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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맞는 삶’을 찾은 거, 그걸로 충분해요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두 여자의 귀촌 이후… (자정)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봄, 꽃망울이 툭툭 터져 오르는 봄꽃을 따라 고불고불한 언덕을 넘고 또 넘어 외딴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집은 그녀(이랑 엄마, 49세)의 손길이 가득 배어 있었다. 작은 도자기 인형들과 모빌은 요정들이 사는 곳처럼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루에 2시간 이상 사람을 만나면 힘겹다는 그녀는 예상과 달리 인터뷰 내내 웃음을 가득 보여줬다. 낯선 이와의 약속으로 내내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편안하고 아늑하게 나를 맞이했다. 그 모습이 ‘아, 내가 생각한 귀촌이 이런 모습이었지…’라는 생각과 함께 귀촌 생활에 힘을 잃었던 나를 흔들어 깨웠다.


▶ 외딴 시골 마을, 꽃나무 아래에서 고양이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 ⓒ촬영: 자정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일다>에 연재되었던 웹툰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녹색평론>을 읽고 귀촌의 꿈을 키우던 나는 우연히 그녀의 만화를 접하게 됐고, 귀촌한 뒤에도 그녀의 만화를 읽으며 길고 긴 시골 밤을 보내곤 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나도 이제는 8년 차 귀촌인이 되어 시골 생활에 대해 어떤 설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 정도다.


그녀는 9년 전 친구와 함께 귀촌했다.(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는 친구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고향은 서울이고, 어릴 적 방학 때마다 시골에 놀러 가면 별일 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이 좋았다고 한다. 소극적인 그녀는 ‘시골에 살면 사람들이 별로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로망이 있어 귀촌을 결심했지만, 막상 시골에 와보니 서울보다 더 사생활이 고스란히 공개됐다고 했다. 기대와는 다른 삶이어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 내 앞에 앉아 웃는 그녀의 삶은 무척 단단하고 반짝여 보였다. 그 이유가 뭘까?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고 있지만, 시골에서 무일푼의 두 여성이 빈집에 정착하며 우여곡절을 거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녀를 인터뷰했다.


시골살이의 장점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평소에 어떻게 지내세요?


“6살 아이를 키우고 있고, 집에서 먹는 것들은 농사지어요. 생강 농사는 많이 지어서 돈이 되긴 하는데, 많은 돈은 못 벌어요. 딸이랑 재미 삼아 그림을 그리고요.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내 집에 건다 하면 엄청난 노동을 해야 그림 값에 해당하는 돈을 벌잖아요. 근데 그냥 내가 그려서 걸면 되니까…. 바라보면 행복하고 좋아요. 같이 내려왔던 친구하고는 2년 정도 살다가 각자 결혼해서 동네에 살고요, 둘 다 애도 있고 해서 매일 만나요.”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시나요? 좋은 점, 힘든 점은 뭐가 있을까요?


“농촌에 살면서 좋은 건,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정해준 대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고요. 공기도 좋고,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좋고, 너무 부지런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아요. 다만 마을에 있으면 사람들이 아무 때고 문을 열고 들어와 ‘뭐하냐?’ 그러시고, 아무 때나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죠. 도시에선 누가 갑자기 내 집 마당에 불쑥 들어오진 않잖아요. 일단 대문 밖에서 벨을 누르면 누군지 확인하고 문을 열어 사람을 맞이하잖아요. 여기선 그게 아니라 화장실 갔다가 나왔는데 갑자기 마당에 누가 서 있기도 해요. 하지만 좋은 것만 취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내가 좋은 걸 취하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느낌, 저도 살면서 많이 받아요.


“요령이 점점 생겨요. 지금은 여자끼리 살 때보다는 남편이 있으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함부로 잘 안 오시는 경향이 있고, 애가 있으니까 누가 와도 그 뒤에 숨을 수가 있어요. 보호막이 생기는 느낌이랄까. 내가 어색해도 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어떻게든 화기애애하게 흘러가서 긴장을 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만화작가의 집은 곳곳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재미있는 그림들이 배치되어 있다. ⓒ촬영: 자정


비혼여성의 농촌 생존법 ‘복장 내려놓기’


-결혼 전, 여자들끼리 살 때 프라이버시나 안전은 어땠나요?


“시골엔 결혼 안 한 남자들이 많으니까 우리에게 관심 갖고 한 번씩 와서 보고 가려고 했어요. 시골 생활이 그렇잖아요. 누가 뭐 하는지 다 알게 되니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요. 일부러 예의를 지나치게 지키면서 선을 지켰죠. 마을 아주머니, 할머니들하고 친해지게 되면서 아저씨들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아저씨들도 마을에서 입지가 있는 거니깐. 근데 이렇게 관계망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많이 힘들죠. 어떻게 생각하면 큰 탈 없이 여태까지 살아온 건 운이 좋았던 거라 생각해요. 세상에 나쁜 일도 되게 많으니까. 주변 분들이 많이 지켜주신 거라 생각해요.”


-관계에 안전망이 있었던 거네요? 농촌에 사는 비혼여성들은 안전함을 얻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죠. 성추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성희롱은 비일비재하죠. 친구의 경우에는 동네 아저씨가 자꾸 전화해서 노래 불러 달라고 했던 적도 있어요. 그리고 ‘내가 조카가 있는데 정말 괜찮은데 술만 안 먹으면 괜찮은데’라며 짝지어주려는 사람도 많았고요. 일단 나를 지키는 게 중요한 일이니깐. 나의 사생활과 시간을 내어주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관계망을 지키고 유지해야 하는 것 같아요. 비혼여성이 시골에 있으면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거든요. 옷차림이 튀면 더 그렇고요.”


-저도 시골에 처음 내려왔을 때 복장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나름대로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친구와 저도 완전 할머니로 탈바꿈했어요. (웃음) 동네 장에 나가서 할머니들이 산 옷을 우리도 사 가지고 바로 장착했었죠. 눈에 띄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에 띄면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어디 가냐’, ‘그렇게 입고 무슨 농사를 짓나’ 하시는데, 그 질문들이 듣기 싫고 마음을 힘들게 하니까 바꿨어요. ‘여기 사람들 속에 완전히 묻혀야겠다’ 싶었죠.”


-저는 아직도 복장을 못 내려놨어요. (웃음)


“근데 그거 내려놓기 어려워요. 가끔 서울 가면 친구들이 깜짝깜짝 놀래요. 명색이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마지막 ‘미감’이라는 게 있는데… (웃음) 내가 보기에 싫은데, 그런 마음이 있긴 해요. 그래도 일단 묻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눈에 띄면 한 번이라도 쳐다보는데 그 시선이 즐겁지 않으니까 나를 바꾼 거죠. 내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는 게 아니니까 ‘그래 좋아, 껍질 하나 바꿔주지.’ 그런 거죠. 사람들은 서로서로 부딪히면서 나만 깨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도 깨지고 달라져요, 조금씩. 내가 더 불편한 상황이니 내가 바꿀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귀촌의 조건 ‘동지가 필요해!’


-만화 읽으면서 여자 둘이 시골에 와서 사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데요. 농촌 생활에 파트너가 꼭 필요할까요?


“여자들끼리 살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부분이 많고, 대화도 할 수 있어 좋아요. 누가 갑자기 찾아오거나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둘이 똑같은 걸 느끼잖아요. 그 사람이 가고 난 다음에도 ‘야 진짜 힘들었지 않냐?’ 얘기도 하고, 의논도 하고, 단 거 먹으면서 풀기도 한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혼자 있을 때보다 친구가 있으면 훨씬 낫죠.


인간은 혼자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디에서 살아도 누구하고라도 같이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나 강아지라도요. 사람은 같이 살아야 덜 이상해져요. 너무 혼자 계속 있으면 ‘인간’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통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요. 저는 혼자 있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해요. 동지가 있어야죠. 소소한 것을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라도. 오늘 뭐 밭에 나갔더니 개구리가 일찍 나왔다는 둥 밥은 뭐랑 먹자는 둥 사소한 얘기들 있잖아요.”


-친구와 살 때랑 남편과 살 때랑 다른 점이나 변화한 것이 있을까요?


“친구랑 살 때는 편했죠. (웃음) 친구랑 살 때는 동지랑 같이 사는 느낌이었고, 남편이랑 같이 사는 건 적과 함께 사는 느낌이에요. 지혜와 내공이 필요하죠. 누구랑 함께하든 한 인간은 부족한 것이 있잖아요. 친구는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말이 통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데, 적과는 투쟁을 해야 그걸 이해시킬 수가 있어요. 물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고요.


남자랑 살아서 좋은 점은 시골 생활에서 방패막이 돼 준다는 점 같아요. 그리고 남자가 있으면 누구든 함부로 집에 잘 안 들어와요. 시골 분들은 옛날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단 결혼한 사람이면 경계를 지키거든요. 남편의 몇 안 되는 유용한 점 중 하나죠.”


-비혼으로 귀촌할 생각이 있는 여성들에게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적인 일에서든 정신적으로든. 왜냐하면 시골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결속이 이미 되어 있잖아요. 여러 세대에 걸쳐 서로를 ‘저 사람은 안전한 사람’이라고 확인했어요. 근데 그들에게 우리는 이방인이잖아요. 우리가 안전한 사람인지 알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기 전까지는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함께해야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어요. 근데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거든요. 오해도 생길 수도 있고, 마음이 많이 상할 수 있어요. 그러는 동안 나를 정신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지켜줄 힘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동지가 필요해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러 가면서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세상이 나를 받아주겠지.’ 이건 절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비관주의적인 사람이고, 인생을 장밋빛으로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서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곤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 때도 많았어요.”


▶ 집 아궁이에서 구웠다는 작은 도자기 인형과 모빌들이 그녀가 사는 공간을 요정이 사는 곳처럼 아름답게 만든다. ⓒ촬영: 자정


자연과 인간, 세상과 내가 연결된 느낌이에요


-귀농하고 나서 달라진 삶의 변화나 차이가 있을까요?


“귀농하기 전에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어요. 나와 세상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귀농하고 나서 나와 세상이 정말 많이 연결돼 있구나, 알게 됐어요. 도시에서 밥을 먹을 땐 포장지 뜯어서 식품을 먹는 그런 건데, 시골에서는 밥이 되기까지 전 과정을 보게 되잖아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세상을 함부로 살 수 없는 느낌이에요. 모든 것과 내가 연결돼 있는 느낌. 나를 둘러싼 자연과 인간들이 연결된 그런 느낌이 농사 지으니깐 많이 들어요. 혼자만의 시간은 점점 줄어든 대신 더 달콤해진 것 같아요. 뭘 해야 하지? 그러면서.”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요?


“저는 이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요. 많이 벗어나지 않고. 요새는 별로 불만이 없어요. 일단 여기가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애 키우기도 좋고, 마음도 편안해요. 주변 이웃들과도 친숙해졌고요. 저는 익숙한 게 좋거든요. 매일 보는 사람이 좋고, 매일 보는 풍경이 좋고. 모험을 찾고 새로운 걸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이게 나한테 맞는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조용히 살다 늙어 죽는 거, 그게 계획이자 꿈인 거죠. 야망 차죠.”


단단한 삶을 꾸리는 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얘기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가 어떻게 그 운을 빚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집 아궁이에서 구웠다는 옹근 표정의 도자기 인형과 마주했을 때 느낌과 하얀 꽃잎이 휘날리는 마당에서 본 반짝임, 그리고 돌아올 때 선물로 밭은 쪽파의 흙내가 모두 그녀를 닮아있는 듯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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