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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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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노동>⑨ 전국보조출연자노조 문계순위원장 인터뷰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보조출연자의 노동현실을 기록한 이지홍 씨는 여성노동자 글쓰기 모임 회원이며, 극작가입니다. 이 연재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엑스트라 모집! 나이·학력 무관, 월 200만 원 보장?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어린 시절 흥얼대던 노래 가사처럼, 처음 출연 연락을 받았을 때의 심정이 꼭 그랬다. 아이들이 성장해 독립하면서, 51살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서 본 보조출연자, 일명 엑스트라 모집 광고는 매력적이었다. 나이 무관, 학력 무관, 월수입 200만 원 보장.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누구나가 한 번쯤 꿈꿔본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소개비 3만 원을 용역회사에 지불한 그날 밤, 그녀는 KBS 별관 앞으로 갔다. 4-500명의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프로그램이 ‘서울1945’였는데, 72시간을 꼬박 촬영했어. 잠 한 숨도 안 재우고, 찍고, 기다리고, 찍고. 그래도 불평불만 하나 없었어. 텔레비전에 나온다니까, 좋아서 간 거니까. 탤런트들은 다 그렇게 하나보다 했지. 그게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못 했던 거야.”
 
잠 한 숨 못 자는 고통도 유명 연예인과 다정한 포즈로 사진 한 장 찍으면 눈 녹듯 사라졌다. 화면에 스치듯 지나가는 자신을 텔레비전에서 확인하는 재미로, 주인공인 양 최선을 다해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냈다. 피난 보따리를 쥐고 산비탈을 오르고, 폭탄이 터지는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산속의 살기 어린 추위 속에서도 버스 뒤켠에 서서 다음 장면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폭언도, 성추행도, 죽음도 모두 ‘묻히는 곳’ 

▲ 故 박희석 씨 추모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문계순 위원장. 보조출연자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故 박희석 씨의 죽음은 산재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몸의 고통은 연기하는 즐거움으로 대체될 수는 있었지만, 보조출연자들을 관리하는 2-30대 젊은 반장들의 폭언이 남긴 마음의 상처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어른이고 애고 할 것 없이 모두 ‘야, 자’ 하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는데, 공영방송에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이래도 되나 싶은 거야. 두 달, 세 달 일하고 보니까, 언어폭력이 쫙 깔렸어. 감독이 ‘아까 백성 역할 했던 그 새끼 데려와’ 그러면, 반장이 고대로 ‘아까 백성 역할 했던 새끼 나와’ 그러지. 완전 개바닥이야. 무시당하고, 포로수용소의 죄수 취급당했어. 그러다 보니 보조출연자하고 진행반장 사이에 싸움이 간간이 있었지.”
 
촬영현장은 매우 열악했다. 변변한 화장실 하나 없어 사람들은 가까운 인근 밭에 가서 볼 일을 보고, 탈의실이 없어 남녀노소가 뒤엉켜 서로의 시선만 피한 채 맨 살을 드러내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어둠이 산속 세트장을 덮으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추행이 벌어져도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전쟁 장면을 촬영할 때면 정말 진짜같이 해. 진짜 화살을 쏘면서 싸우지. 누구는 말을 타고, 누구는 칼과 창을 들고 진짜처럼 싸워. 그러다 말에서 떨어지기도, 이런저런 크고 작은 부상들을 당할 수가 있어. 하지만, 아끼징끼(빨간 소독약) 하나 없어. 의사 하나 투입되지 않는 거야. 그래도 웬만해서는 얘기 못 해. 괜히 얘기했다가 못 나오게 할까 봐. 실재로 성곽에서 보초 서던 출연진이 졸다가 떨어져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냥 묻혀버리는 거야.”
 
다중하청구조의 밑바닥, 용역회사 직원에게 찍히면 ‘끝’
 
현재 보조출연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략 10만 명(노숙자 포함). 일 공급량에 비해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져도 누구 하나 맞서지 못 한다. 핏대 한 번 올렸다간, 바로 찍혀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송사가 갑이고, 제작사가 을, 용역회사가 병, 그리고 우리가 정이지. 갑을병정, 정. 제일 밑바닥이 우리야. 용역회사에는 동원부라고 있는데, 동원부 밑에 지부장들이 있어. 각 지부마다 보조출연자 30명씩 관리해. 보통 오후 3-5시 사이에 용역회사에서 다음날 일감을 정해서 알려줘. 매일매일이 대기 상태인 거야. 언제 일이 잡힐지 모르니까, 따로 뭘 하기도 힘들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스스로 지부장한테 전화해서 사정을 하고. 상납을 해야 하고. 또, 현장에서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반장들이, 너 어디 소속이냐 물어서 그 지부장에게 바로 전화 해. 그 사람 보내지 말라고. 그러니 모두들 속과 다르게 맨날 좋다고만 하는 거지.”
 
지부장이나 현장 반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들의 눈에 한 번 띄면 만사가 형통이기 때문이다.
 
“’서울1945’ 촬영할 때, 반장들하고 친한 4인방이라고 있었어. 10대, 20대, 30대 애들인데, 주부도 있었지. 4-500명 투입되니까 현장반장들도 4-5명 됐거든. 그 애들은 매일 일을 받는 거야. 월 200만 원이 넘게 벌고, 일도 쉬운 것만 배정받아. 사람들 관리하는 거, 누가 일 못 하나 감시하는 거 시키고. 밤 되면 또 어디 요리집을 가는지 노래방을 가는지 보이지 않고.”
 
연예인 못지않게 끼를 가진 보조출연자들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길게는 30년, 40년을 버텨왔다. 숙소를 마련해주지 않아 자비로 숙소를 해결하고, 오후 4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도 두 시간 뒤 저녁밥을 10분 만에 먹어 치워야 하는 몰상식한 스케줄을 감내하면서. 감독이 OK 사인을 보낼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뺑이’를 치고, 구역질 날 정도로 오염된 의상 때문에 피부병이 나도 변변한 치료 한 번 요구하지 못 하면서도, 그 일이 천직처럼 느껴졌다.
 
“스타들? 보조출연자들이 걔들보다 더 연기 잘한다고 생각해. 20년 30년 경력이 된 사람들도 많거든. 그리고 진짜 잘해. 단역배우 시켰다가도 감독이 마음 안 들면 보출(보조출연자)을 불러. 오래 했으니 감독도 아는 거야. 원래는 대사를 하면 일당을 100% 올려주게 되어 있는데, 주지 않지. 또 그 사람들도 자기가 떴다고 좋아하고,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더러운 똥덩어리인 줄 알면서도 무서워 피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보조출연자들이고 또 다름 아닌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다.
 
60년 보조출연자 역사에 첫 노동조합 깃발을 올리다
 
“한 번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현장에 투입됐는데, 그 중에 15명만 철야를 하게 됐어.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집에 보내줘야 하잖아. 근데, 못 가게 하는 거야. 출연하는 사람들은 돈을 받지만, 나머지는 아니잖아. 나중에 보니까 나머지 몫까지 철야로 올려놓고 그 돈을 떼먹으려고 못 가게 했던 거야.
 
새벽에 여의도에 도착해서 방송국 로비에서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는 얘기들이 나왔지. 국회에 가자, 청와대에 가자, 문화관광부에 가자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서 50명 정도가 즉석에서 서명을 한 뒤, 집에 가서 씻고 아침 9시 30분에 다시 모이기로 한 거야. 그랬더니 8명이 왔더라고. 강제는 없었어.
 
어디를 가야 하나 하다가, 그래도 우리가 노동자니까 노총을 찾아가자고 했고, 마침 한국노총이 여의도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게 된 거지. 그날 거기서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하고, 서울시청에서 노조 인가를 받은 게 2006년 9월 11일야.”
 
그녀가 보조출연자로 첫 촬영을 한 것이 2006년 6월 20일. 보조출연자 경력 3개월이 채 못 된 그녀가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방송 역사와 맞물린 보조출연자들의 60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노조의 깃발이, 선배들의 비아냥거림처럼 ‘이 판의 심연(深淵)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풋내기에 의해서 올라간 것이다.
 
“알고 보니 선배들도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노력들을 많이 했더라고. 조기축구 모임이나 산악회 같은 것도 하고. KBS 별관 앞 아카라 공원에서 몇 시에 모여라 그러면, 그럴 때마다 ‘새작(프락치)’라고 하는데, 누가 가서 회사에 고자질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일을 안 줘서 떠나게 하거나, 때론 좋은 곳에 경비 같은 걸로 취직시키기도 하고.”
 
‘원풍모방에 있었기에 노조가 뭔지 알았지’ 

▲ 용역회사와 노조간부들이 노사화합을 목적으로 자리를 가졌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문계순 위원장. 그녀는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 '원풍모방'에서 5년간 노동조합 간부로 일한 경험이 보조출연자 노조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동료 선배들로부터 풋내기가 나서는 꼴이 미워서 ‘미친년’이라는 수군거림을 받기도 하고, ‘3개월을 버티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조소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또 누군가는 한국노총의 명의를 도용해서 돈을 뜯어낸다고 신고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가 6년 세월을 묵묵히 걸어올 수 있었던 건, 젊은 시절의 남다른 경력 때문이기도 했다.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 중에서도 전설로 꼽힌다는 바로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내가 17살에 처음 서울에 와서 원풍모방에 다녔어. 결혼할 때까지 10년 넘게 일했는데, 거기서 노조 대의원 3년, 상집간부 2년 했어. 도시산업선교회 활동도 꾸준히 했으니, 노동조합이 뭔지 알고 있었던 거지. 이 일 시작하면서, 우선 마음을 다 비웠고, 모든 걸 내려놓으니까 했지. 우리 선배들도 노동조합을 하고 싶었지만 생계 때문에 안 됐잖아. 나야 (우리) 애들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니까.”
 
보조출연자 중 많은 이들이 IMF 때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이혼하고 PC방이나 만화방, 사우나에서 생활하는 그야말로 방 한 칸 갖지 못한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일당 1-2만원 받고 일하는 노숙자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노조의 중요성을 알아도 쉽게 뭉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였다.
 
산재인정, “보조출연자도 노동자” 판결…줄 잇는 성과
 
“처음 8명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1700명의 조합원이 있어. 우리가 노조를 만들면서 방송국과 1년에 한 번 정식으로 용역계약을 맺는 4개의 용역회사와 단체협약을 했어. 노조비로 용역회사에서 조합원들이 일한 수입의 1%를 지급하게 하고 1,700명 명단을 올렸는데, 그 사람들이 오히려 조합원들에게는 일을 안 줘. 남들은 100, 200만 원 해도 조합원들은 30, 50만 원 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러니 노조비로 들어오는 돈이 50만 원이 채 안 될 때도 많아. 상근자 세 명이 무보수로 일해도 한 달에 200만 원은 드는데, 지금 빚이 3천만 원으로 불었어. 그래도 이제는 다들 인정해줘. 노조가 있어서 10년 동안 오르지 않던 일당 3만 6천원이 4만 3천원까지 올랐다고, 필요하다는 건 다 알지.”
 
노조가 이룬 가장 큰 쾌거는 보조출연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2009년과 2010년 서울중앙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하면서 보조출연자들은 더 이상 계약서상에 ‘사용자’가 아닌 ‘근로자’가 되었다. 또 2012년 9월 13일에는 114일이라는 질긴 싸움 끝에, KBS 각시탈 보조출연자 故 박희석 씨가 처음으로 산재를 인정받음으로써 전국 10만 보조출연자의 산재 적용이 가능해졌다.
 
‘안전하게 일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 받기를’
 
보조출연자가 받는 돈은 일당 4만 3천 원, 24시간을 꼬박 촬영해도 4만 3천 원이다. 시급으로 치면 천 8백 원 꼴로, 최저임금 4천 3백 원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계약서에 버젓이 적혀있던 3만 5천 원의 숙박비도 노조가 생기면서 받게 됐는데, 야간수당, 철야수당까지 바라는 건 언감생심일까?
 
“우리나라 방송국이 한 달 동안 보조출연자들에게 지급하는 금액은 총 15억에서 20억 규모야. 근데 여기에 연장, 야간, 철야수당 같은 건 전혀 없는 거야. 그건 다 어디로 간 거냐? 용역회사에다 물어보니, 자기들도 방송국에서 받지 못 했대. 그래서 방송국을 찾아갔더니 장부까지 보여주면서 지급했다는 거야. 사진을 좀 찍자니까 비밀문서라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게 뭔지 알아? 보여주니까 그런가 보다 한 거지.
 
다른 데 가도 ‘왜 우리가 보출들 돈을 떼어먹냐’면서 오리발이야. 그래서 다시 용역회사 사람 불러놓고 그 동안 밀린 수당 소급적용 하겠다고 했더니, 정말 안 받았(다)고 하는 거야. 결국 방송국에서 송금한 내역과 통장을 복사해서 가져왔는데, 정말 없는 거야. 방송국이 안 준거였어. 그래서 그랬지. 너희도 살려면 우리를 도와라. 방송국 앞에 가서 시위를 할 테니 사람을 보내 달라 했지.
 
나중에 방송국 직원들이 인정하더라고. 줘야 하는 게 맞다. 올 해만 해도 100억 이상 드는데 그 예산 올리면 자기들 잘린다고, 내년에 꼭 해주겠다 하는데, 내년에 되면 사람이 바뀌어 있는 거야. 그럼 무슨 얘긴지 모른다고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3년을 미뤄왔어. 문화권력이 그렇게 지독해. 장자연 사건 때도 그렇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도 그렇고.”
 
노조활동 6년 동안 몸무게가 25kg이나 늘었다. 6년 전 촬영지에서 찍은 사진 속의 늘씬한 모습은 이제 없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이라는 제2의 인생을 넉넉한 품으로 끌어안았던 그 마음으로, 노조가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는 정성을 다해 품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모든 보조출연자들이 안전하게 일 할 수 있고, 또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서 정말 세 끼 밥 잘 먹고 두 다리 쭉 펴고 자는 거, 그거 밖에 없어. 그게 다야. 이런저런 수당과 교통비 등을 다 합치면 일당이 15만 원 정도가 돼. 그러면 우리가 한 달 내내 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 일자리 창출도 되니까 골고루 일할 수 있게 되지 않겠어? 이게 바로 일자리 나눔이고 사회복지로 가는 길이지.”  (이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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