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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할매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늙은 요정을 만나다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늙음이여, 이토록 천진하게 오라

 

아침에 냉이 캐러 뒷밭에 나간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땅에 온통 냉이 천지다. 등에 따뜻한 햇살 받으며 흙을 헤쳐 냉이를 캐고 있자니 이상한 포만감이 온다. 아니 충만함이라고 해야 하나.

 

▶ 밭에 냉이들 꽃을 한껏 피웠다.  ⓒ김혜련

 

집 뒤 쪽 골목 최근에 지어진 고대광실 같은 선방(禪房) 맞은 편, 허름한 옛집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경로당 출근이시다. 늘 이 시간에 이 길로 가신다. 오늘은 유모차 대신 지팡이 짚고 가신다. 직각으로 굽은 허리, 머리엔 분홍빛 마후라 두르고.

 

“안녕하셔요~”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귀가 좀 어두우시다.

 

“냉이 있나?”

“예~”

 

“그래, 꽃 피기 전에 먹어야지. 냉이도 철들면 못 먹어. 질기다.”

“아, 예...”

 

가다말고 냉이 캐고 있는 곳에서 몇 고랑 떨어진 밭쪽으로 걸어 들어오신다. 의아히 바라보는데, 그만 엉덩이를 내리고 오줌을 눈다.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따뜻한 햇살 받으며 천천히….꼭 어린아이 놀이하듯 천진스럽다. 오줌 누고 일어서면서 발밑에 꽃 핀 냉이 들여다보며 하시는 말.

 

“에고~ 벌써 철들이 다 들었구만…”

 

연분홍 마후라 바람에 날리며 지팡이 짚고 멀어져 가신다. 물기 빠져나간 작은 몸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무게감이 없다.

 

잠시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다가 하하하 웃음이 나온다. 냉이가 철든다고? 정말 기막힌 표현이네. ‘철든’ 냉이들이 내 앞에서 “못 먹어, 질겨, 질겨” 흰 꽃을 살래살래 흔들며 까불대고 있다. 밭 가운데서 아무렇지 않게 오줌 누는 모습이 어찌나 천연스러운지, 게다가 분홍빛 마후라 날리며 표표히 사라지는 뒷모습이라니!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들꽃처럼 지혜롭다.

 

할머니 뒷모습에 분홍빛 원피스 입고 팔랑 거리는 소녀가 나풀거리며 나왔다 들어갔다 겹쳐진다.

 

오라, 오라.

늙음이여, 세월이여.

이토록 천진하게 오라,

이토록 지혜롭게 오라.

 

오늘 아침 문득 늙은 요정을 만난 나는 유쾌하다.

 

▶ 동네 할머니가 집으로 가시는 길. ⓒ김혜련


# 세상 힘들 것 없다는 천연한 자세


그러고 보니 할머니들을 보는 내 눈이 달라졌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그저 다 할머니일 뿐이었다. 어떤 개성을 지닌 존재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늙었다’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늙음은 불특정 다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할머니들의 개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몸짓과 말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느 시골 동네처럼 이 동네도 할머니들이 많다. 안쪽 동네 할머니 한 분은 늙은 추장 같다. 그 분이 지나가면 바람도 위엄 있게 그 뒤를 따라가는 듯하다. 팔십 중반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허리도 곧추 서 있고 걷는 모습도 당당하다. 수 백 평되는 밭을 혼자 다 싹 틔우고, 김매고, 거느리신다.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어린애처럼 꼬박꼬박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처음 보는 듯 대한다.

 

“뉘신가…”

 

“할머니, 저 아래 쌍 탑 옆에 이사 온 사람이잖아요.”

 

“아, 그러신가. 젊은이가 늙은 사람에게 인사해주니 고맙구려.”

 

정중하게 한 말씀 던지시고 표표히 가던 길 가신다. 잘 보이고 싶은 내 마음일랑 아랑곳없다. 시내 약국에서 피곤한 얼굴로 앉아계신 걸 만나 집까지 차로 모셔다 드려도 그저 “고맙네” 한 마디 뿐, 다음에 만나면 여전히 덤덤하시다. 자기 집 앞에서 담배를 물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큰 자연 앞에서 느껴지는 장엄함이 온몸에 깃들어 있다.

 

그런가하면 ‘남산 슈퍼’ 앞 쪽에 살고 계신 할머니는 집처럼 정갈하다. 낡은 집을 단정하게 가꾸어 놓고 사신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옷매무새도 단정하다. 매일 지팡이 짚고 산책을 하신다. 우리 밭을 지나가다 말고, 울타리를 치고 있는 M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 마디 하신다.

 

“참, 곰살맞게도 한다.”

 

산 너머 내남에 사는 지인은 자기가 만드는 대나무 울타리를 보고 동네 할머니가 “아이고, 재롱지게도 한다~”고 하셨단다. 지인은 엄청난 거구(巨軀)다. 덩치 크고, 나이 든 남자들이 하는 일이 ‘곰살맞고’ ‘재롱지게’ 보이는 할머니들의 삶의 스케일이라니… 하하하

 

▶ 시골집 울타리  ⓒ김혜련


배반동에서 남산마을까지 걸어서 농사지으러 오는 할머니도 계신다. 서너 정거장은 될 거리를 걸어 매일매일 다니신다. 몇 년 전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 서툰 내 낫질을 교정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사월의 어느 날, 밭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힘들지 않으셔요?”

 

“힘들긴 뭘 힘들어? 송홧가루 날리는 날엔 산이 약 주제, 땅이 밥 주제, 그냥 걸어 다니면 약이 입으로 들어온다.”

 

세상 힘들 것 아무 것도 없다는 듯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밭에 왔다가, 산이 주는 약도 받아먹고, 땅이 주는 밥도 기르며 저녁 되면 집으로 가시는 할머니. 저 천연한 자세는 하루아침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서출지 옆, 친구가 세 들어 사는 집 할머니는 올해 여든 아홉이신데, 정정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귀가 약간 어두우신 것 말고는. 할머니 부엌 식탁엔 떨어져 사는 아들이 어머니가 걱정되어 적어둔 글귀가 있다. <어머니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거기엔 ‘밭농사 하시지 말 것, 짜장면 드시지 말 것, 믹스커피 드시지 말 것…’ 촘촘히 적혀 있다. 할머니 하시는 말.

 

“에라~ 날 더러 죽으라 해라. 두 손 놓고 있으면 죽으란 얘기지 뭐냐. 봄 되면 저절로 몸이 밭으로 가는 걸 날더러 어쩌라고? 풀떼기가 그리워서 내사 호미 못 놓는다. 동네 친구들과 목욕 갔다 짜장면 한 그릇 먹는 게 을메나 재밌는 데 그 걸 하지 말라 하노?”

 

할머니 마당에 피어난 작은 꽃들처럼, 늙고 주름진 얼굴 속에서 작은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거린다.

 

▶ 목련.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듯한 무수한 흰 생명들.  ⓒ김혜련

 

# 들꽃 같은 아름다움, 바람결 같은 지혜

 

할머니들의 개성이 들어오는 건 어김없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자연에 밀착되듯이 작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민감해진 면도 있으리라. 세상에 크고 떠들썩한 것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들꽃 같은 아름다움, 바람결 같은 지혜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 기쁜 소식은 아닐까.

 

저녁에 동네를 한 바퀴 돈다. 호호백발의 작은 할머니가 사시는 오래된 기와집 뜰 목련나무에 흰 꽃이 가득 피어있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흰 목련은 마치 무수한 흰 생명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듯 아찔하다. 올 봄은 모든 게 다 절실하고 진하다. 그래서 낯설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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