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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의 아이와 함께 지중해 난민이 되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에티오피아를 떠나 1년①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하였습니다. “Anything can happen in Macedonia road”라는 제목의 글 속 화자는 에티오피아 출신 여성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이슬람 성’을 가진 딸이 학교에서 겪은 괴롭힘


에티오피아의 상황은 꽤나 복잡하다.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의 거주민들은 대개 본래 그곳 출신이 아니고 다른 시골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라 여전히 시골 정서를 가지고 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교회를 믿는다. 노동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누구나 “저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에티오피아에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고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필자가 ‘정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한 갈래로 사실상 원시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오리엔트 정교회를 의미하며, 그 중에서도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Ethiopian Orthodox Tewahedo Church)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이슬람이 통치한 이후 소수 종교가 된 대부분의 정교회와 달리, 에피오피아에서는 오랜 세월 국교였고, 인구의 40% 이상이 여전히 신자다. 무솔리니 시절에는 파시스트 식민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를 겪으면서도 주류 종교로 살아남았다. 오늘날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테와히도’는 ‘하나로 만들어진, 통일된’이라는 뜻의 게즈어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라는 핵심 신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나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딸의 성은 이슬람식이다. 그게 정교회 주류 사회에서는 눈에 띄다보니, 아이가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괴롭힘을 받는다. 괴롭히는 아이 부모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은 딸의 성이 왜 괴롭힘의 이유가 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단다. 이게 내가 에티오피아를 떠난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내 딸이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을 원했다. 이름 때문에 스스로를 설명해야 할 필요 없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곳 말이다.


▶ 정교회 미사의 한 장면(위)과 에피오피아의 종교 분포를 보여주는 그래프(아래)  ⓒ출처: 2summers.net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 자체에 안심할 수 없었다. 강간을 비롯해 학교에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학교 내 문제들을 비판하면 정부에서 학부모에게 이를 입증해보라고 요구한다. 지역 사회에서도 그간 여자아이들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딸을 안심하고 기를 수가 없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전을 위해서는 딸을 경비원이 있는 비싼 학교에 보내야하겠지만, 나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냥 일반 학교에 보내는 건 위험하다. 학교는 심지어 남자아이들에게도 점점 더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만 아무도 인식을 못하거나, 알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학교를 바꾸고 만다.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부모님이 아이를 맡아주게 되었을 때쯤, 나는 최선의 방법은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딸이 무슨 나쁜 일이라도 당하면 나는 가해한 남자를 죽여 버리고 결국 감옥에 갈 텐데, 그러면 아이의 미래를 망치게 된다. 우리 동네에서 내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킬 때, 출생 서류에 나와 있는 대로 아이 아버지의 성을 썼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어머니는 아이의 성을 우리 아버지 것으로 바꾸게 하고 정교회 교회에도 다니게 했다고 한다. 성경 같은 것들을 배우는 종교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딸이 이해하지도 못할 내용을 떠드는 그 학교에 보내서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 다행히 지금은 어머니와 교회에도 다니면서 분위기를 더 익힌 덕에 학교생활이 좀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예전에 다니던 학교가 나았다. 덜 엄격했고, 아이들끼리 노는 시간도 더 많았다. 문제는 괴롭힘이었다. 아이가 스스로를 무리와 다르다고 느끼지만 왜 그런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는 늘 질문을 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나는 딸이 이름을 바꿔야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부모님이 보기에, 아이에게 그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 때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 더 나쁜 상황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내 딸은 어머니와 함께 있고, 나는 내가 독일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여져서 아이를 데려올 수 있길 바라고 있다. 딸은 내가 에티오피아를 떠나온 주된 이유이다. 둘 다 함께 오기에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 망명길이 바다를 건너고 도보로 먼 거리를 이동하는 힘든 여정이기에, 그 모든 것을 아이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 와서 먼저 비자를 받고 나면 딸도 데려오려고 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일 년 전이다. 내가 독일로 오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걸어서 시리아-터키, 바다건너 그리스-마케도니아로


몇 년 전에 리비아의 지중해 해변에서 에티오피아 기독교인 28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IS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 한 남성은 무슬림이었지만, “이들은 내 형제들이니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하며 혼자 풀려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사람도 결국 목숨을 잃었다. 28명. 몇몇은 목이 잘렸고 다른 이들은 총을 맞았다. IS는 그들이 기독교인이라서 죽였다고, 기독교인들을 일깨우는 의미라고 했다. 알 샤밥(Al Shabaab)이 케냐에서 150명의 아이들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로.


* 알 샤밥(Al Shabaab)은 소말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하드(이슬람의 적에 맞선 싸움이라는 뜻) 근본주의 군사조직이며, 조직명은 ‘투쟁하는 젊은이들의 운동’(Harakat al-Shabaab al-Mujahideen; Movement of Striving Youth)이라는 의미이다. 주로 농촌 지역을 무장군대로 통제하면서 기독교나 수피계열 무슬림 학교나 예배당, 공동묘지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박해한다. UN 및 서방 NGO 또한 적대해, 소말리아 남부로 가는 국제구호품이나 구호인력을 지속적으로 공격해왔다. 2014년 추정치로 최대 9천여 명의 조직원이 있고, 알카에다 이슬람 군사주의 조직에 충성 서약을 하기도 했다.


프로파간다 및 조직원 모집을 위해 소말리아어, 아랍어, 스와힐리어, 영어로 자체 라디오 방송국과 트위터 계정 등을 운영하며, 10대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포럼이나 채팅방에 접근한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정부는 알 샤밥을 알카에다와 더불어 ‘세계적인 위협’(global threat)으로 간주하고 군사 작전으로 대응해왔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관광산업이 발달했으며 국제기구와 미디어의 허브인 케냐에서 근래 테러 공격을 자주 일으키고 있다. 케냐의 독립 미디어 TUKO(tuko.co.ke)는 ‘알 샤밥과의 싸움’(Fighting Al-Shabaab)이라는 별도의 채널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


나는 에티오피아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우선 시리아로 갔다. 그리고 시리아에서 터키로 걸어서 갔다. 일직선으로 쭉 간다면 국경까지 단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우리 일행에게는 3일이 걸렸다. 겨울이었고, 가는 길에 온갖 검문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딸을 터키로 데려와 같이 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터키에 한동안 머물러 보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무슬림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사람들은 친절해도 터키 사회에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학교에선 영어 수업을 전혀 하지 않았고 수업료도 비쌌다. 도저히 내가 감당할만한 학비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가 터키에 와서도 학교 괴롭힘을 계속 겪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원래 계획대로 유럽 망명을 위해) 그리스 아테네로 가기로 했다. 그리스 국경에 이르기까지 5개월이 더 걸렸다. 나중에 아테네에 도착한 뒤에 거기에서 5개월을 더 있었다.


터키에서는 우선 (보트로 건널 수 있을 만큼) 바다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보트에는 어른 36명, 아이 8명이 타고 있었다. 정원은 24명이었다. 자리가 너무 좁아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임신 초기였고 내 주변에 아이들이 가득 끼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겹겹이 눌려 공황 상태였다. 항해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지만 그래도 너무 공포스러웠다. 바다 한가운데 어떤 섬이 있어 보트가 그 주변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러다가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소금물이 입으로 막 들어갔다.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쉽지 않았다.


▶ 네덜란드의 아티스트 Gerad Wiersum이 직접 목격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여름휴가로 레스보스(Lesbos)에 간 화가는 까만 고무보트 2대가 해변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에는 그저 의아해했다고 한다. 뒤늦게 난민들의 험난한 피란 현실을 알고, 이 그림을 그려 수익금을 난민 기금에 기부하기로 했다. 본 작품 ‘그리스 해안의 난민들’(Refugees at Greek Beach)은 온라인 미술품 거래 사이트 사치 아트(Saatchi Art)에서 판매 가격 3,250달러로 올라와 있다.


보트에 탄 누구도 길을 잘 모를 경우 항해가 대여섯 시간으로 길어지고, 그러다 사고가 난다. 떠나기 전에 우리는 짐을 다 두고 타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몇몇 시리아인들은 아테네에 가면 어차피 필요 없을 짐을 잔뜩 갖고 탔다. 공간이 좁아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연료가 충분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보트가 가다 서버리면 쓸 수 있도록 여분의 기름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두었고, 덕분에 그나마 안전했다. 연료가 없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가는 길에 아테네 경찰과 터키 경찰을 만났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그리스 해안에 닿았을 때는 그리스 군대가 우리를 맞았다. 열여덟, 열아홉 되어 보이는 아주 어린 남자들이었고 상당히 친절했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고 쉬라고 했다. 내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안다. 그냥 내 경험이 그랬다는 것이지, 항상 이 정도로 괜찮은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들은 끔찍했다. 그리스에서는 지문을 채취했는데, 국경에서 하는 의례적인 기록용이라고 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들어온 이주민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는 난민신청자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그랬을 경우엔 따로 카드를 발급하고, 유럽연합이 지문 채집을 하도록 의무화해 놓았다. 하지만 현재 그곳 상황으로는 이것도 다 별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필자가 언급한 지문 채집이란, 세계 최초의 다국적 생체 정보 시스템인 유로닥(EURODAC; European Dactyloscopy System)을 의미한다. 유럽연합으로 들어오는 모든 난민 신청자의 지문을 채취하고 성별, 가족관계, 입국 기록, 고유번호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해 공유하는 것이 골자다. 더블린 조약에 의거하여, 유럽연합 각국의 개별 난민에 대한 책임 소재를 가리고 난민들의 ‘망명지 쇼핑’을 막기 위한 용도로 개발되었으며, 2003년 1월 첫 시행됐다. 그러나 난민 수용을 둘러싸고 국가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각 국가 및 센터 상황에 따라 시스템 운영에 차이가 있어 유로닥의 실효성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거기서부터 여정을 계속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비용이 많이 들었고 성공하지는 못했다. 기차로 마케도니아에 가기 위해 내 반려자(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의 삼촌과 한달 동안 일을 한 적도 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거의 한달 동안 걸었다. 세르비아에 도착해서 이틀, 헝가리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다 합치면 26일 간의 여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기찻길을 따라 걸었다. GPS는 없었고, 방향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길에선 마피아를 많이 만났다. 첫번째 마피아는 사실 경찰이었다. 우리한테 돈을 뜯어내고 통행을 허가했다. 한 시간 뒤에 다른 마피아 무리를 만났다. 내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무슬림이었는데, 이 마피아는 무슬림을 혐오했다. 그들은 내 목걸이에 십자가가 걸린 것을 보고 나는 그냥 보내준다고 했다. 임신 중이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 말고는 일행 중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그냥 남겠다고 했다. 아무데도 안 간다고 말했다. 그들 또한 돈을 요구했고,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두꺼운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무슬림을 혐오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보여줬다.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번역자 노트] 난민 법률자문 자원활동가 샬롯테와의 대화


“그리스의 섬 키오스(Chios).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면 아래층 사무실로 내려간다. 오늘은 이곳 읍내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시골에 있는 난민캠프에서 업무를 보는 날이다. 법률 상담을 신청한 난민들과 차례로 면담한다. 간단한 질문일 경우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지만, 어떤 케이스들은 조사가 더 필요해서 숙제로 싸들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캠프에 다녀온 다음날은 보통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난민법과 정부 현황을 확인하고 공식 편지나 보고서를 쓴다.


이 섬은 터키 본토에서 5km 떨어져 있어 보트를 타고 건너온 난민들로 북적인다. 이들의 숙소는 허술한 컨테이너 건물이고, 지원받은 음식과 생필품들은 정말 형편없다. 그동안 베를린 난민숙소 기준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겐 충격적이다. 주어진 시간이 한 달이니, 아마 적응이 겨우 되었을 때쯤 돌아가겠지.


그리스 난민 시스템이 거의 독일 것을 본떴다고 하더니, 실제로 업무를 익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우리 법률지원 센터가 막 세워지던 작년(2017년) 3월에 비하면 상황이 한결 낫다. 그때 활동가들은 불신의 시선부터 견뎌야 했다. 돈도 없는 단체가 들어와서 뭘 하겠냐, 좀 저러다 나가겠지, 너무 믿고 의지하면 안 된다… 다른 시민단체도, 난민들도 우릴 그렇게 바라봤다.


키오스 섬처럼 난민 유입 인구가 많은 핫스팟(hotspot) 중 많은 곳들이 지난 2016년 3월 ‘EU-Turkey Deal’ 이후로 급격히 열악해졌다. 3월 20일 이후로 그리스에 들어온 ‘제3국 시민들’ 중 난민 신청이 안 된 이들을 터키로 바로 송환하는 조치가 시작되어 대부분의 ‘발칸 루트’가 폐쇄된 것이나 마찬가지. 섬으로 입국한 사람들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리스의 난민 처우가 이렇게 형편없으니 아무도 여기 정착하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속히 떠나고 싶어 하는데, 이 조치 때문에 오도 가도 못 하니 난민들의 심리 상태도 더 위태로워진 것 같다.”


위 이야기는 독일의 시민단체 ‘Refugee Law Clinic e.V.’에서 법률 자문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 샬롯테(Charlotte Kneffel)의 말을 재구성한 것이다. 본문에 나온 에티오피아 난민 여성의 보트 항해 이야기를 번역하면서, 나는 그리스 섬들의 상황을 더 알고 싶어 베를린에 있는 친구에게 스카이프(skype, 인터넷 화상통화) 만남을 청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도 등지로 1년간 배낭여행을 다녀온 샬롯테는 다양한 문화에 부쩍 흥미가 생겼다. 그때 난민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봉사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2013년경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샬롯테에게 ‘난민’ ‘이주민’ ‘외국인’은 큰 차이가 없는 말들이었다. 그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게 참신했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게 재미있었다.


대학에서는 처음에 철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사회학, 문화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그 중에서도 자연스레 ‘난민 주거법 세미나’ 과목에 끌렸다. 처음에 법은 자기 분야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민법을 전공하는 진보적인 법학 동아리에서 만든 그 세미나는 굉장히 비판적인 관점에서 법을 해체하고 대안을 물었다. ‘법학은 지루하고 고지식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졌다.


법은 사회구성원들의 구체적인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본 바탕인데, 사람들을 구분하고 나아가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독일법의 기본 명제 중 하나는 ‘시민-비(非)시민’이었고, 그 명백하게 차별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권력과 기회를 불균등하게 나눴다. 동아리 학생들은 법률가들이 법의 한계와 불평등을 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거기 감화된 샬롯테에게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갈등과 충돌, 불의가 너무 많았다. 이른바 ‘정치화’되는 과정이었다.


샬롯테는 이듬해 난민법 전문 상담사가 되는 직업 훈련(Ausbildung) 과정을 1년간 밟았다. 강좌를 듣고 엠네스티에서 한 달간 인턴십도 했다. 현 난민 시스템에 법률 자문 체계가 부족한 상황이라 훈련 과정은 무료였다. 2014년은 독일에 들어온 난민 숫자가 사상 최대였다. 구 템펠호프 공항 부지에 세워진 난민캠프는 2천명을 ‘임시 수용’했지만 그 임시 기간은 2년이 넘기도 했다. 샬롯테는 일주일에 한번 4시간씩 그런 캠프를 직접 찾아가 상담 봉사활동을 했다.


제 발로 법률자문센터를 찾아갈 만큼 구체적인 질문을 아직 갖지 못한 난민들이 많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일종의 모의 면담이었다. 이야기 속에 ‘망명 사유’가 명확히 드러나야 하고, 그 사유는 정부의 실제 망명 지원서 심사 기준 및 항목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므로, 마냥 감정에 치우치며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매주 캠프에서 수많은 이야기 - 대부분 원통하고 안타깝고 슬프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면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잔뜩 쌓였다. 끝나서 친구들을 만나 몇 시간이고 다 털어놔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를 위한 심리 지원 제도가 있긴 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딱한 사정을 듣다못해 지원서 검토나 이의제기 신청서 작성 일을 맡으면, 봉사 시간 외에도 꼬박 이틀을 걸려 20-30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써냈다. 모르는 부분은 인터넷으로 찾아 공부해가면서 완성했다.


▶ 독일에 들어온 난민 숫자가 사상 최대였던 2014년, 샬롯테는 일주일에 한번 난민 임시캠프를 찾아가 상담 자원활동을 하며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다.


하리타: 샬롯테, 나는 독일 난민 시스템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키워드는 ‘통제’라는 생각이 들어. 여러 가지 생계 지원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안정적으로 나오는 장점은 있지만, 그만큼 신원이나 활동 범위를 철저히 통제하잖아. 그런 통제에 힘을 많이 쏟다보니 심사에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넌 어떻게 생각해?


샬롯테: 내 생각에 현 이주난민법은 철저하게 인종차별적이야. ‘우리 대 그들’(us versus others)이라는 프레임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 난민들에게 노동허가를 줄 때도 의도적으로 비숙련 저임금 일자리로 유도한다거나, 난민들이 정착하는 주거지를 교묘하게 분리시킨다거나. 네 말대로 독일 정부의 지원 규모나 범위가 넓긴 해. 그런데 엄청 잘 사는 나라잖아. 부유한 자원을 가지고 얼마든지 시스템을 다르게 운영할 수 있다고 봐. 네가 터키나 레바논 시스템을 좀 공부해 봐도 좋을 것 같아. 터키에서는 시리아 난민들한테 불과 몇 주 안에 체류증을 줘. 거기도 인종차별이 있지만 양상은 좀 다르지. 레바논은 인구의 절반이 난민 출신이래.


하리타: 독일을 본받지 말라는 거구나. 나도 독일이 꼭 모범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터키? 터키의 인종차별은 ‘백인-비(非)백인’같은 절대적 인종 위계 사회는 아니지. 종교나 민족으로 인한 불화나 갈등이 문제야. 비백인 난민에게 체감되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를 거야. 샬롯테, 난민 지원 활동하면서 힘들지 않아? 화가 나거나 절망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희망이 있으니까 계속할 수 있는 거야?


샬롯테: 좌절감 느낄 때가 너무 많아. 뭔가 나은 방향으로 변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상담하면서 고문, 범죄, 전쟁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인간이 왜 이렇게 폭력적일까.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 나쁜 점, 악한 것만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 탈출구가 있나? 그래도 희망적인 것? (망설이다가) 내 안의 원동력? 난민법의 본질이 인종차별이라면,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게 내 신념이야. 적어도 내 마음 속에는 국경이나 국가 같은 게 없어. 다 거부해.


얼마 전에 한 캠프에 법률상담 봉사를 하러 갔었어. 독일 시민들도 많고 외국인, 난민들도 많이 섞여 있는 다양한 그룹이었어. 사실 경험이 서로 다르니까 공통 주제를 갖고 길게 대화하는 게 쉽지 않더라.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다 같이 어울려서 춤을 춘 적이 있어. 음악이 뭔가 혁명적이고 강렬한 게 나왔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춤을 추는 거야. 막 손 맞잡고 흔들면서. 나도 미친 듯이 춤을 추다가 옆으로 빠져나왔어. 뭔가 속에서 복받쳐서 한참 엉엉 울었어. ‘아, 이게 내가 원하는 건데’, ‘이런 게 내가 찾아 헤매는 거다.’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 아마도 거기서 에너지를 많이 얻었겠지? 이런 식이야. 수많은 좌절, 실망 중에 실가닥 같은 희망을 만나.


하리타: 오, 나 지금 듣는데 눈물 나.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아. 샬롯테, 부탁이 있어. 네가 베를린에서 활동을 많이 하니까 난민 이슈에 대해 나보다 정보가 훨씬 많을 거야. 혹시 바덴 뷔르템부르크 주에서 내가 참여할만한 교육이나 행사 소식을 보거든 알려줘. 올해는 나한테 난민 주제에 입문하는 해야. 파도 파도 모르는 게 계속 나와. 많이 읽고 생각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쓰려고 하는 중이야. 내년에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 많이 만나고 뭔가 활동을 더 하고 싶어. 나 스스로가 불안정한 외국인 신분이고 독일어도 아직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있을 거야. 응원해줘.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하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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