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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먹는지를 관찰하라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18. 잘 먹고 잘 살자  
 
※ 뛰다는 2001년 ‘열린 연극’, ‘자연친화적인 연극’, ‘움직이는 연극’을 표방하며 창단한 극단입니다. 지난해 강원도 화천으로 이주해 20여 명 단원들이 폐교를 재활 공사하여 “시골마을 예술텃밭”이라 이름 짓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자 지역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육고기와 카페인을 끊다
 
이번에는 먹는 것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의 식문화는 몇 번의 변혁기를 거쳤다. 먼저 육고기를 안 먹는 채식을 시작하며 식단이 변하자 입맛이 변하며 식생활 전체가 변화하기 시작했고, 식습관은 생활패턴에도 영향을 미쳐 생활습관까지 변화되었다. 자연히 몸과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런 식으로 변화의 범주가 점차로 넓어지자 삶의 영역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육고기를 먹지 않게 된 계기는 단순히 몸에 맞지 않아서이다.
 
체질 검사를 한 결과 나에게 육고기는 해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에 더 확실하게 인식된-몸이 고기를 소화하지 못해 아토피 증상이 일어나고 장이 힘들어하며 몸의 일부에 두드러기 증상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등-몸의 신호를 점점 잘 인지하게 되었지만 워낙 육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이라 채식에 대한 의지는 마음 저편에서 희미하게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께 체질 운운 하며 가정의 식탁을 변화시켜보자고 제안 했다가 사이비 종교 신자 취급만 받았다. 그래서 그나마 벙끗이라도 하던 입을 굳게 다물고 내 몸의 신호는 무시하며 살고 있었다.  

▲ <뛰다>의 부엌. 채식인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 채식위주의 요리들로 함께 식사를 한다.  가장 오른쪽이 필자 김가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뛰다에는 다행히 채식을 하는 분들이 몇 계셨고, 채식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채식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그 후로는 점차 자연스럽게 몸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선별해 먹게 되었다.
 
건강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던 나였지만, 체력이 하루 일과를 다 견디지 못하여 이른바 당을 보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간식 섭취를 게을리 하지 않아 과거의 병력이었던 초콜릿과 카페인 중독에 또다시 빠져들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밥 먹듯이, 밥보다 더 많이 섭취하며 에너지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당분과 카페인과의 인연의 끝은 이러하다.
 
지난 봄, 밀려오는 춘곤증과 체력 고갈을 이겨내고 연습을 하고픈 의욕에 평소처럼 커피와 초콜릿을 흡입하며 카페인의 힘으로 체력을 연장시키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생각해도 심할 정도로 카페인을 과다 복용했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마치 마약 중독자의 최후처럼 탈진과 온몸의 경련을 동반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탈수 증상과 위와 장의 격렬한 저항운동을 겪은 후에 이어지는 완전 연소의 상태를 몇 번 거치고 나니 그 시점 이후로 몸이 새로 세팅이 된 것 같았다.
 
그 다음날에는 물만 마셔도 물이 지금 몸 안의 어느 기관을 거쳐서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몸이 음식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스스로 입맛을 바꾸다
 
그 이후 나의 식문화에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채식을 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의 식문화 변화를 설명 하자면 좀 길다. 그래도 이것이 나의 역사인지라 달리 말할 방도를 찾기 어려움을 양해해주시길.)
 
고기 요리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잘 먹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었다. 시간과 체력만 허락한다면 거의 매일이라도 술과 푸짐한 안주로 야식을 즐겼고,  때가 되면 귀가 멍멍할 정도의 매운 음식으로 회포를 풀었다. 눈꺼풀이 무거운 아침이면 에스프레소와 다크 초콜릿으로 잠을 깼고, 뻐꾸기시계처럼 거의 매 시간 마다 달달한 간식으로 당을 채우던 나였다.
 
이러한 나의 식문화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건 나의 몸이었다. 몸은 나에게 꾸준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몸이 좀 불편하거나 다른 이유 때문에 아픈 것이라는 생각에 그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신호를 무시했다.
 
이렇게 경고만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내 위와 장은 몸 안의 모든 기관들과 합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 내 몸은 어떤 의지를 부려도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은 더 이상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사실 나의 식문화 혁명은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그리고 치밀하게 몸이 스스로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나를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변화시켰다.
 
이제 에스프레소는 이름만 들어도 잠이 깨는 것 같고, 실제로 졸릴 때 커피 향기에만 의지해 보기도 했다. 식후에 물 대신 마시던 믹스커피는 정말 다급하게 카페인을 투여해야 하는 경우에만 믹스와 물의 비율을 1 : 2.5 정도로 섞어서 커피 맛이 나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는다. 더 신기한건 그래도 충분히 잠이 깬다는 것이다.
 
초코렛이나 과자 같은 인스턴트 간식의 달달함과 짭조름하고 매콤함은 특별한 경우에만 선심을 쓰듯 허용하게 되었다. 요즘은 농담으로 “나 오늘 작정했어.”라고 외치는 날(그나마도 아주 가끔)이면 콜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를 밤늦게 까지 마음껏 먹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물론 그렇게 달던 술들은 작정하고 많이 마시면 한 모금이 최대치가 되었다.
 
맵고 짠 음식에 길들여져 있고 매운 음식은 확실히 매운 것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요즘은 조미료는 물론 양념을 거의 안한 재료 고유의 맛을 탐닉하게 되었다. 이제는 매운 음식도 위와 장이 아파서 거의 못 먹게 되어 심지어 비빔냉면의 탐스런 빨간색 양념은 상징적인 장식 정도로만 넣고 거기에 물을 충분히 섞어 먹어도 매워한다.
 
먹는 대로 살아진다
 

▲ <뛰다>에서 함께 심고 가꾸는 텃밭.  
 
뛰다에 온 이후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 어린이 형 인간이 되어버려 밤 10시만 넘으면 졸려서 해롱거리는데다가 혹시라도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배가 고파지면 물만으로도 허기가 달래지니 30년 가까이 나는 절대로 야행성이라고 믿고 살았던, 나의 역사와 함께해온 야식 문화는 자연히 전래동화 같은 남 얘기가 되었다.
 
때가 되면 고기를 먹어줘야 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섭취해 줘야 했던 그 맛있는 햄버거나 피자, 감자튀김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패스트푸드와 음식 역사상 최고 발명품이라 여기는 라면을 필두로 한 지상의 모든 인스턴트식품들.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자극적인 음식들도 그것을 막상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음식이 내 몸에 들어와 어떤 작용을 하고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가 맛있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떠오르게 된다.
 
사실 그 생각들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으면서 이러면서까지 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구차하고 귀찮아서 그 음식들에 대한 식욕이 떨어지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두 개 먹을 것을 하나만 먹게 되고 이제는 웬만하면 찾지 않게 되었다. (장황히 늘어놓고 나니 마치 금연 성공기를 적어놓은 것 같다. 쩝)
 
때로는 음식에 너무 예민해지는 것에 피곤해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서로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해결되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요즘은 음식이란 먹게 되면 먹고, 안 먹히면 안 먹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제는 몸이 알아서 잘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정말로 건강하다는 것은 섬세한 몸의 감각들과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는 마음이 함께 하는 상태인 것 같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으니까 이왕이면 잘 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먹을거리를 택하고 싶다. 먹는 대로 살아지니까. 내가 먹은 음식은 나를 만들고 내가 음식을 택하는 과정에서 부터 실제로 먹는 순간까지의 내 인식의 흐름과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의 나의 상태 등이 음식의 구성 성분들과 함께 몸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몸은 정직하다. 내가 몸에게 하는 대로 몸은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현재 그 자체가 나라고 생각한다.
 
음식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그로인해 내가 나를 스스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믿게 해준다. 육고기를 안 먹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변화에 대한 나 자신의 의지를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하고 싶은 무언가를 자의에 의해 하지 않으려고 참고 견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고기에 대한 식욕을 넘기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른 종류의 음식들뿐만 아니라 이겨내고 싶은 다른 욕구들을 해소 하는 것에도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습관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게 되었다.
 
점점 나의 습관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나를 좀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변화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원인 분석부터 개선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훈련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어떠한지 더 잘 알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먹는지를 관찰하라. 그리고 변화하고 싶다면 입맛을 바꿔라-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먹는 입맛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의식적으로 몸에 맞추는 입맛으로.  (김가윤 / 극단 뛰다 배우)

※ 뛰다의 “시골마을 예술텃밭” 카페  cafe.naver.com/tu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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