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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 사진계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여성들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프로젝트팀 ‘유토피아’를 만나다



지난 2월 어느 여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사진 속의 휴대폰 케이스에는 ‘Girls Can Do Anything’(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문구에 반발한 일부 사람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그 일은 곧 하나의 큰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은 많은 여성들에게 충격을 던져줬는데, 그 이유는 일부 남성들의 이해할 수 없는 격한 반응 때문이었다. 단지 말 그대로 ‘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구가 그렇게 화를 내면서 흥분할 일인가? 

▶ 유토피아 이미지 (출처: 유토피아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2017utopiaproject)


페미니스트 사진작가들이 모인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유토피아는 ‘Girls Can Do Anything’라는 말에 유독 사연이 깊다. 그로 인해 우리의 만남이 무산될 뻔(?) 했는데, 인터뷰에서 자초지종을 밝히겠다. 어쨌든 지난 일요일 오후,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유토피아의 멤버 박이현, 김지혜 작가를 만났다.


“사진계는 정말 여성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유토피아는 현재 8명의 멤버가 있는 페미니스트 사진작가 모임으로, 대부분 학생이다. 모임은 2017년 봄에 만들어졌고, 이후 SNS 계정으로 사진을 올리면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알리기 시작했다.


박이현: “처음 이런 모임 만들자는 이야기는 예인이가 먼저 꺼낸 것 같아요. ‘사진계 너무 빻았다, 문제가 많은데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여성작가, 페미니스트 너무 없다’ 이런 말들을 저랑 지혜, 예인, 재인 4명이서 나누다가 ‘그냥 우리가 만들까?’ 하게 된 거죠.”


김지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모임이 너무 절실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우리가 만든 거에요. 처음에는 11명이었는데 활동하다가 조금 지쳐서 그만둔 분도 있고 해서 지금은 8명이에요.”


사진계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그렇게 여성작가들의 모임이 절실했을까.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두 사람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요지는 “사진계가 너무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이다.



▶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유토피아 멤버들의 작업 사진


김지혜: “사진을 본업으로 하려면 아무래도 장비가 중요한데, 그런 장비를 여성들은 들기 힘들다는 편견이 있어요. 사진학과 다니는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학교에서도 ‘여자 애들은 어차피 필드 나갈 거 아니고 디자인이나 보정 그런 쪽으로 빠질 거니까 대충 하라는 식’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누굴 밀어주는지 뻔하죠. 한번은 어떤 스튜디오에서 들어오겠냐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는데, 작가 12명 중에 1명만 여성이라고 하더라구요. 어떤 분위기일지 예상돼서 안 갔어요.”


장비를 들지 못한다는 편견은 소위 ‘여성적 장비, 여성적 카메라’에 대한 편견으로도 이어진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동아리나 모임에 나가면 ‘여자들은 작고 귀여운 거 좋아하니까. 미러리스 같은 디카(디지털 카메라) 쓰지 않아?’ 라는 말을 하기 일쑤죠. 요즘은 사실 성능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미러리스를 쓰는 건 여성이고, 남성인 자신이 드는 게 진짜 카메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인 여성은 별로 없지만 모델로 활동하는 여성은 무척 많다는 점이다. 수적으로 많으면 좋은 걸까? 하지만 숫자만 많을 뿐 그들도 사진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박이현: “사진이 취미생활로 인기를 얻으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렇게 시작한사람들, 특히 남성 중에서 ‘예쁜’ 여성모델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사진 동아리 카페 같은데 모델 구인 글도 많이 올라오고, 그렇게 만나서 (성폭력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죠. 그래서 요즘 여성모델 분들 중에 남성작가와 작업하길 선호하지 않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이걸 두고 또 역차별이라고 비난하는 남성들도 있어요.”


김지혜: “미투(#MeToo)로 로타 작가의 성폭력이 폭로되고 지금 조사 중이지만, 그것 말고도 사실 많은 사건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듣거나 그런 폭로 글을 본 경우도 있고요. 사실 예전부터 그런 문제가 지적되어 왔지만 전혀 바뀌지 않았죠. 그리고 로타 작가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사진이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으면서 그런 비슷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뿐, ‘어떤 부분이 문제다, 이런 부분은 윤리적인 면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아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에 내심 충격을 받고 있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힘찬 목소리로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유토피아를 만든 거에요!” 라고 했다. 그 모습이 강인한 전사처럼 보인 게 나의 착각은 아니었을 거다.


‘Girls Can Do Anything’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 의지를 가지고 만든 유토피아지만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이 매끄러웠던 건 아니다.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고자 만든 게 아니라 함께 ‘페미니즘’을 주제로 전시를 하고자 만들었기 때문에 각자의 학업과 생업 속에서 사진 작업을 지속해야 했다. 그런 압박감이 멤버들에게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유토피아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다독였다. 


▶ 유토피아에서 작업한 ‘Girls Can Do Anything’ 사진 ⓒ박이현 작가


그러던 중 지난 2월, ‘Girls Can Do Anything’(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문구로 티셔츠를 제작하고자 뭉친 여성 두 명의 ‘Project 표람’과 협업을 하게 되었다. 유토피아가 홍보 사진을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텀블벅 펀딩이 시작되고 며칠 뒤, 어느 페이스북 페이지에 유토피아가 촬영한 ‘Girls Can Do Anything’ 티셔츠 홍보 사진이 올라왔다. 그 포스팅에는 이 프로젝트와 모델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박이현: “대부분 외모 지적이었어요. ‘못생겼다. 뚱뚱하다. 남자 못 만나겠다’ 류의 악플이었는데 인격모독적인 말들도 있었어요. 해당 페이지를 신고했고, 저희 페북과 트위터 계정을 통해서 같이 신고해 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하루 뒤에 온 답변은 ‘운영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다’더라구요. 오히려 그 쪽에서 우리 페이지를 (가슴이나 성기가 드러나는 사진도 아니었는데) 나체 사진이 있다는 이유로 신고했고, 반나절 만에 우리 페이지가 삭제되었어요.”


기자는 페이스북에서 메시지를 통해 인터뷰 날짜를 조율하고 있던 터라, 갑자기 유토피아 페이지가 사라져버린 건 충격이었다. 일상적 해프닝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 ‘독특한’ 사건을 두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물어보았다.


김지혜: “당연히 충격이었죠. 팀 내 분위기도 좋을 수가 없었어요. 침울했죠. 사실 저희 팀을 안 좋게 말하거나 욕하는 사람들, 특히 남성작가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친하다고 생각했던 오빠가 저를 ‘페미니스트 어쩌고’ 하면서 굉장히 심한 말을 하고 다닌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요. 그런 일에 좀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페이지가 삭제되니까, 1년 동안 쓴 졸업 논문이 불에 탄 느낌? 그런 기분이었어요.”


박이현: “그래도 다행인 건 굉장히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셨어요.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고, 얼마 전에 페이지가 복구되었을 때도 많은 분들이 팔로잉을 해 주셔서 놀랐어요. 이전보다 더 흥행했달까?(웃음) 정말 힘이 많이 되었어요.” 


▶ Feminist Photography Project 유토피아 멤버들의 작업 사진


유토피아가 꿈꾸는 유토피아


소녀는 소녀에 머무르지 않고 더 강한 여성이 되어 돌아온다는 말처럼, 유토피아는 더 단단해졌다. 3월엔 김지혜, 곽예인 작가가 함께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보통의 세계’ 전시를, 홍산 작가도 상수 갤러리카페 <빈칸>에서 ‘몸으로 말해요’ 전시를 진행했다.


다가오는 여름에는 유토피아 팀 전시를 계획 중이다. “멤버들 각자 사진 찍는 취향도 스타일도 다 다르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 같다”고 말하는 유토피아 멤버들. 팀 전시 때는 한참 작업이 진행 중인 ‘100인의 페미니스트’ 전시가 공개될 것이라고 귀띔 해줬다.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슬그머니 물었더니 “퀴어퍼레이드 사진을 찍고 싶어요! 여력이 된다면 그 때 부스도 내고 싶어요! 다른 예술단체랑 콜라보도 하고 싶어요! 사진 관련된 페미니즘 세미나나 강연도 진행해 보고 싶어요!” 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늘어놓는다.


실제로 김지혜 작가는, 전시 위주로 운영 중인 유토피아 말고 ‘스튜디오 바그다드’라는 팀을 하나 더 만들었다. “여성 사진작가들의 네트워킹, 페미니즘 강연 및 세미나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사실 전시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대관비도 비싸고, 카페 <두잉>처럼 페미니즘 전시에 도움을 주는 곳도 많지 않고. 그래서 그 비용을 나누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팀 전시를 하는 것도 있어요.(웃음)” 이렇게 말하며 사진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라는 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 여성 사진가 모임 스튜디오 바그다드(Studio Bagdad) 모집 공고 (출처: facebook.com/StudioBagdad2018)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페미니스트 사진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런 활동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유토피아를 하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물었다.


김지혜: “유토피아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저희 사진에 대해서 의견 및 피드백을 주시는 분들도 있고, 또 ‘페미’ 판에서 저희가 언급될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희망적인 기분인 것 같아요”


박이현: “전 사진에 주로 제 이야기를 담는 편인데, 그런 제 사진을 보고 공감해 주시거나 ‘저도 그랬어요’ 라며 반응해 주시는 걸 보면서 힘을 얻어요.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연대의식이 생기는 거죠.”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만들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난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유토피아를 맛보길 바란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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