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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화공방, 그 어려운 이름

[이민영의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거긴 뭐하는 곳이야?’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명함은 가면 같다. 명함을 내밀면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의상을 갈아입고 변신하듯 명함에 적혀 있는 소속과 직함에 빙의돼 역할놀이에 빠진다. 내 안의 수많은 나 중 하나를 꺼내는 일이니 그 가면을 쓴 사람이 나인 건 분명하지만, 어떨 때는 늘 쓰고 있는 가면만 꺼내게 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다. 오롯이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한 역할의 수행자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는 실상이 서글플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빠르면서도 편하게 타인과의 대화에 물꼬를 트는 방법 중 하나가 명함이기에, 사람들은 명함을 애용하나 보다.


나 역시 나의 지난 한 해를 소개할 때면, 작년의 나를 수월하게 설명해 줄 명함을 꺼내게 된다. 그 명함에는 ‘비전화공방’이라는 단어가 빠질 수 없고, 비전화공방을 설명하려면 ‘후지무라 야스유키’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야 한다.


▶ 후지무라 야스유키. 그를 비전화제작자들은 센세라 부른다. ⓒ비전화공방서울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오사카 대학에서 기초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마쓰(KOMATSU)라는 중장비 회사에서 십여 년 간 개발직으로 일한 공학도였다. 천식을 앓는 자녀를 위해 공기청정기를 개발한 일을 계기로 미래 세대의 건강과 환경을 고려한 수백여 개의 제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이를 집대성하고 전환적 삶을 알리며 유사한 지향을 바라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곳이 바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이다. 비전화공방은 그가 거주하는 집이자 실험실이자 작업장이자 접대실로, 현재 일본 도치키현 나스에 위치하고 있다. (관련 기사: ‘전기 없는 공방’을 찾아 http://ildaro.com/5038)


‘삶을 전환하는 손과 머리와 동료를 구해요’


비전화공방을 한자어로 풀면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공방’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실상 비전화공방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을 살펴보면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걸 빠트렸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물론 비전화공방에서는 전기와 화학물질을 제대로 알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 없이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방법을 익힌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습득하는 까닭은 단순히 기술의 필요나 효용 때문이 아니다.


간단하게는 전기나 화학물질 없이도 살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서이고, 구체적으로는 지역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려면 적정 수준의 기술에 대한 이해와 실력을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자립할 수 있는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 가치와 철학을 배우고 동료를 만드는 것처럼 기술 또한 자급에 다가가는 방식 중 하나다.


▶ 일본 도치키현 나스에 위치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 전경  ⓒ비전화공방서울


오랜 불황과 정체를 겪은 일본에서 후지무라 야스유키가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한 현대 사회에 제안하는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많은 호응을 얻었다.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서 그의 가치를 눈여겨 본 박원순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비전화공방서울은 2017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에 자리 잡게 된다.


비전화제작자 양성 과정은 비전화공방서울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바라는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청년들이 1년 간 후지무라 야스유키(이하 센세. 일본어로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비전화제작자들은 그를 센세라 부른다)의 지도하에 그의 철학과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자급자족 역량을 높이고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데 그 폭이 농사부터 목공, 요리, 건축, 에너지, 철학까지 방대하다. 내가 비전화공방과 만난 방식이 바로 이 비전화제작자 양성 과정이다.


그 동안 농사를 배울 수 있는 곳도 많고, 건축을 해볼 수 있는 곳도 많은데 왜 굳이 비전화공방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물론 그 전에 나 역시 이런저런 삶을 꾸릴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기관이나 단체, 프로그램을 제법 알고 있었다. 하지만 취직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닌, 일상을 만드는 방편으로서 기술을 종합적으로 주5일 꼬박 1년 동안 동일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체화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당장 귀촌할 것도, 전직할 것도 그렇다고 취미로 즐기는 것도 아닌, 어떻게 삶을 바꿔나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그 방편으로 기술에 접근하는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 센세의 강의. 그는 자상하고 친절하며 단호한 스승이다. ⓒ비전화공방서울


일상을 전환하는 방법을 ‘몸으로 궁리’한 1년


입에 잘 붙지 않는 일본식 단어인 ‘비전화’제작자로서 사는 한 달은, 한 주간 센세와 집중적으로 수행을 하고 다른 3주는 센세가 내준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센세와 함께 하는 일주일은 강의를 듣거나 3주간 해놓은 과제를 검토하고 그 결과물을 보며 수정할 점을 점검하고, 다음 과제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협의한다. 나머지 주차의 일주일은 ‘한 주 열기’로 시작하고 ‘한 주 닫기’로 문을 닫는다. 한 주 열기에서는 이번 주는 어떤 일을 함께 할지 협의하고, 한 주 닫기에는 이번 주 무엇을 수행하고 배웠으며 느꼈는지 소회를 나눈다. 제작자들이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간 외에도 수시로 사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를 갖는다. 센세의 과제에 따라 매주 주로 하는 일이 달라지는데, 농사, 목공, 건축 등 각 분야 별 세세하게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들이 따로 계신다. 농사의 경우 절기에 따라 하는 일이 바뀌고, 목공이나 건축은 과업 진행 정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 큰 방향은 센세가 정하되, 분야별 선생님 나름대로의 과정과 가르침에 따라 비전화제작자가 협동 학습하는 방식을 취한다. 매달 보고서와 에세이를 써서 각자의 진도를 점검한다.


▶ 1년간의 비전화공방서울 수행 일정표 ⓒ비전화공방서울


19세부터 38세까지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경험도 기대도 각기 다른 12명의 비전화제작자 중 한 명으로 비전화공방서울에서 매일을 한 해 살았다. 정식 학위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비전화제작자로의 1년이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제법 받았다. 겨우 1년을 살았는데, 비전화공방은 어떤 곳이냐고 내게 묻는 이도 많았다. 고약한 심보겠지만 난 그 질문이 ‘너 요새 뭐하니’처럼 추상적이고 무성의하단 생각이 든다. 나의 안부와 상황을 신경 쓰고 궁금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간편한 인사치레거나 갑작스레 떠오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혹은 자신의 넓고 얕은 지식을 뽐내기 위한 수단이랄까. 


정말 나의 지난 1년 간 비전화공방서울에서의 생활을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찻물을 끓이고 숨을 고른 뒤 차분히 전하고 싶다. 1년 간 시시때때로 바뀌었던 나와 나의 상념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단어를 가려 집어본다면 조금은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쑥스럽지만 나 역시 아직은 비전화공방이 무엇이고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는 밑밥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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