 줍는다고 바빠졌다. 그렇게 같이 어울려 바닷가까지 걸어가는데,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벙글거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 사진 설명: 말링게 초등학교 큰 아이들 반. 대만에서 온 웬링과 인도네시아 청년 프루완또와 프레자 그리고 내가 수업을 맡았다. 둘째 빈이와 막내 짜이도 청강생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 진형민 

 

바닷가엔 못 보던 쓰레기통이 하나 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커다란 것이다. 아이들은 거기다 주워온 쓰레기들을 다 모아 넣은 뒤 모래밭으로 뛰어가 놀았다. 그런데 사실 그 쓰레기통은 교사들이 간식 값을 모아 시멘트와 모래를 사고 이웃 바박에게 부탁드려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마을에 튼튼한 쓰레기통 하나 마련해 두는 것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었다. 우리는 곧 떠날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속도대로 또 살아갈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판자 얼기설기한 바닷가 찻집에 교사들이 모여 앉았다. 3000루피아(우리 돈으로 약 350원)짜리 냉차를 마시면서 더운 날 바깥수업을 한 서로의 노고를 추켜세웠다. 그러다가 듬직하니 밖에 버티고 서 있는 우리들의 쓰레기통으로 다시 화제가 모아졌다.
 
와, 삼빠가 벌써 꽉 찼네. 근데 저 삼빠들 결국 태워야겠지? 비닐 태우면, 그거 뭐더라, 다이옥신 같은 거 나오지 않나? 다이옥신은 암 걸리게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그게 더 나쁜 거 아닌가? 삼빠 태울 때 연기 맡으면 안 된다는 말 애들한테 해줬어? 그러니까 뭐야, 삼빠를 그냥 내버려두는 게 더 나았다는 거야?
 
한참을 떠들다가 우리는 그동안 단골집 삼았던 바닷가 찻집 총각에게 쓰레기 가득 찰 때마다 좀 태워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총각은 흔쾌히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정말 고맙다고, 꼭 마스크 쓰고 태우라고, 어정쩡하게 같이 웃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햇볕은 따갑고 삼빠들도 더 이상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등이 자꾸 화끈거렸다. (진형민 / 일다[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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