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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과학’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알게 된 과학이야기①



‘19.3% vs 80.7%’ 무슨 비율일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앞의 비율이 여성이고 뒤가 남성이겠구나, 하고 감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고 있는 ‘여성과학기술 인력 현황’(2016년)에 따르면, 저 비율은 과학기술연구개발 인력으로 고용된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다.


자연공학계열 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히 낮다. 이런 현실이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 분야에 진출하도록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있다. ‘걸스로봇’(Girls’ Robot)이라는 소셜 벤처다. (참고 기사: ‘공학’에서 ‘로봇’하는 ‘여성’들이 말하다 http://ildaro.com/7957)


2015년 설립된 이후 인재양성 프로그램과 이공계 여성들을 위한 행사 및 세미나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걸스로봇’. 이번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듣고 배운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걸스로봇의 ‘AAAS 살롱’은 지난 3월 31일(토) 낮 2시, 서울 구글 캠퍼스에서 열렸다.


▶ 걸스로봇 AAAS 살롱의 시작을 알리는 이진주 대표  ⓒ일다


‘사기꾼 신드롬’을 겪는 여성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진주 대표는 ‘걸스로봇을 왜 만들게 되었는지, 지금까지의 과정은 어땠는지’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3월 카카오에서 개최한 인공지능(AI) 주제로 한 강연에서, 외부 전문가로 초청된 사람이 모두 남성이었던 점(조승연 작가, 김태훈 칼럼니스트, 김경일 교수, 김영하 소설가)과, CBS 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4월에 진행 예정인 블록체인 주제의 강연자 모두가 남성인 점을 꼬집으며 “이런 선택, 너무 게으르지 않나요?” 물음을 던졌다.


‘부를 수 있는 여성 전문가가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을 떠올렸을 때, 여성의 이미지와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왜 없을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 걸스로봇 장윤원 씨가 발표한 ‘사기꾼 신드롬’ 체크리스트  ⓒ일다


“사기꾼 신드롬(Imposter syndrom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걸스로봇 멤버인 장윤원 씨는 <여성의 과학>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고, 그래서 불안하고 쫓겨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걸 사기꾼 신드롬”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장윤원 씨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서 열린 ‘나의 목소리를 구축하고 내 안에 내재된 사기꾼 신드롬에서 벗어나기’(Cultivating Your Voice and Banishing Your Inner Impostor)라는 제목의 STEM 분야 여성들을 위한 워크숍(Workshop for Women in STEM) 내용을 소개했다. (※STEM: 과학 Science, 기술 Technology, 공학 Engineering, 수학 Mathematics)


과학자들이 모이는 연례 회의에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을 연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 장윤원 씨는 워크숍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는데, 먼저 발표자가 ‘나는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등의 체크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나 보라’고 했을 때, 그 방에 있는 모든 여성들이 일어났다는 것.


어떤 분이 발표자에게, ‘사기꾼 신드롬’을 겪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에 대한 데이터가 있냐고 질문을 했을 때 발표자가 답변했다는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익명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젠더 표시를 안 하기 때문에 데이터는 없다. 하지만 경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이런 워크숍을 열었을 때 오는 사람은 다 여성이다. 남성들이 가끔 오는데 그 사람들은 퀴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저도 의문이 들더라구요. 왜 이런 워크숍에 오는 건 다 여성이거나 퀴어일까요?” 장윤원 씨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AAAS의 다양한 세션을 들었고, 두 개의 세션에서 답이 될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고 밝히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공계 교육 진입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


장윤원 씨가 첫 번째 힌트를 얻은 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를 들을 수 있었던 ‘흑인 교육 시설의 STEM 분야의 여성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미국’(Women in STEM at Historically Black Institutions: South Africa and the United States) 세션이다. 발표에 따르면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하는 인종분리 정책으로 몇 십 년 간 백인과 흑인(이때의 흑인은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을 통칭)이 철저히 분리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도 일반학교와 흑인학교로 나눠져 있었다.”


▶ 남아공의 성별 및 인종 별 과학자 수에 관해 설명하는 장윤원씨 ⓒ일다


“남아공에서 어느 정도 유명하다고 알려진 과학자 중 93명이 백인남성, 10명이 흑인남성 그리고 단 4명만이 흑인여성”이라고 말한 장윤원씨는 “최근 흑인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면제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고 이제 제도적으로 흑인 학생들도 ‘일반학교(백인학교)’에 갈 수 있지만, 그들에게 그 등록금은 너무 비싸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문화적 코드, 경제적 계층성이 있어서 여전히 흑인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거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 볼 지점”인 것 같다며, 장윤원 씨는 “제도적인 차별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문화적 코드로 남아서 여전히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고 있진 않은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현재 이공계 대학의 문은 여성에게도 열려 있고 그걸 막는 제도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수학, 과학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고 여자 애들은 수학 머리가 없어서’ 식의 말을 들으며 자란다. 여성들의 이공계 진입은 차단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남자에 비해) 안 될 텐데’, ‘역시 (여자라서) 못하는 구나’ 라는 높고 낮은 벽들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여성과학자들, 과학계 성차별과 성희롱을 겪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 진입에 성공하고 있다. 이진주 대표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를 설명하면서 “현재 AAAS 회장은 여성이고, 전직 회장도 여성, 차기 회장도 여성이다. 그리고 현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도 여성”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맥 어리(Meg Urry) 교수도 그런 많은 장벽을 뚫고 예일대 천문대 물리학과 학과장과 미국천문학협회 회장 등 화려한 경력을 쌓은 여성과학자다.


“뛰어난 과학자인 맥 어리 교수가 올해 협회에서 발표한 건, 자신의 논문이나 연구 결과가 아니라 <성희롱: 그것은 무슨 의미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Sexual Harassment: What It Means and What We Can Do About It) 세션”이라고 얘기한 장윤원 씨의 말에서 두 번째 힌트가 풀리기 시작했다.


장윤원 씨는 “세션이 아침부터 시작되었는데, 언론 매체를 통해서 볼 수 있던 유명한 여성 과학자와 교수들이 그 자리에 다 있어서 놀랐다”면서, “더 놀랐던 점은 그렇게 대단하고 유명한 과학자가 ‘대학원 시절 나의 교수님은 나에게 신이었다’고 발표를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맥 어리 교수는 현장실습을 나간 연구자들이 겪는 성폭력 비율 그래프를 설명했는데, 눈여겨봐야 할 점은 남성 연구자들의 가해자는 동료인 반면 여성 연구자들의 가해자는 상사, 즉 교수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맥 어리 교수도 여성들이 성폭력을 경험하는 상황이 얼마나 위계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지를 분명히 짚었다. 피해여성은 성폭력이 성폭력인지 몰라서 넘기거나 어쩔 수 없이 참는데, 참으면 참을수록 자신을 자책하게 되고, 나중에 알아차리는 경우에는 이미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맥 어리 교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핵심인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건 연구 부정행위와 같으니 규칙을 만들어서 용납하지 말라”는 것과 “성폭력을 방관하지 말라”는 것.


▶ 현장실습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어떻게 해야 할까. 맥 어리 교수가 말한 조언 두 가지


맥 어리 교수의 조언을 전하며 장윤원 씨는 “미국에서는 연구 지원을 받던 연구자가 성폭력을 저질렀을 경우, 펀딩 기관에 곧바로 보고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연구 결격 사항이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시사점도 전달했다.


여성 과학자/기술자는 ‘정말’ 없을까


참여자들의 그룹토론 시간에 어느 남성 개발자가 요즘 자신도 의문이 드는 게 있다며 이런 말을 했다. “동료 중에 여성 개발자가 있는데, 개발자 모임이나 세미나 같은데 가면 다른 남성 개발자들이 ‘여기 왜 왔냐, 누구 따라서 왔냐’고 묻거나 심지어 ‘남자친구 따라서 왔냐’며 개발자 취급을 안 해준다는 거다. 그게 짜증나니까 결국 안 가게 되고. 그러니까 여성이 안 오는 건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역시 개발자 중엔 여성이 없어’ 라는 말을 하는 거다.”


자, 그럼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과학기술 분야에서 생각나는 여성과학자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아니, 정말 없을까?’ 사기꾼 신드롬을 겪으며 문화적 차별과 배제에 맞서고 성폭력 위헙에 노출되면서까지 과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뛰어난 연구 성과를 만들어 온 여성 과학자들의 존재를 몰랐거나 무시해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스컬리 이펙트’(Scul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되었고 2016년부터 다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시리즈 ‘엑스 파일’(The X-Files)의 주인공이자 의사/과학자로 나오는 다나 스컬리에 영향을 받아, 여성들의 STEM 진출이 늘어난 효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스컬리는 TV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수많은 스컬리들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게으르게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걸스로봇의 말대로 이제 그런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이 말하는 과학은 흥미롭고 색다르다는 사실, 그걸 비밀로 묻어 두기엔 스컬리가 될 수 있는 소녀들이 너무 많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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