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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동백의 시간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시간의 창조①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오 년을 기다려 꽃이 피었다.

 

회초리처럼 가느다란 쪽동백 묘목을 심었는데, 오년이 지난 올 봄, 연두 빛 푸른 잎 사이로 길쭉한 진주알처럼 조롱조롱 흰 꽃 봉우리들 맺히더니 드디어 오늘 새벽, 환하게 꽃이 피었다. 노란빛의 수술을 단, 별 모양의 작은 흰 꽃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 년을 기다린 꽃이라니! 꽃 한 송이 보는 일의 감격이 하루 종일 내 안에서 출렁인다. 오년의 시간, 나무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같이 왔다. 어린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는 시간, 그 시간을 같이 지내왔다고 생각하니 가슴 가득 차오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 쪽동백  ⓒ김혜련

 

# 나무를 심는 마음

 

처음 집의 마당은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아무런 생명도 자라지 못했다. 오래된 시골집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뒤뜰의 늙은 감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나무가 베어져 나간 밑둥치만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사는 게 바쁘고 힘들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마당에 시멘트를 걷어내고 화단을 만들어 나무와 꽃을 심기로 했다. 심고 싶은 나무들을 노트에 하나씩 적을 때마다 가슴이 밝아졌다. 매화, 앵두, 산 목련, 단풍, 산수유, 감나무… 어릴 때 흔하게 보았던 나무들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남의 집에 서있는 나무들을 관찰했다. 가까이 가면 가슴이 환해지는 나무들을 물어 적었다.

 

눈에 띌 듯 말 듯 은은한 반투명의 우아한 꽃을 달고 있는 노각나무, 한여름 내내 붉은 꽃을 달고 있는 배롱나무, 잎이나 꽃은 물론 열매도 고와서 봄부터 가을까지 기쁜 석류나무, 수중에 연꽃이 있다면 육지엔 목단이 있다고 할만큼 아름다워 꽃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목단 나무, 이른 봄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뾰족한 잎을 하늘로 향해 내밀다가 밥알 같은 작은 꽃을 초여름 하늘에 피워내는 이팝나무, 열매가 마치 산딸기 같은 산딸나무… 아, 그리고 꽃사과 나무가 있었다.

 

▶ 집마당에 제법 울울해진 나무들.   ⓒ김혜련

 

막상 화단을 만들려고 흙을 구하려니 흙이 없었다. 시골엔 온통 흙인 것 같은데 실제로 흙은 귀했다. 다 주인이 있는 땅이니 아무데서나 파올 수도 없었다. 흙을 사야 했다. 그러나 산 흙이나 논흙이 아닌 밭 흙을 구하기는 또 어려웠다. 결국 첫 해를 넘긴 다음 해에야 흙을 구해 화단을 만들 수 있었다. 흙을 구하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이라는 걸 경험하고서야 알았다.

 

여러 해를 걸쳐 인터넷으로 종묘원을 뒤져 묘목을 사고, 이른 봄 수목원에 가서 며칠 동안 보고 또 보며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를 골랐다. 많은 나무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나무를 찾는 게 쉽진 않았지만, 설레고 신났다. 며칠 동안 나무들을 옮겨와 정성스레 심고 물을 흠뻑 줬다. 산목련, 단풍나무, 이팝나무, 매화, 꽃 복숭아나무, 보리둑, 꽃사과… 꽃사과 나무를 심을 때는 가슴이 아릿해 왔다.

 

# 학교 복도 창밖, 눈부신 꽃을 단 나무

 

어느 봄날 오후 졸음 반, 지침 반으로 북관 이층 복도를 오를 때였다. 무겁고 게슴츠레한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이 있었다. 복도 벽 쪽으로 난 창밖에 제법 큰 나무가 붉은 꽃을 가득 달고 서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무였다. 그 나무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요정인 듯 나무는 눈부신 꽃을 온 몸에 달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우아하고 황홀한 자태에 취해 나는 수업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누렇게 뜬 얼굴, 생기라고는 찾을 길 없이 너덜너덜 한 내 몸과 마음에 한 줄기 아름다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토록 눈부신 꽃을 달고도 조용한 나무가 나 자신을 보게 했다. 부끄러웠다.

 

▶ 꽃이 핀 꽃사과나무의 모습.


“선생님, 뭐 하셔요?”

 

날 찾아 교무실로 내려가던 반장 아이가 불러, 침묵 속에서 깨어났다. 난 말 없이 그 아이를 내가 서 있는 자리로 데려왔다.

 

“저 나무가 무슨 나무니?”

“어, 거기 나무가 있었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크고 환한 나무를 아이들도 잘 몰랐고, 나도 몰랐다. 그 정도로 자라려면 수십 년 이상은 그 자리에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도 건물 앞 쪽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에 가려, 뒤쪽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서 있는 그 나무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학교라는 공간을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 본적이 없는 탓인지도 몰랐다. 아이들이나 나나 학교는 언제나 빨리 떠나고 싶은 공간일 뿐이었다. 그 공간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마음 따위는 없었다.

 

동료들에게 물어도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아는 이가 없었다. 나이 많은 생물 선생님이 그 나무가 ‘꽃사과’라고 알려줄 때까지 나는 무슨 나무인지도 모를 그 나무가 피워 낸 꽃을 바라보러 수업이 끝난 뒤 북관 이층 복도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날 듯 생기 가득한 꽃과 그 생기의 근원일 나무의 침묵을 느꼈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다 떠난 학교에서 석양이 지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나무를 바라보는 게 그 때 내 삶의 찰나적 기쁨이었다.

 

그 나무를 오래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내 집 마당에 심는다! 내가 길러서 꽃을 보게 될 나무다.

 

나무들은 자신의 자태와 특성으로 서로 어우러졌다. 달밤에 바라보니 작은 신(神)들이 지상에 내려온 듯 집이 그윽했다.

 

# 내가 심고, 돌본 나무가 꽃을 피웠다

 

▶ 쪽동백 잎에 붙은 벌레를 잡아주었다.   ⓒ김혜련


오륙년 전 그렇게 우리 집으로 온 나무들이었다. 꽃사과나무는 삼년 만에 꽃을 피웠다. 그 붉고 아름다운 봉오리와 투명하도록 환한 꽃을 보면, 몸이 먼저 웃었다.

 

가장 여리고 어린 나무는 쪽동백이었다. 어린 아이 종아리 같이 어설프고 가녀린 나무가 오 년이라는 세월을 견디고 자랐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내가 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준 나무, 정성 들여 돌봐준 나무가 꽃을 피웠다.

 

옷장에서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 입고 단정하게 나무 곁에 선다.

 

‘오랜 기다림으로 너를 맞는다.

옷깃을 여미고

우주의 신비에 초대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자세히 보니 긴 꽃대가 있고 그 끝마다 지름이 2센티쯤 되는 꽃이 스무 송이 정도 달려있다. 길게 나온 암술 하나와 노란 털이 소복한 열 개쯤의 수술이 함께 있다. 꽃부리는 종 모양이고 끝은 다섯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마치 꽃잎이 다섯 장처럼 보이지만 통꽃이다. 잔털들이 오소소 소복하다.

 

# 내 안에 쌓여 새로운 삶이 되는 ‘시간’

 

오년의 시간이 나무에 쌓이듯 내 안에도 쌓였다. 나는 이제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는 조금 떨어져 여유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 무언가를 계속 하고 또 해야만 하는, 나도 모르게 붙은 내 안의 조바심과 긴장이라는 오랜 관성 위에 새로운 시간들이 쌓였다.

 

봄 저녁 별 할 일 없이 마당을 거닐거나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일이 깊은 충일감을 주는 일이 되었다. 내 몸을 느끼고, 내 주변의 자연을 느끼면서 걷는 시간. 그 시간은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분주한 시간이 아니다. 서서히 느릿느릿 쌓여가는 시간의 층들. 이 때 시간은 새로이 창조된다. 소모되고 사라져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쌓여 새로운 삶이 된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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