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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없는 촬영현장 만들기’ 변화가 시작됐다

성적인 장면 연기를 관리하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등장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그 촬영은 절 너무 힘들게 했어요. 매니저한테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장면은 찍고 싶지 않다’고 말했죠.” 배우 바네사 허진스(Vanessa Hudgens)는 영화 <스프링 브레이커스>(Spring Breakers, 하모니 코린 감독, 2012년)에서 쓰리썸 장면을 촬영했다. 그녀는 2012년 글로우 매거진(Glow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그 소회를 밝히며 촬영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201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 2013년)는 아름다운 레즈비언 러브 스토리로 호평을 받았지만, 6분이 넘는 섹스 씬은 의미 없이 과하게 길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인공 레아 세이두(Lea Seydoux)는 며칠에 걸쳐 계속 반복해서 섹스 씬을 찍어야 했던 부적절한 환경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데일리비스트(DailyBeast)와의 인터뷰에서는 촬영이 그야말로 “끔찍했다”고 밝혔다.


바로 얼마 전인 10월 28일엔 배우 사라 스콧(Sarah Scott)이 LA타임즈(LA Times)를 통해 촬영장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고발했다. 드라마 파일럿을 찍기 위한 촬영장에서 애정 씬을 찍던 중 상대 배우 킵 파듀(Kip Pardue)가 그녀의 손을 자기 성기에 갖다 댔으며, 이후 대기실로 불러내더니 보는 앞에서 자위를 했다는 거다. 심지어 킵 파듀는 “이건 미투(#MeToo)에 해당 안 되는 거 알지? 난 너의 고용주도 아니고, 널 해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말도 했다는 것도.


할리우드에서 미투(#MeToo)가 시작된 지 1년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이 영화/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사랑을 나누는 은밀한 장면 혹은 가장 깊은 욕망을 표출하는 열정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이유로, 불편하고 끔찍하며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일이 문제가 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연기를 빙자한 성추행을 저지른 ‘남배우 A사건’(관련 기사: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일 뿐이다 http://ildaro.com/7797)이 고발되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 ‘남배우 A사건’ 항소심 재판부에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며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기자회견. (2017년 3월 8일)  ⓒ일다


이 사건의 경우 결국 대법원에서 가해자에 대한 ‘유죄’ 확정과 처벌이 결정됐지만,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고 법적 절처를 밟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여전히 ‘연기를 빙자한 성폭력’을 고발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피해자 외에는 그것이 연기인지 성폭력인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감독이나 상대 ‘남배우’와의 위계 관계 때문에 고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제작환경 정말 괜찮은 걸까? 변화시킬 순 없는 걸까?’를 고민한 이들이 물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이 할리우드에서 미투(#MeToo)가 시작된 지 1년, 이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하는 일


미국의 대중문화 주간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은 10월 24일자 기사(How HBO Is Changing Sex Scenes Forever)를 통해, 미국 케이블방송사 HBO가 앞으로 자신들이 제작하는 모든 영화와 드라마에 성적 장면이 있을 경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전했다.


▶ HBO에서 제작중인 드라마 <더 듀스>(The Deuce) 촬영 현장 ⓒThe Deuce 페이스북 페이지


말 자체부터 생소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 무엇을 하는 사람인걸까? <롤링 스톤>에 따르면, HBO에서 제작 중인 드라마 <더 듀스>(The Deuce, 1970년대 포르노 산업이 합법화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 시즌2 촬영장에 등장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정사씬을 촬영하는 배우들을 위해 정신적, 신체적 지원을 했다.


배우가 무릎을 꿇고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멍들지 않도록 패드를 준비했고, 입에 뿌리는 스프레이 등도 준비했다. 또한 촬영 전부터 배우가 촬영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촬영 현장에서 직접 모니터링하면서 문제가 없는지 점검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더 듀스> 촬영 현장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한 알리시아 로디스(Alicia Rodis)는 ‘성적인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생기는 발언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쓴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감독이 ‘그래, 그녀의 가슴을 잡아!’라던가 ‘해 버려!’라는 말을 내뱉는 대신 ‘이 장면을 조금 더 열정적으로 만들 방법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식으로 배우와 소통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을 만드는 것도 그의 역할 중 하나다.


촬영 현장에서 알리시아 로디스의 지원을 받으며 연기한 배우 에밀리 미드(Emily Meade)는 “알리시아는 배우들이 섹슈얼한 장면을, 실제론 덜 리얼하게 찍지만 화면에선 더 리얼하게 보일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 HBO에서 제작중인 드라마 <더 듀스>(The Deuce) 중 한 장면 ⓒHBO


“섹슈얼리티 관련 촬영에서 보호가 필요해” 목소리 낸 배우


사실 에밀리 미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촬영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배우들의 환경 개선에 관한 방안을 제작진 측에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HBO 애슐리 코튼과의 인터뷰에서 “타임즈 업(연예 분야 3백 명 이상의 여성들이 모금을 통해 만든 성폭력과 성차별 피해자의 소송을 지원하는 펀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업의 문제점, 특히 이 산업에서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 또한 “배우 경력 내내 내가 얼마나 성적 대상화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에밀리 미드는 “생각해 보면, 위험한 일은 스턴트를 쓰고, 아이나 동물이 등장하는 촬영이 있을 땐 그에 대비한 전문가를 준비하는데, 젠더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취약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섹슈얼리티에 대해선 아무런 시스템이 없다”고 지적했다.


“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촬영이 있을 땐, 스스로 ‘해 본 적 있는 건데 뭐,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제 생각에 많은 배우들이 그런 장면을 촬영할 때 여러 방법을 통해 자신을 (연기와) 분리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더 듀스> 시즌1을 찍으면서 전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전 제 몸과 제 삶, 제 경력을 다 잘 연결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날 편안하게 하는지 밝혀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에밀리는 드라마 제작을 담당하는 크리에이터와 방송사인 HBO의 담당자를 찾아가 “성적인 장면들을 촬영할 때,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촬영이 좀 더 편안해 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에밀리의 요구를 귀담아 들었고, 곧바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인 알리시아를 고용했다. 제안을 한 사람과 이 제안을 수용한 사람들이 함께 방법을 찾아낸 거다.


▶ 유튜브 ‘Intimacy for the Stage’ 영상 중. 배우들이 성적인 장면을 연기하면서 겪는 문제들을 연구한 토냐 시나(좌), 인터머시 디렉터 협회를 공동 설립한 시오반 리차더슨(우)


배우들은 뺨 때리는 장면보다 키스 장면이 더 힘들다


‘인터머시 코디네이터’가 갑자기 어디서 툭하고 나타난 건 아니다. 이 코디네이터들은 ‘인터머시 디렉터 협회’(Intimacy Directors International) 소속이다. 성적인 장면 연출에 관한 토냐 시나의 연구가 바탕이 되었고, 그의 연구에 협력했던 알리시아 로디스와 시오반 리차더슨가 2016년에 함께 이 협회를 설립했다.


캐나다 방송 CBC 뉴스에 따르면, 연극 무대에서 활동한 연기자이기도 한 토냐 시나(Tonia Sina)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고 업계를 떠나는 걸 목격했다. 자신 또한 무대에서 연기했던 성적인 장면들로 인해 관객 5백 명 앞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토냐는 이 같은 일을 막을 순 없는지에 대한 연구를 2004년부터 시작하게 된다.


토냐는 WUWM 라디오(미국 위스콘신주 동부 밀워키 지역 채널) 방송에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제 논문은 본질적으로 방법을 연구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배우들이나 연출자들을 가르치고, 관련 정보가 안전하게 행해지도록, 성적인 장면들이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준비될 수 있도록 말이죠.”


토냐의 논문을 읽고 ‘인터머시 디렉터 협회’를 함께 설립한 알리시아도 어린 시절부터 배우로 활동했고, 파이트/스턴트(Fight/Stunt) 디렉터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그는 현장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곤 했다. 노동조합의 규칙에 따르면 ‘성폭력 장면’이 있을 경우 파이트 디렉터를 고용하게 되어 있지만, ‘성적인 장면’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뺨을 때리고 그리고 키스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 일이 있는데, 뺨을 때리는 장면은 함께 조율하고 논의해서 잘 끝났어요. 근데 배우들이 오히려 키스 장면을 더 긴장하는 거예요.”(허핑턴포스트 아만다 드버만과의 인터뷰, Meet The ‘Intimacy Directors’ Who Choreograph Sex Scenes, 2018년 5월 30일자)


뺨을 때리는 장면은 논의하고 합을 맞추면서 촬영하지만, 키스 장면은 ‘그냥 하면 되잖아’ 라고 치부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작 배우들은 키스 장면을 더 어려워한다는 것.


같은 기사에서 ‘인티머시 디렉터 협회’에서 일하는 클레어 워든도 그 부분을 지적한다. “배우들이 어디서 떨어지는 연기를 할 때 우린 매트를 요구하죠. 배우들이 다치길 원하지 않으니까요. 배우들이 감정적으로나 심적으로 고통 받는 건요? 우린 그걸 원하지 않잖아요.”


▶ ‘인터머시 디렉터 협회’(Intimacy Directors International) 웹사이트 메인 화면


‘성적인 장면은 연습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열정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배우들의 케미스트리(조화)가 더 리얼하게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토냐는 이에 대해 “그렇기 때문에 인터머시 코디네이터는 굉장히 전문적인 영역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단지 어떤 장면을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우들의 감정과 배우들의 조화를 살펴보고 그에 맞는 장면을 연출해야 해요. 어떤 핫한 애정씬이 있었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자, 이걸 너희도 해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과 함께 연습하고 대화하면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즉흥과 열정’을 끌어내고 그걸 캐릭터에 맞게 조절하는 거죠.” (유튜브 Intimacy for the Stage 영상 중에서)


이렇듯 촬영장을 감시하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경력, 그리고 다양한 방면의 노동이 필요한 ‘인터머시 코디네이터/디렉터’의 역할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협회에서도 정기적인 워크숍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협회가 생긴 이후로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관련 협회가 만들어져 운영 중이라는 사실도 고무적이다.


‘안전한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드라마 <더 듀스>는 작품성에 있어서도 호평을 받고 있지만, 사실 유쾌하게 응원할 수 없는 작품이다. 미투 운동으로, 다섯 명의 여성에게 고발을 당한 배우 제임스 프랭코(James Franco)를 제작진이 하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HBO 측은 자체 제작하는 모든 영화와 드라마에 섹슈얼한 장면이 있을 경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겠다는 꽤 진보적인 결정을 내린 반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정 작품이나 제작사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분명히 의미 있는 지점은 미투 운동 이후 문화예술산업 속에서 안전한 노동환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으며,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연극 제작 환경에서 대안이 모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도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이다”라는 외침이 확산되어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노력과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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