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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 있는 밭은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킬까?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1월 한 달 놀고 2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 K. 그 일이라는 게 밭작물을 키우는 것이어서 3월 중순까지는 그런대로 한갓졌는데, 그 이후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면서는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다. 아침형 인간인 나와는 반대여서 밤에 오히려 생생해지고 기운 나는 사람이, 요즘은 저녁을 먹고 나면 영 맥을 못 춘다. 방금 전에 엎드려서 책을 펼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졸기 일쑤.
 
내 예상을 비껴간 K의 결정     
 
그런 K를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흐뭇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애당초 시골생활에 큰 뜻이 없던 그가, 심지어 텃밭 수준의 농사도 한 발자국 뒤에서 관망하며 내가 해달라는 것만 하던 그가 이제는 조금씩 농부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다.
 
평생 땅과 관계해 온 진짜 농부 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어쨌든 내가 볼 때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특히 직업상 하는 밭일과는 별도로 4월 초부터 따로 4백여 평의 밭을 무상으로 임대받아 일구기 시작하면서는, 그가 자기의 일상에 농사를 끌어들이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함께 일하는 분이 앞마을 할머니네 빈 밭에 농사를 지어볼 생각이 있으면 자기가 소개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K가 내게 전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내심 반갑기는 했으나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K는 게으르진 않지만 그렇다고 몸 쓰는 일을 즐기며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농사란, 나의 일천한 생각과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부분에 신경 쓰기보다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고 작은 것을 챙기는 섬세함 못지않게 때에 맞춰 일을 해 나가는 추진력이 필요한데, K는 정확히 전자의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내가 볼 때는 농사와 그다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작은 규모일지언정 텃밭 경험이 있는 내가 그 밭을 맡아 관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솔직히 K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 욕심이 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농사 한번 제대로 지어볼 기회가 오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묵묵히 결정권을 그에게 넘겼다. K는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괜히 내가 나서서 밭을 임대받으면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질까 걱정스러웠던 탓이다. 돈 벌러 서울도 다녀야 하고 이곳저곳 바람도 쐬러 가야 하는데 4백 평이면 너무 벅차지 않을까, 뭐 이런 철없는 계산이 앞섰던 듯.
 
말하자면 나는 나대로 게으름과 방랑벽을 포기 못하고 꼼수를 부린 것인데, 그로부터 며칠 후 K는 자기가 그 밭을 맡아서 해보겠노라고 결정을 내렸다. 나의 예상을 빗나간 그의 결정이 진심으로 놀랍고 고마웠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도망 갈 구멍 파느라 결정권을 넘긴 나 자신이 그 순간 조금 비겁하게 여겨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망 좋고 운치 있는 밭    
 
그런데 놀랍고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농사 일로 스트레스 받아서 나한테 짜증내면 어쩌나 하는 괜한 노파심과 지레짐작까지, 어느새 내 속에서 불안이 꿈틀거리며 활개를 친 탓이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는, 며칠 후 퇴근길에 밭 임자와 함께 4백 평 땅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선 '그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렇다고 그의 결정이 번복되길 바란 것도 아니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 간사한 마음과 씨름을 하고 있던 셈이다.
 
한 시간 남짓 흘렀을까. 마침내 K가 집에 왔고,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를 재빨리 살피는 내게 그는 단지 '그곳 전망이 참 좋더라'고만 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조금은 들뜬 어조로 '밭 가운데 매화나무가 많아서 운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농사지을 각오를 하고 밭을 보고 왔으면 규모가 어떻다든가 토질은 어떻고 뭘 심으면 좋겠다든가 이런 얘길 해야 '정상'일 텐데 뜬금없게도 매화나무며 전망이라니.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나는 그 순간 의심과 걱정과 불안으로 어지럽던 속내가 차분하게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서 한 발자국 비껴난 말을 하고 있는 그이 앞에서, 나는 비로소 쓸데없이 무겁고 심각해진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할까.
 
또한 나는 K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이 집을 처음 보던 날의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파란 나무대문과 수돗가를 뒤덮은 포도나무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를. 묵은 재가 뽀얗게 쌓여 있던 아궁이에 이유 없이 시선이 머물고 마음이 갔던 것을. 이성을 앞세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것이 때로는 진심에 더 가까울 수 있음을, 그럴 때는 그 진심을 그대로 받아주는 게 최선임을.
 
그날 밤 우리 둘은, 논밭 너머 멀리로 지리산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고개를 들면 백암산을 이룬 바위들이 손에 잡힐 듯한 그 밭의 전망에 대해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고고한 자태와 아찔한 향기로 계절을 홀리는 매화나무를 찬양한 뒤, 4백 평이면 좀 벅차기는 하겠지만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 밭은 K 당신이 전적으로 맡는 거다, 나는 시간과 체력이 될 때 도와주는 역할만 할 거다'라고 말함으로써 또 한 번 도망갈 굴을 팠으나, 이미 기분이 한껏 고무돼 있던 K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에 취하고 꽃잎에 깨어나다    
 
그날 이후 며칠에 걸쳐 K는 우선 그 밭 전부를 뒤덮고 있던 비닐을 걷어야 했고, 주말에는 나도 그를 따라가 일을 도왔다. 하필이면 기록적인 꽃샘추위가 찾아와 바람이 한겨울 눈보라처럼 매섭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백암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는데 숨이 찼다. 전망이야 좋겠지만 숨쉬기도 힘이 들어 당최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서 나선 지 30분이 조금 안 되었을까. 드디어 나는 밭에 당도했다. 앞서 온 K가 밭 가운데 쪼그려 앉아 땅에 파묻힌 검은 비닐을 헤집어 내는 게, 그때마다 메마른 땅에서 일어난 먼지가 성마른 바람을 따라 우우 몰려다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매화나무. 과연 그곳엔 열 그루 남짓 되는 매화나무가 밭 중간에 열을 지어 있고, 순백색과 연분홍으로 난만한 꽃들의 향기는 지극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비와 바람과 햇살에 삭아 조각조각 찢기고 뜯겨나가는 비닐에 화가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코입이 서걱거릴 만큼 흙먼지가 심해서였는지 나는 매화나무를 예찬하고 감상하는 대신 "제아무리 매화가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야. 그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진 못할망정 먼지투성이가 돼 버렸으니" 하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K와 나는 잠시 목을 축일 겸 밭 한구석에 놓인 작은 철제의자에 앉아 물을 마셨다. 3분의 1 정도나 끝냈을까. 도대체 며칠을 더 이 고생을 해야 비닐을 다 걷어내고 밭을 새로 갈 수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려 하는 찰나에 매화 꽃잎이 일시에 흩날리면서 말 그대로 꽃비가 되어 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 매화다."
 
한숨을 내쉬듯 속삭이는 내 말에 K가 웃으며 응답했다.
 
"것봐요. 좋지."
"그러네. 정말 좋네요. 전망도 멋지고." 
 
그곳에 앉아 쉬는 동안 우리는 매실이 열리면 주인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해 그것을 조금 따자는 둥, 그 매실로 술을 담가서 이 밭에서 일할 때마다 가져와 나무 아래서 한 잔씩 마시자는 둥 한담을 나눴다.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그때마다 예외 없이 흙먼지가 소용돌이처럼 나를 덮쳤지만, 그것은 내가 매화의 색과 향에 깊이 빠져드는 걸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닥치고 지켜보는 게 나의 일  
 
마침내 비닐을 다 걷고 새로 밭을 갈아놓은 지금. 꽃샘추위는 완전히 물러났고 하루가 다르게 햇살이 뜨거워지고 있다. 바람이 불면 이제 매화꽃이 지는 대신 백암산 골짜기에서 소쩍새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와 더불어 우리도 점점 현실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바야흐로 땅콩과 고추와 고구마와 검은콩 등등을 심어야 하는 때이니까. 농사는 때를 놓치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마니까. 그리하여 K는 저녁 퇴근길에 밭에 들렀다 오는가 하면 주말에도 그에 들러붙어 사느라 바쁘고, 나는 나대로 그간 벌여놓은 일을 진행하고 집 안팎 텃밭을 간수하느라 바쁘다.

 삶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그러나 함께 커간다. 새로 얻은 밭이 우리 둘을 어떻게 성장시킬지 궁금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     © 자야 
 
틈틈이 K를 따라 그 밭에 가서 거들기야 하겠지만 자주 들여다볼 생각은 없다. 더군다나 이제는 그가 4백 평이나 되는 밭을 잘 관리할까 어쩔까 하는 걱정도 전만큼 심하지는 않다. 진즉 도망 갈 구멍을 파 놓았으니 내가 할 일은 그저 믿고 맡기는 게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닥치고 지켜보다가 그가 나를 꼭 필요로 할 때만 가서 도와주는 게 내가 할 일 아니겠는가.
 
그래야만 K가 진정한 농부로 성장할 수 있을 것, 이라는 말은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내 성격상 닥치고 지켜보는 건 참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걸 잘 하는 것이 현재 내가 클 수 있는 비결인 동시에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법이라 하면 이해가 될는지.
 
올 한해가 저물 즈음 어느 날, 그 밭 매화나무 열매로 담근 술을 앞두고 각자의 속 깊은 성장기를 들으며 후일담을 나눌 생각에 나는 벌써부터 설레고 들뜬다. 기대와 다르게 서로를 원망하며 울고불고 싸운대도 뭐 나쁘진 않으리라. 그 또한 우리에게 꼭 필요해서 일어나는 것일 테고, 어쨌든 다 성장을 위한 과정일 테니까.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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