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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 사건이 아닌, ‘데이트 폭력’입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7. 중년의 피해자 

 

※ 일다의 신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발간 기념으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무서울 정도로 나를 소유하려 했어요”

 

서울에 사는 48세의 문경씨(가명, 여성)는 데이트 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 지금은 이혼한 전남편과 별거 상태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별거 사유는 남편의 외도였다. 문경씨는 남편과 관계를 회복해보려 노력했지만 남편은 의지가 없었다. 별거 후, 문경씨는 학원에서 일하면서 같은 학원의 강사인 유부남과 연애를 하게 됐다. 남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강사였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호감을 갖게 됐다.  

 

하지만 사귀고 보니 애인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거나 다른 사람한테 뭘 받기만 해도 심하게 질투를 했다. 문경씨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집 앞에서 방에 불이 켜지는지 꺼지는지 감시하고, 문경씨 차의 주행 미터까지 체크해서 누굴 만났냐고 추궁하곤 했다. 아이들 양육 문제로 별거 중인 남편을 만나면 그것까지 트집을 잡아 괴롭혔다.

 

“돈이 있는 중년 남자이다 보니 다른 거에 부족함이 별로 없으니까 연애 관계에서 오로지 자기 소유, 여자의 복종, 이런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인보다 애인한테 집착을 훨씬 많이 하죠. 무서울 정도로 소유욕이 강해요.”

 

상대의 계속되는 집착에 지친 문경씨는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외진 곳 낭떠러지에 차를 세우고는, 계속 만나지 않으면 차를 굴려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한번은 근처 야산으로 끌려가 머리를 수차례 구타당했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문경씨가 상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별거 중인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나서였다. “깊은 관계는 아니고 그냥 친하게 지내는 정도의 사람”이라고 둘러대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남편이 나서자 상대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사람이 남편이 나서서 얘기하니까 기가 확 죽더라고요. 그 뒤에도 몇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지만 남편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못 만나다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겨우 떼어냈어요.”

 

‘치정 살인’으로 비춰지는 사건의 내막

 

뉴스에서 ‘모텔서 내연녀 폭행 사망’, ‘내연녀 외도 의심 살해’, ‘연상 내연녀 때려 살해’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치정 사건처럼 여겨지는 이 일들은 사실 중년 여성이 경험하고 있는 데이트 폭력 사건들이다. 

 

▲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한  여성폭력 예방 캠페인 ‘바로 지금’ 중에서.   ©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의전화 <2014년 상담통계> 중 데이트 폭력 피해자 연령을 보면 40-49세 8.8%, 50-59세 4.2%로 중년 여성의 데이트 폭력 피해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중에는 문경씨처럼 외도 상황에서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여성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나 이혼한 여성이 데이트 상대에게 폭력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20대, 30대와는 달리 사회 경험과 연륜이 있기에 중년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에 더 잘 대처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년 여성이 처해있는 조건 때문에 데이트 폭력에 더 취약한 경우가 많다.

 

경제력이 있는 중년 여성들은 데이트 관계에서 금품 갈취를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경남 지역에 사는 은주씨(가명, 45세)도 바로 그런 경우다.

 

상대는 산악회에서 만난 남자였다. 만난 지 몇 달 지난 시점에 남자가 사업에 필요하다며 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큰돈이었다. 어떻게 갚을 건지 기한과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갚지 않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후 남자는 돈을 두 차례 돈을 더 빌려갔다. 남자는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했는데, 그때마다 은주씨는 거절하면 돈을 못 받게 될까봐 남자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은주씨가 돈을 언제 갚을 수 있냐고 묻자 남자는 “당신이 나한테 이 정도도 못해주느냐”면서 오히려 은주씨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관계를 요구하면서, 거부하면 남편한테 둘의 관계를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은주씨는 이 남자와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서 이사를 가려하지만,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벌써 7년째 이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은주씨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더 두렵다고 말한다.

 

정선희 창원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중년 여성들은 남편과 자식한테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계속 폭력을 참고 상대에게 끌려 다닌다.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피해자들은 ‘내가 죽어야만 이 문제가 끝난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유리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도 “중년의 데이트 폭력은 남-녀 서로 인생 경험이 많은 만큼, 20-30대가 겪는 데이트 폭력보다 폭력의 강도가 훨씬 세고 그 기간도 길다”고 설명한다.

 

“상대 남성은 여성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중년 여성들은 외도 사실을  남편이나 아이들이 알게 돼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폭력을 당하는 기간이 10년, 20년 이렇게 길어요.”  

 

▲ 중년여성들이 데이트 폭력에 잘 대처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아니다. © sciencefreak  

 

외도 관계에서 겪는 데이트 폭력의 특성

 

데이트 관계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중년 남성들은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보복하는 방식 또한 수위가 높아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승자씨(가명, 47세, 여성)는 동네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만나서 잠깐 사귀었던 남자에게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승자씨가 일절 연락을 받지 않자 상대 남성은 성관계 후 몰래 찍어둔 승자씨 나체 사진을 우편으로 승자씨 집에 부쳤다. 그걸 본 승자씨는 기절해버렸고,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정선희 창원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내담자들 중에서 중년 여성의 경우,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서 인생이 좌절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남편이 의사인 여성이 있었어요. 외도 상황에서 데이트 폭력을 당했는데, 끝없는 성관계와 돈 요구에 지친 여성이 헤어지자고 했더니 가해자가 이판사판으로 남편한테 알려서 결국 남편한테 이혼을 당했어요. 재산분할도 제대로 못 했죠.”

 

유부남이든 유부녀든 연애 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자신의 가족에게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원치 않는 성관계나 금품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게 되기 쉽다.

 

그런데 데이트 관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의 경우엔, 이미 자신의 가정 안에서도 가정폭력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폭력적인 남자들은 자기 부인한테 외도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안 두려워해요. 부인이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부인을 반쯤 죽여 놓죠.”(데이트 폭력 피해자 문경씨)

 

바람을 피웠으니까 당해도 싸다?

 

전문가들은 그것이 설령 외도라 해도, 중년이 연애 관계에서 겪는 폭력에 대해 ‘데이트 폭력’이라고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20대가 겪으면 데이트 폭력인데 40대나 50대가 겪으면 내연, 치정 이렇게만 얘기가 돼요.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자신의 선택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건 폭력이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중년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은 보지 않고, 결혼 제도에서 일탈했다는 것에만 노골적인 반감을 보여요.”(유리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

 

이런 현실에서 중년 피해자들은 폭력을 당해도 대응을 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고소를 해도 경찰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을 당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기도 한다. 경찰이 “아줌마도 가정파탄범이잖아요” 라면서 폭력 피해자를 비난하기 일쑤라는 것.

 

“바람 피웠기 때문에 당해도 싸다”고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많은 중년의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이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상대가 누구이든, 피해를 겪는 당사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폭력은 폭력이고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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