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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던 ‘퀴어의 과학’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알게 된 과학이야기②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기사 ‘여성의 과학’ 편에 이어 이번에도 숫자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92.6%, 87.1%, 81%, 44.4%’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 따르면 저 숫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평소 누군가에게 욕을 듣거나 위협이나 폭행을 당하는 등 범죄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지 묻는 항목’에서 ‘매우 그렇다’ 혹은 ‘그렇다’라고 답한 성수자, 여성, 장애인, 이주민의 비율이다.


해당 문항 외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유로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느끼는지’,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건 성소수자였다.


▶ 걸스로봇이 전미과학진흥협회에 참여하기 위해 모금을 진행한 스토리펀딩- AAAS 여자들 ‘과학과 젠더렌즈’ 페이지


걸스로봇이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 참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스토리펀딩을 진행 했을 때, AAAS와 여성과학자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를 8편 연재했다. 그런데 ‘6화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게시물에만 유독 댓글이 많았다. 대다수는 혐오표현으로 채워진 댓글이었다.


이렇듯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지옥으로 가라’는 혐오와 맞서야 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성소수자 없는 청정구역’ 같은 말을 들으며 울분을 삼켜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서로 다른 취향, 지향,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성들이 어떠한 사회적 편견이나 압력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비슷한 능력을 가진 다른 이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하고 싶은 일을 오래도록 즐기면서 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걸스로봇은, 그렇기 때문에 이진주 대표의 말처럼 “아마도 국내에서 최초로 논의되는 ‘퀴어의 과학’”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차별’에 관해 논의하는 이유


걸스로봇이 AAAS(전미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듣고 배운 정보를 공유한 자리 ‘AAAS 살롱’에서, 특히 눈길을 끈 발제는 ‘퀴어의 과학’이었다. 자신을 트랜스 여성(MaletoFemale Transgender)이라고 소개한 송아 씨가 발표를 맡았는데, 송아 씨는 자신이 겪었던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트랜지션(Transition)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겪은 차별과 무시, 그리고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트랜지션을 시작한다 - 회사를 못 다닌다/돈을 못 번다 - 트랜지션에 어려움을 겪는다’의 과정을 공유하기도 했다.


▶ 2018년 AAAS의 세션 검색에서 ‘LGBT’로 검색했을 때 결과로 나온 것 중 일부


과연 ‘차별 당했다’고 말하는 게 과학이랑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갸우뚱할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번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서 LGBTQ 관련 세션을 찾아보니 ‘STEM 분야의 LGBTQ+를 위한 안전한 환경 만들기’, ‘STEM 분야의 퀴어: LGBTQ+ 정체성과 경험에 대한 연구’, ‘물리학 내 LGBT+ 환경과 사회에게 권하는 권고사항’ 등이 논의됐다. (※STEM: 과학 Science, 기술 Technology, 공학 Engineering, 수학 Mathematics)


세션에 대한 설명엔, 퀴어인 STEM 전문가들이 퀴어가 아닌(non-queer) 자신의 동료들과 얼마나 다른 환경 속에 있고, 그 이유는 왜인지,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 ‘이성애중심주의’와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에 어떻게 대처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 것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나와 있다.


과학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왜 이런 세션과 논의가 진행되는지 말하기 위해선, 먼저 앨런 튜링(Alan Turing)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앨런 튜링은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컴퓨터공학과 인공지능 연구의 아버지라 불린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암호 체계를 해독함으로써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후 동성애자인 것이 발각되면서 당시 영국 법에 의해 범죄자가 된다. 정부를 위해 일하던 것에서 쫓겨나고 연구에 제한을 받게 된다.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선택했던 그는 결국 195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앨런 튜링은 역사에 남을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범죄로 간주되는 안전하지 않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환경은 실질적으로 그의 삶에 위협이 되었다.


퀴어인 과학자가 경험하는 환경


▶ LGBTQ+ 과학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공개했는지에 관한 그래프.  ⓒJeremy Yoder, Allison Mattheis, “Coming out: the experience of LGBT+ people in STEM”


지금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STEM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물학자 제레미 요더와 교육학자 앨리슨 매티스가 2016년에 발표한 "STEM 분야의 퀴어"(Queer in STEM: Workplace Experiences Reported in a National Survey of LGBTQA Individuals in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Careers) 논문에 따르면, 많은 과학자들이 가족과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한 것에 비해 동료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직장 내 커밍아웃 정도에 따라 느끼는 편안함과 불편함 정도. ⓒ2016 American Physical Society


가족, 친구만 아는 걸로 충분하지 않냐고? 전미물리학협회에서 2016년에 발표한 “물리학 내 LGBT 환경”(LGBT Climate in Physics: Building an Inclusive Community) 자료는 물리학계에서 일하는 LGBTQ+ 인구의 직장 내 ‘오픈 정도’와 ‘편안함/불편함’을 비교하고 있다. 모든 혹은 대부분의 동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경우 약 70%가 편안하다고 답했지만,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거나 몇몇의 동료만 아는 경우에는 약 70%가 직장 생활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했든 안 했든, 약 40%가 직장에서 ‘성희롱, 언어희롱, 혐오발언, 스터디 그룹 및 소셜 활동에서 왕따 당하기, LGBT 정형화하기, 의도적으로 젠더 잘못 부르기 등’의 배제를 목격하고, 약 20%가 그걸 직접 경험한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 그리고 이런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협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퀴어 과학자들이 ‘과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인지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퀴어가 과학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을


세계적인 과학잡지이자 AAAS가 발행하는 <사이언스>(Science)의 3월 14일자 기사, “STEM이 남성 LGBQ 학부생을 잃고 있다”(STEM is losing male LGBQ undergrads)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몇 가지 있다.


<사이언스>는 브라이스 휴(Bryce Hughes)가 발표한 논문 “STEM에서 커밍아웃하기”(Coming out in STEM: Factors affecting retention of sexual minority STEM students) 결과를 분석했다. “이성애자인 학생과 LGBQ(*트랜스젠더는 이 조사에서 제외)의 STEM 학부생들이 그 전공을 계속 지속하는가를 비교해봤을 때 각각 71%과 64%가 나온 점”을 지적했다. 즉 LGBQ 학생들이 중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비율이 높다는 거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이언스>에서 언급한 건 미시건 주립대학의 크리스틴 렌(Kristen Renn) 교수의 연구 결과인 “퀴어 학생들이 종종 전공을 바꾸는 이유는 ‘그들의 자신들이 속해있는 커뮤니티나 지역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겪었던 부정의를 해결하고자, 과학 대신 교육이나 사회 복지 등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 택한다”는 것.


퀴어 학생들의 선택이니까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왜 ‘부정의를 해결해야 함’에 사명을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차별의 결과로 STEM을 지속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브라이스 휴의 연구 결과를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남성 LGBQ가 STEM을 떠나는 경우가 이성애자 남성보다 17% 높았고 흥미롭게도 여성 LGBQ는 이성애자 여성보다 18% 낮았다.


<사이언스>는 이 결과에 대해 미시건 주립대학의 에린 체흐(Erin Cech)의 “STEM에서는 ‘여성성’을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가 있고, 이성애자 남성이 (그리고 종종 레즈비언들도) 겪지 않는 차별을 게이 남성들이 겪는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여성과학자들이 겪는 차별을 떠올려 보면 STEM 분야에서 ‘여성성’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분석이 충분히 납득된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STEM 분야의 뿌리 깊은, 여성성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모두의 과학’이 되도록


이제 ‘과학적 근거’들을 확인했으니 왜 과학계가 차별을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퀴어의 과학’ 발제를 맡은 송아 씨가 왜 자신이 겪었던 차별 사례를 이야기해야 했는지도 말이다.


▶ ‘퀴어의 과학’ 발제를 진행 중인 송아 씨.  ⓒ일다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누구나 과학을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또 과학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퀴어의 과학’을 이야기했다. 송아 씨는 발제 마지막에 “우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과,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꼽으며 “행동으로 나서달라” 부탁했다.


걸스로봇 ‘AAAS 살롱’의 또 다른 주제였던 ‘대중의 과학’ 발제를 진행한 윤세린 씨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과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사례를 들었다. “푸에르토리코 학교에서는 식물의 씨앗이 바람에 잘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알려줄 때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생겨서 잘 날아가는 단풍나무 씨앗을 예시로 들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평생 그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푸에르토리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프리카 튤립 씨앗으로 설명하면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 미국 STEM 내 퀴어들이 만든 단체 NOGLSTP의 퍼레이드 모습. ⓒNational Organization of Gay and Lesbian Scientists and Technical Professionals (출처: NOGLSTP 페이스북)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과학은 과연 어떤 기준에 맞춰져 있었을까?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과학이 사실을 근거로 한 정직한 답을 추구한다면, 이제 그 기준은 좀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여성의 과학’, ‘퀴어의 과학’이라는 말은 과학을 나누는 게 아니라 넓히는 과정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은 이번 AAAS 살롱을 통해 걸스로봇은 우리가 몰랐던 과학을 보여주고 많은 이들에게 그 과학을 함께 만들어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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