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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느티나무처럼 만들어줄 시간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시간의 창조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더 이상 설렘이 사라진 시간

 

“남은 삶에 더 이상 설레는 시간이 없겠지.”

“사는 게 너무 지루해.”

“뻔한 인생이 남아 있네. 내 아이들의 시간이나 바라봐야 할 나이가 되다니…”

 

사십 대 중반쯤 동료들이 하던 말이었다. 이제 뻔한 삶만 남았다고, 사는 게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고. 언제나 같은 시간, 지루한 시간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늘 미래를 향해 달려왔던 우리 세대들은 세상이 던져준 삶의 중요한 의미들을 다 성취하고 나서는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십대 땐 좋은 대학엘 가야 했고, 이십 대엔 괜찮은 남자를 만나 성공적인 결혼을 해야 했다. 여자에게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교사직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기도 했다. 내 주위 교사 친구들은 삼십대엔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애썼고, 사십대엔 강남이나 목동에 괜찮은 아파트를 차지하기도 했다. 모범적이고 성실한 자식들은 골치 썩일 일은 하지 않았고, 남편들은 대부분 기업의 임원직으로 올라가 있거나 탄탄한 자기 일들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달려갈 미래가, 성취해야 할 삶의 목표가 사라진 사십 대 중반, 우리들은 모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단단한 발판인 줄 알았던 삶이 갑자기 모래밭에 서 있는 듯 스르르 무너지는 듯한 위기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허망했다.

 

더 이상 설렘이 사라진 시간. 무엇을 해도 뻔한 시간. 그런 시간을 수십 년 더 살아야 하는 건 일종의 형벌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방학이 되면 유난히 해외여행을 많이 갔다. 그 지루한 시간을 새롭게 해 줄 것은 새로운 연애나 여행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 밭에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김혜련


‘시간이 새로워지지 않는 병’을 앓고 있는 한 소설가의 산문집을 돌려 읽으며 구구절절 공감했다.

 

“시간이 새로워지지 않는 병은 골수염, 관절염, 사지무력증, 심신황폐증, 언어의 발기불능증, 언어증발증, 그리고 머릿속에서 아무런 질서나 개념에도 도달할 수 없는… 웬 짐승이 이를 갈며 울어대는 듯한 울음이 끝도 없이 들려오는 치매성 이명증과 또 머릿속에서 현실의 모든 치고받는 짓거리며 엎어지고 뒤벼지는 뒤채임들이… 자리 잡지 못하는 황폐성 중량 불감증과… 폭양의 물가에서 풀을 뜯는 새카만 암염소의 하초를 향하여 바지를 까내리고 달려들 것만 같은 금수충동증… 온갖 치매의 합병증과 병발증을 난만하게도 불러일으켜 놓았는데, 그 해 여름 나는 그 모든 치매에 이끌리어 강진으로 떠들어왔다.” -강진에서, 김훈 <풍경과 상처>

 

소설가의 절망은 야단스러웠다. 과장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중년이 겪는 일일 것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젊음이 화려했던 것도 아닌데, 이제 중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노년에 대한 긍정적인 상상력도 가질 수 없었다. 삶은 그냥 주어진 궤도 속에서 굴러갈 것이고 나는 속수무책 그 시간 속에서 낡고 늙어갈 것이다. 그렇게 초조해지고 초라해졌다. 

 

# 지루함-견디기-일탈하기, 삼박자 속 허무

 

그런데 지금 나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내가 만난 시간은 생기롭고 발랄하다. 단순하고 투명하다.

 

지난 시절 이십 년이나 한 자리에 서있던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애정이 없이 내 일상을 살았다. 여기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꿈꾸며 그리워했다. 새로운 시간은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연인을 만나거나, 영화를 보거나,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거나…. 내가 있는 일상의 자리를 떠나야만 겨우 생겨났다.

 

▶ 밭에서 막 캔 파.  ⓒ김혜련


일상을 견디다가 휴일이면 일상이 아닌 다른 곳, 다른 시간을 찾아 나섰다. 삶에서 뭔가 근사한 것, 그럴듯한 그 무엇을 찾았다. 그 다른 시간은 일상에 들어오면 다시 낡아지고 닳아져갔다. 그러니 늘 주말이나 방학을 기다렸다. 그 때만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런 반복이었다. ‘지루함-견디기-일탈하기’ 이 삼박자 속에서 점점 허무해져갔다.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것들을 견디어야 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한, 삶은 지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일상이므로. 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지루해하고 경멸하며 살았다. 밥하기 싫고, 청소하기 싫고, 직장 가기 싫고….

 

그런데, 지루한 반복이 아닌 그 무엇이 세상에 있던가? 해도 지겹게 떠오르고, 밥도 지겹게 먹고, 숨도 지겹게 쉰다. 지겹게 반복되지 않는 것은 도무지 진리의 자리에 꼽사리 낄 자격이 없다.

 

# 소비하는 시간이 아닌, 창조하는 시간

 

수백평의 땅에 구십 평쯤 되는 거대한 집을 지은 앞집에 수십 년, 백여 년 된 나무들을 옮겨다 심었다. 크레인과 덤프트럭에 실려 온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굉장했다. 커다란 소나무와 동백, 매화, 오가피나무… 나무를 보면서 즐거워들 했다.

 

그러나 그 나무를 보면서 자신의 시간을 새롭게 탄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나무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함께해 생산된 시간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비싼 돈을 치른 소비재를 즐기는 차원일 뿐이다.

 

▶ 대파의 껍질을 까고, 파뿌리를 잘라내고, 물에 씻고 있다.  ⓒ김혜련

 

시간이 새로워지려면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한다. 꽃이 피고지고를 계속하듯이 반복되는 일상을 몸으로 살아야 한다. 몸으로 살아낸 만큼 시간은 내 안에 쌓인다. 풀풀 날라 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이 된다.


마트에서 다 정리된 파를 가져다 쓰는 것과 내가 씨앗을 심고, 가꿔서 자란 파를 밭에서 뽑아, 흙을 털고 껍질을 까서 쓰는 것에는 다른 시간이 있다. 느리고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시간 속에 생생한 기쁨이 있다.

 

“밭의 쪽파를 다 캤다. 뿌리에 흙이 잔뜩 달려 나온다. 흙을 털고 바구니에 담는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쪽파를 깐다. 흙속에 묻혀있던 흰 몸들이 하얗게 드러난다. 한 시간 쯤 뿌리를 칼로 자르고 마른 잎이 붙은 껍질을 까고, 저린 무릎을 편다. 하늘이 푸르다.

 

쪽파를 흐르는 물에 담가 헹구니 우르르 흰 머리들이 음표같이 너울댄다. 흐르는 물에 하얀 음표들이 떠다니며 지난겨울 내내 흙속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도란거리는 것 같다.“ -2015년 4월의 일기 


이 시간들은 내 몸을 통해 축적되는 시간이다. 나를 늙은 느티나무처럼 만들어줄 시간이다.

 

▶ 이 방에서 쪽동백이 보인다.   ⓒ김혜련

  

비오는 봄날 오후 가느다란 빗방울을 맞으며 밭에 씨를 뿌리고 흙을 돋울 때, 무언지 모를 기쁨이 내 안에 차오른다. 호미질을 하는 손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땅의 촉감, 얼굴과 손등을 간질이며 고요히 내리는 봄비, 나는 나를 잊는다. 다른 시간이다.


# 시간의 기적

 

쪽동백이 바라보이는 정갈한 방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 읽고 꽃을 바라보고, 산책하고 다가가서 말을 건다.

 

“장하다, 축하해!”

 

마당의 풀을 뽑고, 밭에 줄 콩을 심고, 그리고 또 다가가 본다. 잘랑잘랑 흰 진주알들이 바람에 살랑인다. 약간 쓴 듯한 달콤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가슴 가득 생기롭고 충만한 기운이 차오른다. 다른 시간이다. 시간의 기적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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