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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일흔이 넘은 엄마가 꾸는 꿈을 지지한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4. 28. 07:30

“하고 싶은 걸, 어쩜 그렇게 다하며 사니?”
[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엄마 이야기 
 
며칠 동안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없다. 삼사 일에 한 번은 잊지 않고 전화를 하는 어머니한테 연락이 없다면, 뭔가 재미있는 일로 바쁜 것이 분명하다. 우리 엄마는 자녀들로부터 전화가 올 때만 기다리는 답답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럴 때 내가 먼저 전화를 하면 무척 행복해 하신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다.
 
어머니는 내 전화에 큰 반가움을 표시하며, 그 사이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묻는다.
 
“네가 올 해 몇이지?”
“마흔 여섯!”
“아유!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그 나이 때는…”
 
요즘 들어, 어머니는 부쩍 내게 나이를 물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 당신의 그 나이 때를 회상하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오늘도 그랬다.
 
방송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직장에서 강제 해고된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건, 옛날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말단이긴 했어도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었다. 그가 지방 행정공무원으로 18년 간 몸 담아온 직장에서 쫓겨난 건, 1980년 전두환이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였다.
 
당시 난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내 위로 중학교 3학년생인 언니와 아래로도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아버지가 이후에 다른 일들을 모색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모두 운이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 주도로 부모님이 식료품 가게를 시작하기 전, 4년 동안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가사도우미’를 해서 번,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엄혹한 세월을 모두들 크게 다치지 않고 넘었는지 놀랄 때가 있다. 그 땐 정말 가난했고 힘들었겠구나! 라고 지금에야 생각하는 것이지, 당시에는 얼마나 힘든지 잘 몰랐다. 여전히 철없는 아이들은 저녁마다 깔깔거리며 떠들었다.
 
절망적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부모님 덕분이었다. 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해직은 가족들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부모님이 합심해서 벌인 장사에 성공하면서,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을 때보다 경제 형편이 훨씬 좋아진 것은 참 다행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운영하신 가게는 두 분만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신 두 분은 직원도 두지 않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시며 힘들게 아이들을 키웠다.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함께 고생을 많이 했지만, 어머니의 보조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때는 해직된 아버지보다 고생하는 어머니가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버지의 해직으로, 어머니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업주부로 살지 못한 어머니를 오랫동안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지난 어머니의 인생을 돌아보면,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불행이 아니라 그녀에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다. 이런 성격을 일 속에서 충분히 발휘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만약, 가정주부로만 평생 살았다면, 어머니는 능력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특히, 일은 어머니를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회생활을 통해 그녀는 세상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고, 독립심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의 생각은 젊고 밝다. 그래서 세상에 꼭 나쁜 일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여성이 발휘한 실력이라야, 그저 다섯 남매를 공부시키고 출가시키는 정도가 다였지만,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펼쳤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어머니는 당신 인생에 늘 만족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연세 때문일까? 그런 어머니가 부쩍 아쉬움을 표현하는 일이 늘었다. 오늘도 내게 나이를 물으며 이렇게 말씀을 이었다.
 
“내가 그 나이 때는 일을 엄청 할 때였어! 그 세월이 다 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쩜 그렇게 하고 싶은 걸 다하면서 사니?”
 
나는 그 말의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아, 다소 주저하며 물었다.
 
“왜, 엄마?”
“부러워서…”
 
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가 성차별이 덜한 시대에 태어나 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면, 그녀의 능력을 더 크게 펼쳤을 것이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어머니 속에서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모습을 본다.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거나, 그랬더라도 충분히 펼쳐보지 못한 어머니들!
 
하지만 지금이라고 늦은 건 아니리라. 이제서야 오로지 자신한테 집중할 수 있게 된 어머니는 일흔이 넘어 수영을 배워, 지금은 접영도 척척 하신다. 또 지난 가을부터는 컴퓨터와 영어도 배우기 시작하셨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큰 딸네 집에서 혼자 돌아온 것이 어머니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음에는 미국도 가겠다, 유럽여행도 하겠다, 계획이 많으시다.
 
물론 계획대로 다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을 꾸는 엄마가 좋다. 그 꿈을 지지한다. 그렇게 엄마가 꿈을 향한 걸음을 계속할 수 있길 바란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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