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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페미니스트 농민 지도를 만들고 싶어요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농사짓는 페미니스트, 들 (기록: 달리)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무심히 마우스를 클릭하던 어느 날, 모니터 위로 ‘#농촌페미니즘’이 떴다. 우리 단체(문화기획달)가 속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외에 다른 농촌 지역에서도 페미니즘 활동이 벌어진다니, 반갑고도 신기한 마음에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충남 홍성에서 열린 농촌청년여성캠프 참가자들 이야기가 담백하게 실려 있었다.


▶ 올해로 4회를 맞이한 농촌청년여성캠프를 준비하는 사람들.


농촌청년여성캠프는 농촌에 거주하는 젊은 여성들이 모여 ‘농촌에서 젊은 여성으로 사는’ 경험과 문제를 나누고, 서로의 기술을 공유하는 행사다. 캠프가 끝난 후에도 이들은 블로그를 통해 서로의 안부와 소식, 그리고 내밀한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농촌에서 젊은 여성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들이 중심이 되는 모습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누가, 어떻게 이 활동을 가능케 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지난겨울 그 당사자가 산내에 나타났다. 고향인 홍성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 ‘들’이었다. 들 역시 멀리서 문화기획달의 활동을 지켜보며 관심이 많았단다. 짧은 만남이 아쉬워 올해 봄, 들에게 다시 연락했다.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그리고 바깥에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요청에 흔쾌히 응한 들의 뿌리가 있는 그곳 홍성으로 찾아갔다.


나의 뿌리, 유기농업 마을에서 배운 것


아버지의 고향 홍성에서 들도 나고 자랐다. 홍성은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유기농업을 실천하는 지역이자, 수많은 귀농·귀촌인이 모여들어 활발한 마을공동체 활동이 이뤄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들 역시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이웃을 따라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를 다녔다.


“솔직히 고등학교는 그냥 가까워서 다녔고(웃음), 학교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 더 편하기도 했어요. 여기는 이웃 아저씨 아줌마가 다 선생님이고 동네 언니 오빠들이 선배니까요. 고등학교 생활하며 농촌이나 농민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져 전공부(풀무학교 대학 과정의 2년제 교육)에 들어갔어요.”


▶ 홍성 풀무학교를 나온 ‘들’은 농업과 농민과 마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들이 자라며 농업과 관련한 일을 고민하자, 아버지는 농사보다 다른 길을 추천했다. 유기농업에 애정이 있다면, 생계를 보장할 수 있고 농민을 위해 시급한 가공이나 유통업을 하던지 농민운동 조직에서 활동해보라고 조언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땐 다른 길이 잘 안 보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곁에 있는 아빠나 이웃 농민들의 삶이 눈에 밟혔던 것 같아요. 아빠가 유기농업에 대한 애정이 크고 생협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집에 생협 소비자 분들이 자주 놀러 오곤 했어요. 그때 곁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기도 했고, 매번 무 갈아엎고 토마토 버리고 하는 모습을 보며 아빠를 비롯한 이웃 농민들이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데 왜 잘 안 풀리고 늘 어려운지, 그게 어린 저에게도 상처가 됐어요.”


학교를 졸업한 들은 홍성에 남아 마을 기록 활동을 시작했다. 풀무학교 선생님들은 학생이 졸업하면 마을에서 필요한 일을 연결해주곤 했는데, 들이 기록에 관심 있어 하자 선생님의 소개로 풀무학교 생협 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얻게 되었다.


“사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뭘 기록하고 싶은지도 잘 몰랐어요.(웃음) 그냥 앉아 있어 보면 무슨 일이 생기겠지, 하고 책상이랑 의자 하나씩 갖다 놓고 있었는데, 제 이야길 들은 분들이 ‘기록하고 싶다고? 그럼 이 녹취 좀 풀어줄래?’ 그렇게 일감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홍성은 공동체 활동 관련 인프라가 풍부해 외지에서 선진지 견학이나 탐방을 많이 오는 편이다. 그 무렵 관광객이나 탐방객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가이드 수요가 늘어났고, 이를 위해 마을 역사나 단체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실무자와 주민들이 마을의 역사와 지역 현황을 공부하고 체계적인 기록 활동을 함께하기로 했고, 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 당시에는 마을 안에 살며 활동하는 단체에서 벌어지는 일은 해당 조직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홍성에는 여러 단체가 있는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해 지역 단체 ‘실무자 모임’을 꾸리기로 했죠. 마을에 관한 기록을 하면서 누군가는 가이드 역할을 맡고, 기록의 결과물이나 잘 쓰인 영농일지를 전시하거나 발표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실이학교와 마실통신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마실이학교에서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활동을 이슈별로 살펴보고 공부했고, 마실이학교에서 지역 소식을 공유하기 위해 마실통신을 제작했다. 마을 단체의 활동이 함께 새로운 결실을 보고 다시 가지를 뻗어가며 기록 작업은 늘어났고,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이후 마실이학교를 비롯한 마을 단위들이 통합, 재편되어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 ‘마을활력소’가 탄생했다.


“일하는 동안 재미있고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시작할 때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필요하거나 원하는 일을 찾아 했죠. 그리고 마을마다 들어가 어른들을 만나서 그분들의 삶을 직접 듣고 기록하면서 부모 세대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것 같아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면서 내가 평생 살아온 마을과 같이 살아온 이웃에 대한 애정이 더 커졌어요. 그래서 어쩌면 저에게 꼭 필요한 시간 아니었을까 해요.”


▶ 하우스에서 모종을 돌보는 ‘들’ ⓒ촬영: 달리


대도시로 이주, 혼자 사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다


그러나 조직이 재구성되면서 들은 처음 일했을 때와 다른 환경, 다른 구조에 맞닥뜨렸다. 마을에 필요한 일을 찾아 구속 없이 유연하게 활동하다가 ‘조직’에 들어가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했다. 위계가 없던 동료들 위에 새로운 책임자가 생겼고 목표나 틀, 체계를 중시하는 방식의 활동을 펴게 되자 들은 재미를 잃었다. 때마침 부모님도 들에게 이주를 권했다.


“엄마는 제가 여기서 계속 지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거라고 두려워하셨어요. 제가 이곳이 전부인 줄 안다고요. 그때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나가보니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기록을 좀 더 제대로 배워보고 싶기도 해서 서울에 있는 아카이빙 관련 기관에서 일하며 도시 생활을 시작했어요.”


대도시로 진출한 들은 처음으로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했다. 나와 남의 경계, 일과 삶의 분리가 없는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딸’로 정체화된 젊은 여성은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지역 활동을 열심히 하셨고 각자 당신이 속한 조직에 책임자 역할을 맡기도 해 나름 알려진 분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누구의 딸인지 다 아는 상태로 살아가는 게 너무 불편했어요. 내가 행동을 잘못하면 내가 쪽팔린 게 아니라 부모가 쪽팔릴까 봐 신경이 쓰이거든요. 근데 서울에 오니까 누가 뭐라고 해, 내가 연애를 하든 외박을 하든.(웃음)”


하지만 새로운 일터에서의 인턴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1년 넘게 새로운 곳과 일을 경험한 들은 다시 농업과 관련된 일을 찾았다. 결국 가톨릭농민회에 들어가 3년간 일하며 생산관리와 홍보 등의 활동을 했다. 전국 조직에서 가장 ‘막내’였다.


“일하면서 힘들었던 게… 자꾸 의심하게 되는 거예요. 이 길이 맞나? 농업이나 농민조직의 방향이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건가?”


자신이 의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던 들은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내가 죽기 전까지 꼭 필요한 기술이 무얼까’ 생각한 끝에 농사와 마사지, 요리는 할 줄 알아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몸이 힘든 농민을 위한 마사지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들은 일을 그만둔 후 마사지를 배우며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따고 나니까, 학원에서 요즘 피부미용 하나 가지곤 안 된대요.(웃음) 비타민 주사나 링거 같은 것도 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러려면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도 땄어요. 그러고 나서 압구정동에 있는 성형외과 취직해 두 달 동안 수술방에서 일하기도 했죠. 공부했을 땐 틈틈이 알바하며 생활비를 벌었어요. 저는 혼자 사는 게 너무 좋아서 아, 사람들이 혼자 살려고 돈 버는구나 생각했죠.”


그렇게 자유를 선물한 도시 생활은 자취하던 집의 계약이 종료되며 동시에 끝났다.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전까지 잠시 쉬고 다시 나가야지, 하고 홍성에 돌아온 들은 마음을 바꾸었다.


“제일 편한 길은 다시 단체에 들어가는 거였어요. 가면 또 ‘일 잘하는 들이’ 하면서 칭찬받으며 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계속 앞에 닥친 일만 하다 보면 본질을 모른 채 살아갈 것 같더라고요. 내가 추구하는 농업이 뭔지, 맨날 농민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농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직접 농사를 지어보자 결심했죠.”


▶ 고향에 돌아온 들. 직접 농사를 짓기로 했다. ⓒ촬영: 달리


직접 농사를 짓다, 온라인 쇼핑몰을 열다


들은 아버지에게 임대료를 내고 땅을 빌렸다. 아버지와 따로 또 같이 농사를 지으며 농기계 다루는 법과 농사일을 배우기로 했다. 아버지와 자신의 농산물을 팔기 위한 창구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겨울 컴퓨터와 씨름하며 홈페이지 ‘논밭상점’도 직접 만들었다. 기존의 포털사이트나 인터넷 쇼핑몰 오픈마켓만 활용하면 수수료도 많이 나가고 독립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밭상점’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농사만으로 생계를 꾸릴 자신은 아직 없다.


“최근에 농사펀드라는 팀을 알게 됐는데, 아빠랑 거래하며 그쪽에서 계약서를 보내줬어요. 그런데 아빠는 유기농업 38년 만에 계약서라는 걸 처음 받아본다는 거예요. 농민들은 유통업자나 중간업자와 늘 구두로 계약하고, 그러다 나중에 안 받아주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후려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 생계가 달린 일인데 정말 막막하고 이상한 구조죠. 저도 조합에 가입해 출하할 수도 있지만 그게 잘 될지도 미지수고 불안정해서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어요. 지금은 저와 아빠 생산품만 있지만 좀 자리 잡히면 다른 농민들도 연결해서 같이 판매하고 싶어요.”


아버지와 가족이라는 든든한 지원군도 있지만, 들에게는 주변 선배 여성농민의 발자취와 조언 또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 농업사회에서 노년 여성은 노동력을 제공할 뿐 ‘농부’로서의 주체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그 뒤를 잇는 중년 여성농부에 대한 상도 희미하다. 들은 같은 지역에서 허브 농사를 짓는 선배 여성농민과 소통하며 허브 농사도 배우고, 청년 영농정착 지원금이나 농업과 관련한 지원 사업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분이 농사로 혼자 자립한 모습을 보며, 들도 자기만의 비전을 키워가는 중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영농기반 없이 홀로 처음 농사짓고자 하는 여성은 주변에 ‘남성이라는 자원’이 없다면 자립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저는 이미 영농기반이 갖춰진 편이라 혼자 귀농하는 분들과 처지가 좀 달라요. 기반이 없으면 이런저런 일에 의존해야 하니 농사로 자립하기가 어렵죠. 만약 지역에 연고가 전혀 없는 어떤 청년 여성이 귀농한다면 농사기술을 가르쳐줄 사람, 농기계를 빌려줄 사람, 농사 관련 정보에 밝은 사람 등의 도움을 두루 받아야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서 남성 농민이나 주민의 지원이 필요할 때가 많고, 그런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여성도 많은 거죠.”


농사 영역에서도 힘이 없는 여성들끼리 공동 경작하는 사례들도 있지만, 들은 홀로 농사짓고 독립하는 걸 목표로 한다. 과거, 그러니까 도시 생활을 접하기 전과 지금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공익이나 공적인 가치를 추구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왜 개인만 돌보나 싶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활동할 때는 ‘우리’, ‘같이’ 그런 게 옳다고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저 역시 그랬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저는 그런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 힘이 있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 배제되는 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그게 많이 두려웠는데, 밖에 나가보니 그 세상이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배제될까 봐 나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까 꼭 공적인 걸 추구해야 된다거나 지역을 위해서 해야 된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요. 그런 걸 강조하는 사람들도 결국엔 자기 욕망에 의해서 한 일 아닌가 싶어요.”


▶ 밭 옆에 있는 들의 공간.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농사 외의 작업을 한다. ⓒ촬영: 달리


청년여성농민캠프, 서로 만난 것만으로도 힘이 돼


10년 전 마을에 점점이 흩어져 있던 기록과 사람들을 모아냈던 들은 도시에서 돌아오고 나선 ‘마을 밖과의 소통’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그 첫발이 바로 청년여성농민캠프(현 농촌청년여성캠프)다.


처음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의 후계자 양성 사업을 위한 간담회에서 출발했다. 전여농에서 들에게 젊은 여성농민들과의 활동을 제안했고, 들은 친구들을 모아 캠프를 추진했다.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뿐 아니라 농촌에 살고 있거나 살고 싶어 하는 청년 여성들이 관심을 보여 작은 그룹을 이뤘고, 작년에만 세 번을 만났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만난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됐어요. 각자 가진 문제의식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농촌의 성 불평등 문제가 나만 겪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같이 알아차리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을 만나서 내가 아는 세계만 있는 게 아님을 확인하고, 이 사람들과 또 다른 활동이 가능하다, 나 혼자 어려웠던 문제는 여기에서 연대를 통해 풀어볼 수 있겠다, 그런 기대를 하게 됐어요.”


올여름 네 번째 캠프가 열린다. 지금까지는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앞으로는 이들이 모인 동기를 더 구체화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


▶ 올여름 충남 홍성 정다운농장에서 열린 제4회 농촌청년여성캠프 참가자들.


여성들, 청년들이 ‘스스로’ 재밌는 일을 꾸릴 거예요


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농촌과 농민단체 활동을 떠나면서부터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생각을 나눌 만한 사람들을 만났고, 누드 드로잉이나 보지 자수 워크숍, 썬캐처 작업 등 창조적인 활동을 사부작사부작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고향에서 누군가의 딸로 살 때와 다른 풍경들이 보이고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농촌 청년 여성들과 간담회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가 농촌청년 조직에 갔다가 성희롱을 당해 모욕적이었다는 이야길 했어요. 사실 저는 지역에서 그런 기억이 별로 없어요. 우리 가족, 부모님이 여기에 사니까 저에게는 아무래도 막 대하거나 함부로 못 하는 것 같아요. 보호받고 사는 셈이죠. 한편으로는 지나고 나니까 그게 성폭력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일들이 떠오르기도 해요.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넘어간 일이 많은 거죠. 학교 다닐 때 페미니즘 교육이나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한스러울 정도라니까요.(웃음)”


농촌 사회에서 성폭력은 쉬쉬하거나 소문으로 지나가기 십상이다. 들이 홍성에 사는 동안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거나 제대로 처리되는 것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자라며 학교에도 같이 다녔던 여자 동창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집단 성폭행을 당해서 떠났더라 하는 이야기를 최근에야 들었어요. 한창 마을 기록 활동을 했을 때 농촌이나 농부를 선하고 아름답게만 그렸는데, 혹시 거기에 가해자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그런 작업 활동이 조심스러워졌어요.”


여성과 함께 청년 역시 농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마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이슈를 생산하는 사람은 대개 중년 남성들이다. 공익이나 공동체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노동 착취와 ‘열정페이’도 도시와 농촌 별반 다르지 않다.


“저도 지나고 보니까, 처음 활동했을 때엔 제 권리에 대해 별로 인식하지 못해 제대로 요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에 와서야 겨우 문제 제기를 하는데, 그러면 ‘농촌은 원래 이렇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또 청년을 위한 일을 기획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년 세대예요. 중년과 청년이 수혜자와 시혜자로 나누어진 모습을 자주 봐요.”


들은 이 문제를 뚫고 나갈 해법을 ‘우리끼리’에서 찾았다. 정보나 권력에서는 밀릴 수 있지만, 청년들과 여성들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함께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고 싶다는 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윗세대처럼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고 공공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개인을 소외시키며 동시에 소진시키곤 한다. 농촌에서의 삶을 꿈꾸는 청년을 위한 정책에도 아쉬움이 많다.


“홍성에서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나서 지원받을 통로를 많이 알아봤어요. 그런데 농업 관련 지원을 받으려면 5년짜리 작부 계획을 내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시골에 처음 와서 이제 막 농사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장기적인 플랜을 알겠어요. 농사가 잘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는데…. 게다가 지원 관련 교육에 가니까 막 융자를 받으라고, 자꾸 금융상품을 권해요. 이자가 싸다니까 관심 없던 저도 솔깃해지더라고요.”


▶ 여자는 힘이 없어서 기계를 다룰 수 없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올해 캠프에서는 기계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촬영: 달리


도시와 농촌의 페미니스트들이 직거래하는 꿈


귀농·귀촌을 원하는 청년과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거주지”라고 들은 강조했다. 농촌은 도시처럼 부동산이나 인터넷, 스마트폰 앱을 통해 집이나 땅을 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 연고자가 없을 경우 정착이 막막하고 어렵다. 지역의 장단점을 포괄한 실용적 정보를 제공하고, 농사를 지을 때 적합한 멘토를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단다.


하지만 들은 이제 농촌 도시 어디에 살아도 ‘괜찮다’. 농민을 위한 일을 고민하다 스스로 농민이 되어 고향 땅 위에 선 들에게 다른 꿈이 더 있는지 물었다.


“저는 일 벌이기를 좋아해서 하고 싶은 건 많아요.(웃음) 예전에는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사료 중심의 기록을 했다면, 이제는 품하는 할머니들 중 작업반장의 인터뷰를 하거나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이웃들을 만나고 싶고요. 캠프하면서 농촌에 정착하려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리고 캠프가 잘 되면 ‘전국 페미니스트 농민 지도’를 만들어 도시와 농촌의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직거래하고 연결될 수 있게 지원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스트가 키운 농산물을 먹는 페미니스트라니, 더 이상 ‘좋은 일’에 관심 없다는 들의 말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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