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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스쿨미투(School MeToo)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 by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미투(MeToo)가 언제 끝날 것 같냐고?


미투 이후, 주위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미투는 언제 끝날까요?’와 ‘미투는 이제 끝나가지 않나요?’였다. 그때마다 나는 미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되묻곤 했다.


미투(MeToo)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이것은 성폭력이 존재했던 곳 어디에서나 있어왔던 목소리이다. 말해왔지만 듣지 않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들어주고 믿어주는 이들이 많아졌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침묵의 시기를 끝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끝나가는 것은 미투가 아니라 침묵의 시대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거추장스러운 미투를 거둬낼 타이밍이 아니라, 여전히 침묵을 종용하는 낙후된 장소가 어디냐는 질문이어야 한다.


올해 초 문화예술계에서 미투가 쏟아져 나왔을 때, 전문가들은 그래도 문화예술계이니까 먼저 목소리들이 뭉쳐 나오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연루된 개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발화점이 조금씩 달랐을 뿐, 침묵의 카르텔은 곳곳에서 깨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스쿨미투를 불붙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용화여고 창문에 붙여진 포스트잇 문구들.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 제공)


‘학생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학교의 부정의’


스쿨미투(School MeToo)가 불붙은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과거에는 성범죄자들을 ‘변태’라고 불렀다. 왜였을까. 여성들 앞에만 나타나 자신의 성기를 내놓았다가 달아나는 남성, 벌칙이라며 여학생들의 겨드랑이 밑 팔뚝 살을 꼬집는 남교사, 다리 사이에 뭐가 있냐고 묻던 남교사, 여학생 속옷 끝을 잡아당기는 남학생들 모두 ‘변태’라는 이름 하나로 퉁쳤다.


하지만 그 단어는 남성들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집단적인 범죄행동-특권-을 표시하는 단어로 적합지 않았다. 특히 ‘변태’는 사회가 승인한 성규범 안에 포섭되지 않는 이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몰아넣음으로써 근대 성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사용되어온 단어다. 지금도 그러한 국가적 기획을 숨기고 ‘비정상적인 개인’들을 정돈해야 한다는 감각을 지금까지도 생산중이다. 때문에 성희롱을 밥 먹듯 하는 남성들을 ‘정상적인 남성’으로부터 떼어내고, 교정하거나 제거하길 청하면서 그들을 ‘변태’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 범주에 속했다.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행동의 교정을 요구받지 않았으며, 덕분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의 몸을 침해하는 남성들의 액션은 간혹 정도를 넘은 것으로 가늠될 수는 있어도, 남자임/남자다움/남자라면/남자니까 할 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정도껏 하라’는 경고 수준에서 수습되었다. 이때 피할 수 없는 그들과의 (무수한) 만남은 여성들에게 있어 ‘운이 없는 문제’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어떠한 의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재수가 없어서 그 학교에 들어가, 그 선생을 만나, 그 일을 당한 운 없는 나의 문제’였다. 적어도 그날 이전에는 그랬다.


▶ 10월 27일 서울시 교육청 앞, 10대 페미니스트 액션단 <작당모의>에서 제안한 #스쿨미투 포스트잇 액션. ⓒ일다(박주연 기자)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은 과거가 되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한 그날 이후, 사람들은 여자라서 죽고 다치고 침해당하는 이 문제를 운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문제-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이동시켜 왔다. 두려움이 용기가 된 건, 이 문제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돌아온 이 타이밍에서다.


여성학자 허라금은 위험시대에 재난을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 부정의’로 개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재난을 통해 평상시 인지하지 못했던 일상화된 제도와 관행, 방식 등에 내재한 불평등성과 취약성을 깨달은 이들은 피해를 더 이상 개인적인 불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허라금, 위험 시대 "재난"과 정치적 책임, ?철학연구? 108, 71-92. 2015)


이것이 설명해주는 바는, 끝나지 않을 미투의 물결이다. 스쿨미투가 이어질수록 숨어있던 학교의 부정의들이 한 겹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면, 이제 그것들의 소멸도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스쿨미투, 초중고 교육현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싸움


1990년대 중반 페미니스트들이 처음 대학 내 성폭력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대학에서도 ‘진짜로’ 성폭력이 일어나느냐며 의아해했다. 강의실에서, 실험실에서, 오리엔테이션에서, 엠티에서, 캠퍼스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모아 <대학, 성폭력박물관>(학내 성폭력 근절과 여성권 확보를 위한 여성 연대회의, 1997)이라는 이름으로 엮어내고 반성폭력 학칙을 만드는 등의 운동을 해온 결과, 적어도 지금은 사람들이 대학은 성폭력박물관(!)이라는 정도의 상식은 알게 되었다.


그곳은 예외적으로 성평등한 공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껏 배워온 차별적이고 이분법적인 성역할 각본을 실습해보고 집행하는 구체적인 장소였다. 초중고 시절이 학습의 장이었다면 대학은 실습의 장이었다.


▶ 지난 9월 11일, 서울 광남중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교사들의 성희롱, 성추행을 고발하는 포스트잇을 교내 곳곳에 붙이며 항의했다. (광남중학교#MeToo 제공)


2018년 터져 나온 스쿨미투는 20년 전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과 겹쳐진다. 차이가 있다면 초중고에서도 ‘진짜로’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묻지 않고, 성역할 학습기간과 실습기간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을 학교의 주체로 보지 않는 것도 똑같고, 학생이 주도하는 반성폭력 운동의 국면에서 학생을 미성숙하고 미숙한 존재로 매도하는 전략이 사용되는 것도 똑같다. 경험과 지식을 들어 내세우는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거부, 그들이 사용하는 식상한 무기다.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이 소위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성폭력이 왜 기본값인지 드러내는 싸움이었다면, 스쿨미투는 한국 사회의 성폭력 작동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재생산중인 초중고 교육현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싸움이라 할만하다. 방식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 학교는 탄생 시점부터 지금까지 여성을 ‘여자’로, 남성을 ‘인간’으로 길러내 왔고 그 원칙은 지금까지 변한 적 없다.


스쿨미투로 알려지는 성폭력 사례들은 놀랍지 않다. 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 여성들은 익히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학교는 (1)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한 후 (2)여성의 몸을 음란물로 규정하는 한편, 언제어디서든 음란물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훈육했다.(너의 허벅지는 성적대상이 될 수 있으니) 짧은 치마 입지마라, (너의 다리 사이는 음란하니) 다리는 오무리고 앉아라. 그 몸이 곧 죄라도 되는 것처럼 여학생의 몸을/여학생의 몸만 단속했다. (3)여성 몸이 곧 상품임을 알려주고(엉덩이 찰진데?) 직접 여성을 거래물로 삼으면서도(무릎에 앉으면 수행평가 만점 줄께, 옷 벗고 기다리면 만점 줄게), 거래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알렸다.(입술 색 창녀같다) (4)‘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여학생에게는 무력감을 주고, 남학생들은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키워냈다그리고 학교는 (5)‘여성’이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심지어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여성을 인간으로 인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학교에서 배움이란 무엇인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이러한 학교에서 모든 종류의 성폭력은 가능할 뿐 아니라 당연하게 일어난다. 성폭력의 메커니즘을 마스터하고 나오는 곳, 그곳이 바로 2018년 미투가 멈추지 않고 있는 바로 그 학교다.


▶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학생의 날 맞이 스쿨미투 집회가 11월 3일(토) 오후 2시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18일(일) 오후 7시30분 대구 동성로 광장에서 예정되어 있다.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지금의 학교를 만들어온 것은 누구인가!


학교는 근대의 발명품이었고 근대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역할 수행은 ‘허용된 제도와 규칙 아래’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폭력 등의- 부정의한 결과들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몇몇에 대한 징계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쿨미투 이후 지난 8월 11일 서울시 교육청이 교사 18명을 징계했고, 이중 6명이 성폭력 가해자로 경찰조사를 받고 있다고 알려졌다. 인천시교육청은 교사 50명에 대한 조사를 경찰에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공적 조치들은 성폭력 재생산의 관행을 시정하는 출발점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관련자를 이미 징계하지 않았냐’, ‘법적 조치들은 다 취했다’, ‘이제 끝났으니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할 것 1순위다. 스쿨미투 이후 ‘돌아갈 곳’은 없다. 과거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동해야할 장소는 과거의 위치가 아니라, 공동의 책임감으로 연결된 교실이어야 한다.


▶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와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이 지난 7월 13일 저녁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스쿨미투 문화제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된다”를 공동 주최했다. (용화여고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 제공)


그 기회를 지금 스쿨미투가 만들어내고 있다. 학교의 구성원들 중에서, 학생들이 먼저 책임지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 생활기록부에 기록될 것이 두려워 침묵하고 졸업까지만 참자고 다짐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 선택이 결과한 성폭력 관행에 대해 책임지기로 결정한 이들이다. 교사들도 학교 내 성차별 관행을 시정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뤄온 결과를 목도하며 광장으로 향했다. 방관자의 역할을 주로 담당해온 학부모들도 학교 성폭력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교육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어느 때엔가 학생이었으며 우리가 해온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학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스쿨미투를 마주하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있어야할 위치이고, 가져야할 시민적 책무다.  (김홍미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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