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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덜 희망적인 엔딩’을 원하는가?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던 케냐의 레즈비언 영화 <라피키>



올해 5월에 열린 칸 영화제에서, 케냐 영화로는 최초로 공식 초청작으로 상영되며 화제를 모은 <라피키>(Rafiki, 스와힐리어로 ‘친구’라는 뜻, 와누리 카히우 감독, 2018)가 정작 모국인 케냐에선 상영 금지 처분을 받는 일이 있었다.


10대 여성들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케냐 영화등급위원회(Kenya Film Classification Board)의 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이 영화가 “케냐의 법과 달리 ‘레즈비어니즘’을 장려한다”며 상영 금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 케냐 와누리 카히우 감독의 영화 <라피키>(Rafiki) 포스터


그래서 이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보기 힘들 것 같았다. 케냐의 퀴어영화가 대한민국 극장에서 개봉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니까. 때마침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행운으로 <라피키>를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소녀들의 로미오와 줄리엣


동성애가 죄가 되는 나라, 최대 14년형까지 선고 받을 수 있는 그 곳에서 만들어진 퀴어영화인 <라피키>는 예상과 달리 굉장히 경쾌한 음악과 밝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10대 퀴어들을 다루는 국내 작품들의 다수가 우울하거나 사뭇 분위기가 무겁기 때문에, <라피키>도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약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보드를 타고 등장해서 남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톰보이’ 케나가 형형색색의 드레드록(dreadlocks, 흑인들의 땋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여자 친구들과 거리에서 커버 댄스를 추는 지키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뻔한 전개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이 일종의 ‘로미오와 줄리엣’ 관계에 놓여있다는 거였다. 이들의 아버지가 시의원에 출마한 상황이며 서로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퀴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장벽이 있는데 라이벌 집안이라니. 왜 이렇게 주인공들을 가혹한 현실에 두는 건가 싶었는데, 감독은 영리하게도 그런 정황 때문에 역설적으로 ‘퀴어’라는 사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키의 가족들은 케나를 처음부터 탐탁지 않아 하지만 그건 케나의 아버지와 선거에서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케나와 지키가 사랑에 빠지고 데이트를 하며 둘 만의 시간을 쌓아가는 동안 그 관계를 긴장시키는 요인은 그들이 퀴어라서가 아니다. 딱히 아웃팅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케나는 약간 그런 면을 보이긴 하지만 지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함께 춤을 추고 노는 그들은 ‘(아빠가 라이벌인데) 어째서 쟤들은 같이 다니는 거야?’라는 시선을 받을 뿐이다. 물론 결국 가장 큰 시련이 이들을 찾아온다. 로미오와 줄리엣 관계인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웃들, 친구들은 결국 그들의 관계를 밝혀내고야 만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동네 주민들이 케나와 지키를 그들의 아지트인 버려진 차 안에서 끌어내 마구 때리는 그 폭력의 장면이 단지 화면에서 일어나는 걸로 느껴지지 않아서다. 얼마 전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혐오 세력들에 의해 일어난 사태를 담은 영상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의 눈에 담겨 있던 공포와 슬픔과 절망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져서 놀랄 정도였다.


영화 후반부 장면들은 다소 무겁다. 케나가 교회에 가서 동성애 전환치료를 받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케나의 엄마가 케나에게 쏟아내는 날카로운 말들도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라피키>는 관객에게 극단적인 절망을 보여주진 않는다. 오히려 케나의 아빠가 선거를 포기하면서 “어떤 건 어쩔 수 없단다”라고 케나를 안아주는 장면 등에서 어떤 변화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무언가 시작될지 모를 기대감을 주며 끝난다.


▶ 와누리 카히우 감독의 영화 <라피키> 스틸컷


케냐의 여성들 ‘간호사는 되는데 왜 의사는 안 돼?’


이 영화는 여성감독이 만들었고,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서사를 이끌어 가는 여성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 케냐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것도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다.


케냐의 여성들이 성차별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케나의 부모의 이혼 사유는 정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주요 사유 중 하나였다는 게 암시된다. 케나의 베프인 남자 친구는 케나의 의도와는 달리 그를 연애 상대로 고려하고 있고 ‘자기가 돈을 얼마나 모았고 얼마나 준비가 되었는지’를 계속 어필한다. 마치 그런 경제적인 제반이 갖춰지면 어떤 여성이든 자신의 연애 상대로 삼을 수 있다고 믿는 듯이 말이다.


케나 또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남자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보드를 타고 놀면서도 여전히 어떤 성역할에 갇혀 있기도 하다. 수험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이 성적이면 의사도 할 수 있는데 왜 간호사가 되는 것만 고려하냐?’는 지키의 질문에,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는 듯 당황하며 ‘나 정말 의사도 될 수 있는 거야?’라고 놀라는 케나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타깝다.


그렇듯 영화 속 케냐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답답하고, 그래서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떤 부분들은 한국의 실태와도 비슷하게 겹쳐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이 관객들에게 어떤 여성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 주고자 했는지, 어떤 현실을 짚어내고 또 비틀고 싶었는지 눈에 보여서 그 당돌함이 설렘을 주기도 했다.


▶ 케냐의 와누리 카히우 감독이 만든 영화 <라피키> 스틸컷


영화 상영을 금지한 이들의 요구 ‘엔딩을 바꿔라’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상영 금지’가 될 만큼 파격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히우 감독은 헐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케냐 영화등급위원회가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리기 전에 감독에게 수정하라고 한 건 “로맨틱한 장면(키스 씬 등)이 아니었다”고 했다. 위원회는 “엔딩을 변경하라”고 요구했다. 영화의 엔딩에서 주인공들이 “(동성애 행위를 했다는 걸) 충분히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카히우 감독은 “오히려 위원회에서 로맨틱 장면을 수정하거나 잘라내라고 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엔딩을 ‘덜 희망적인 걸’로 바꾸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감독은 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표현의 자유가 침해 받은 것에 대해, 법원에 상영 금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 9월 21일, 케냐 법원은 7일 동안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인’에 한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판결했다. 단지 7일이지만 <라피키>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케냐의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 영화 <라피키> 와누리 카히우 감독이 트위터를 통해 법원을 판결을 알리고 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첫 상영이 진행되던 날, 관객이 가득한 상영관 모습을 SNS를 통해 보면서 내 마음도 함께 들떴다. 그리고 마지막 상영이 끝난 후 ‘멈추지 않고 이 싸움을 계속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감독의 글을 보며 나도 힘을 내리라 생각했다.


가부장제 권력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덜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들은 ‘희망’이 가진 힘을 알고 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자 한다. 엔딩을 ‘덜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라는 요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계속 희망을 이야기하고, 보여주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단 7일 간의 상영을 위해 투쟁한 감독과, <라피키>의 상영을 지지하고 상영관을 채워준 관객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가부장제 권력이 대신 써 주는 ‘덜 희망적인 엔딩’은 필요 없다. 여성들은 우리 이야기의 엔딩을 스스로 쓸 것이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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