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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연애’ 밖에서 관계와 사랑을 고민하다

[Let's Talk about Sexuality] 이십대의 섹슈얼리티 탐구 여정 (홍혜은)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연애의 종착지는?


나는 항상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연애는 내 인생의 목표이고, 삶의 중심이었다. 마지막 ‘정상연애’가 끝났을 때, 나는 한참을 방황했다.


스무 살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결혼과 가족’이라는 과목에서는 사랑에 대해 다룬 EBS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서로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커플 몇 쌍을 데려다 놓고 사랑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관찰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사랑’의 수명이 끝나는 것은 길어야 3년이라고 했다. 어쨌든 실험에는 개념의 조작적 정의가 필요한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사랑을 특정한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분출하는 상태라 정의했다.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도파민과 옥시토신 등의 호르몬이라고 했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유물론자가 되고 싶어 했으므로, 그 정의를 믿었다.


괜찮은 이성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심장의 두근거림, 상대를 성적으로 유혹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마음,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스킨십이 진전될 때의 짜릿함. 이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었고,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 연애였다. 그러니까, 내게 연애는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 '연애'의 이미지 (출처: pixabay)


하지만 나의 연애는 주로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일대일 독점적 관계 맺기의 시도, 소위 ‘고백’을 해 오는 시점이 곧 이런저런 ‘밀고 당기기’가 있은 후 한 달이 지난 시점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구속되었다고 인지되는 순간 짜릿함과 흥분은 사라졌다. 내 이름 대신 ‘누구누구의 여자친구’로 불리는 순간, 어김없이 숨이 막혔다. 남은 것은 꾸준히 고정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지루함, 그 다음은 계산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제대로 된 거래를 했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 사회에서 일대일의 연애 관계는 ‘정절’을 요구했고, 정식으로 외부에 선언된 상대가 아닌 다른 상대를 만나 앞서 언급한 일탈적 감정을 느끼는 일은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큰 이변이 없이 한 사람과의 연애가 지속된다면, 종착지는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결혼은 인생의 너무 많은 것을 거는 거래였기에, 그런 관계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나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특성은 내가 겪은 성장기 시절의 가난과도 큰 연관이 있다.


거래로서의 ‘정상연애’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왜 정상연애와 그에 이어지는 결혼이 ‘거래’라고 생각하게 되었나?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통용되는 문법이 그랬다. 여성의 젊음과 아름다움, 재생산 능력이 남성의 재력과 교환되어서 ‘4인 정상가족’의 안정적인 삶이 완성되었다. 나는 여성이었고, 그래서 남자들을 유혹했다.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성애의 문법대로 말이다.


상대에게 성적으로 흥미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도, 성적인 것에 매우 익숙한 여성은 아니라는 제스처를 동시에 취해야 했다. 그 중간 어디를 줄 타는 일은 매우 까다로웠다. 어느 순간에는 밑천을 모두 드러내야만 거래가 가능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모든 밑천을 잃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불안했다. 정말로 ‘이 정도를 가지고’ 완전히 일대일 독점적 연애관계에 들어가도 되는 걸까? 그 관계가 일정 시간 동안 무사히 유지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결혼해도 되는 걸까? 나는 마치 중고거래 사이트를 이용하는 서투른 유저처럼 굴었다. 이렇게 제안을 넣어도, 이만큼 에누리해도 거래가 성사될까? 늘 고민했다.


하지만 어느 때는 내 쪽이 너무 손해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도 단호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와의 거래를 요령 있게 무효화시키는 건지 잘 알지 못해도, 일단은 중단시키고 봐야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무리하게 관계를 종료시켰다. 그럴 때 상대는 때로 폭력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완벽한 결혼에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결과값이 머릿속의 계산기에 찍히면 나는 그 연애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다.


앞서 말했듯, 내가 갖고 있는 교환 가치는 고작 나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재생산 노동을 능숙히, 그리고 기꺼이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지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진 가치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자연히 알아챘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관용구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가치가 있었고, 내가 그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인 인정이었다. ‘이렇게 괜찮은 연애를 하고 있는 나’. ‘장차 가부장제 시스템 내부 정상가족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정착할 나.’


이십 대의 연애


사회는 연애를 못 하는 사람들을 ‘연애고자’,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본 사람을 ‘모태솔로’라고 했다. 연애를 오래 하지 못하면 ‘연애세포가 죽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온 사회가 연애를 권했다. 그러면서도 문란한 여성은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니, 자연히 상대를 성적으로 유혹하려 시도하면서도 느낀 바와 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고착되었다.


‘정상가족’ 안에 정착하지 못한 여성노인이 가난하고 쓸쓸하게 죽고 마는 서사가 범람했다. 빈곤한 노년기에 대한 공포, 고독사의 공포가 대기 중을 떠다녔다. 특히 나같이 저소득층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친부모에게 도저히 안정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나의 빈약한 자존감은 연애를 통해 채울 수 있는 것이라 배웠다. 연애를 하면 상대는 보통의 관계에서 베푸는 것 이상의 호의를 보였고, 나를 내가 느끼는 스스로의 가치보다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런 관계가 반복되자, 연애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항상 다시 시도했다. 그것이 내 이십 대 내내의 연애였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연애를 시도했을 때, 나는 드디어 가장 완벽한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 연애를 결혼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하면, 나는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 모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실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애는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은 계속 바뀌는데, 역할은 거기서 거기인 느낌이었다.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단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는 오지은의 노래 가사대로 말이다.


▶ 포털 사이트에서 “연애세포” 검색 결과 캡처 이미지


낭만화된 사랑


어릴 때 내가 보고 자란 부부관계는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여성으로서 나의 섹슈얼리티는 숨겨야 하는 것, 억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내 상의를 목 끝까지 끌어 올려서 단추를 잠가줬다. 끈으로 된 민소매가 가슴께를 조금 많이 드러내게 되는 것 같으면 어깨끈을 위로 잔뜩 끌어올려 묶어 줬다. 엄마가 잠깐 옷가게를 할 때, 내가 청치마를 입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온 동대문의 도매 시장을 뒤져서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청치마를 구해다 줬다.


그러면서도 ‘여성스러움’을 잃으면 안 됐다. 아버지는 자기의 첫사랑이 그렇게 하고 다녔다면서 나를 데리고 미용실에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단발머리를 하게 시키거나, 무테안경을 쓰게 했다. 사실 그는 목사였는데, 설교시간에는 종종 부부관계가 좋으려면 남편이 퇴근할 때 옅은 화장을 하고 좋은 옷차림을 한 채로 상냥하게 맞아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적으로 글쓰기’를 시도할 때마다 여러 지면에서 호명해야만 했지만, 나는 그를 호칭하는 데서 여전히 갈등을 느낀다. 처음 고민을 털어놓건대, ‘아빠’는 너무 가깝고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권위를 부여해 버리는 기분이 든다. ‘맘충’을 미러링하여 만들어진 ‘애비충’이라는 메갈리아의 워딩은 구조적인 문제, 즉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 관계를 매우 잘 조명한다. 이 표현을 듣고, 나는 그런 관계 안에서 딸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경멸 같은 것을 잘 드러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표현의 ‘정치적 올바름’은 차치하고도 말이다. 그럼에도 늘 고민 끝에,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친밀함보다는 거리감을 표현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주로 쓰게 된다.)


엄마와 아버지, 둘의 관계는 어땠냐면, 어릴 적 내 생각에는 아마 그 둘이 세상에서 제일 서로를 ‘안 사랑하는’ 부부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툭하면 엄마를 비하했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를 못견뎌했다. 엄마는 둘이 사랑했다기보다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결혼했다고 자주 말했다. 둘은 혼기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강제로 이어주려는 신학교 동기들의 ‘등 떠밀기’로 인해 결혼했다.


최근 둘의 통화를 녹음한 걸 들었는데, 그가 엄마에게 “세상에 아무도 너 같은 년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내가 이제 만 삼십 살이니까- 삼십 년째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혼인 관계 안에 들어갈 남성은 여성에게 죽고 못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마 사랑하는 상대를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대하지는 못하리라고 멋대로 착각한 것이다.


데이트 폭력, 부부간 폭력이 흔히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정말로 놀랐다. 친구든, 연인이든, 어떤 종류의 위협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관계를 종료시키고 달아나던 내가 모르던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정말로, 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는 어쨌든 아버지가 엄마를 벌레처럼 대하던 그런 식보다는 존중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리라 믿었다.


어쨌든 어릴 적 내가 둘의 관계에 폭력이 존재한다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것은, 확실히, 그가 내게 일찌감치 주입한 ‘고분고분한 여성(아내)상’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요구한 괜찮은 딸, 즉 괜찮은 여성의 역할을 하느라고 다른 식의 판단을 해 낼 능력을 제대로 기르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정상연애의 끝


마지막 연애가 끝나버린 것은 연애 후 만 5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가 햇수로 6년을 만나고도 여전히 이십 대인 어린 나이만 아니었다면 결혼을 하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상연애의 문법을 충실히 따랐다. 연애하기로 되어 있던 기간 내내 다른 남자와 섹스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금전적 부담도 최대한 함께 해냈으며, n00일의 선물과 편지, n주년만의 여행을 모두 기념했다. 나는 늘 가난했고, 원가정으로부터의 지원 없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진짜로 돈이 없을 때는 저금통을 탈탈 털어서 깜짝 도시락 이벤트 같은 것도 준비했다. 그 사람과 이대로 결혼할 수 있을 줄 알았을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는 나와 잠깐 헤어져 있기로 약속한 한 달 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가끔 나를 만나줄 때마다 그와 나를 여기저기 비교했다. 그때마다 나는 나와 비교되는 그보다 잘난 구석이, 정말로, 단 한 가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벌이며 집안, 직업, 둘이 가진 공통의 관심사까지 말이다. 심지어 거식증 초기 증세 때문에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은 나를 보며 “지금 만나는 사람은 통통해서 보기 좋은데, 너는 지금 너무 비쩍 말라서 보기 싫다”고 했다.


나는 내가 가진, 그러나 그 동안 멀쩡한 여자친구, 아니, 아내 후보 역할을 수행하느라고 애써 숨겨 왔던 가난과 불행 같은 걸 이제라도 말해 주면 내가 불쌍해서라도 그가 나를 더 신경 써 줄까 했다. 그런데, 그쪽은 심지어 물리적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자애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쪽팔려서 말하기 어려운데, (사실 이 글이 그간 진도가 도통 안 나간 것은 이 쪽팔림을 다시 직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여자가 불행한 걸로까지 나를 이긴 것 같은 게 너무 분해서” 눈물을 펑펑 흘린 적도 있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건강하지 않았던지, 물리적인 것의 빈도가 더 높은 가정폭력과, 언어적이고 경제적인 학대가 좀 더 주류를 이루는 가정폭력을 저울에 놓고 비교를 했다. 어떤 것이 더 심각한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소위 ‘피해자 배틀’이었다.


아무튼 외부에서 보기에는 눈 뜨고는 차마 못 봐 줄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나서야 조금씩 연애와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관념을 재정립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 관계의 수평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관계는 반드시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사실, 그간 내가 ‘연애 관계’에서 거래하려고 했던 것들-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재생산력, 남성의 재력이 서로 거래되어서 결국 여성이 남성의 보호 안에 들어가는 그 구조 자체가 가부장제 내에서 고안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것처럼 계산적이지 않아 보이고, 그저 낭만적이고 로맨틱해 보이는 연애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둘이 마치 원래는 한 몸인 것처럼, 함께 스케줄러를 공유하면서 일정을 최대한 서로에게 맞추고, 완전히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영국 SF드라마, 2017)를 보면, 그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남편의 뇌 일부에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뇌를 전이시키는 것이다. 둘은 정말로 한 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남편은 머릿속에서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아내를 못 견디게 된다. 남편은 이윽고 아내를 ‘일시정지’시키기 시작하더니, 움직이지 못하는 원숭이 인형에 옮겨버린다. 나는 맹목적인 합일성의 추구가 이런 관계를 만들지 않을지에 대한 우려는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의 연애를 제대로 된 사랑이라 말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 일러스트: 정은의 빨강 그림판


비독점적 관계의 시도


그래서, 나는 이제 일대일의 독점적인 관계망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까, 거기부터는 질투가 문제였다. 질투는 삶을 모두 무너뜨릴 것처럼 나를 덮쳤다. 이미 애인이 있는 사람을 몰래, 속이면서가 아니라 솔직히 얘기하면서 대등하게 만나려고 세 번 시도했고, 세 번 다 처참하게 망했다.


아무리 원론적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그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평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일등 애인석’의 부품으로서 그 자리에 딱, 하고 끼워 맞춰지지 않는 이상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불량품이 된 것만 같았다. 이전 애인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것처럼, 나는 비교 대상이 될 때에 언제나 둘 중 부족한 쪽이 되고야 마는 것만 같았다. 나의 연약한 자존감은 매번 바스라졌다.


하지만 이미 근본적인 문제를 알게 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상처받으면서도 매번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세 번의 실패 이후에야, 조심스럽게 지금의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관계를 ‘연애’라고 이름 붙이는 데도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가 아는, 이런 식의 관계를 지칭하는 언어가 그것뿐이라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던 것뿐인 것 같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호칭이 주는 애틋한 어감을 싫어하지 않는다. 지금의 애인과는 처음부터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재미가 있었다.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연애 관계도 내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그 사람이 그 관계 안에서 잘 처신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기존 이성애 관계에서 내가 하려고 애쓰던 역할, 즉, ‘예쁘고 젊은 여자’의 전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나 스스로가 매력적인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게끔 하는 조건을 잘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십대 시절 나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시켰을 때만 탐구할 수 있던 욕구들이다. 나는 전형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한 작은 체구를 갖고 있지만, 어쨌든 상대를 챙겨 주고 아껴주고 장악하는 위치에 있다고 느낄 때에야 기쁨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욕구가 있었다. 이제까지의 전형적인 일대일 이성애 관계에서는 그런 욕구를 만족시키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그와의 관계에서는 가능했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는 내가 수동적인 위치밖에는 취할 수 없었던, 외부에서부터 ‘침입 당한다’고 느끼는, 한없이 취약해진다고 느낀 삽입섹스에서 오르가즘 대신 지루함을 느꼈다면, 안전한 피임을 담보한 상태에서 역할을 자유롭게 바꿔 가면서 마치 역할극처럼 해내는 섹스는 훨씬 즐거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토록 신기한 이 연애의 초기에 그와의 관계를, 어떨 때는 게이 커플의 관계 같고, 어떨 때는 레즈비언 커플의 관계 같아 신기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정작 전형적인 이성애 커플의 ‘롤플레잉’에 해당한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그는 주변에서 “분명 ‘게이다’가 돌았는데 스트레이트(이성애자)였다니 좀 이상하다”고 말할 만큼 연애관계에서 기존의 성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데는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를 어떤 정체성 키워드 안에 줄 세우는 데는 크게 흥미가 없고, 그가 그렇게 관계 안에서 ‘말랑말랑’한 사람이어서 좋고, 내가 ‘말랑말랑’한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내가 내 정체성의 정치적 위치를 바이섹슈얼, 폴리아모리 엄브렐라 안에 놓고 더 탐구해 나가는 데에는 관심이 있다. 의미 있는 싸움에는 끝까지 연대할 예정이다.)


사회가 호명하는 관계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


좀 더 이야기를 진전시켜서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의 애인을 포함하여, 지금 이 연애를 결혼으로 그대로 골인시키기 않기 위해 나를 둘러 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애를 쓰고 있다. 일대일 독점적 관계가 완전함을 이루려면 결국 결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은 비단 이성애자 커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나 많은 바이, 레즈비언, 게이들이 동성 파트너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결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 있는 법적인 지정 성별이 주어져 있는 상태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다른 관계로 정체화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기혼 여성’, ‘아내’, ‘며느리’, 더 나아가 ‘엄마’의 틀 안에서 인식하고, 그런 역할을 해내기를 기대한다고 할 때, 내가 온전히 그 기대를 벗어나 행위하고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온전하고 다정한 가정이더라도, 온통 그 가정의 ‘가장’ 역할을 기대받을 때, 그가 그 기대를 벗어난 역할을 자유롭게 해낼 수 있을까? 우리를 둘러 싼 식구들, 친구들은 어떨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답은 ‘아니오’였다. 제도는 힘이 세고, 사람의 생각은 주어진 틀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폴리아모리’에 대한 고민을 넘어, 결혼하지 않고도 제도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계약을 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폴리아모리’ 선언을 넘어 ‘시민결합’, 즉 ‘생활동반자법’(파트너등록법)을 지지하는 사람이 된 이유다. 나의 섹슈얼리티 탐구 여정 끝에는 그런 식의 결론이 있게 됐다.


▶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는 진짜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다만, 가부장제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서 관계 맺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있는 모습 그대로’는 내가 한때 추구하던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느 집단 안에서든 누군가에 대한 역할 기대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뿐이다. ‘그런 것이 없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그것이 없는 상태로 옮겨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여성주의가 정의한 가장 전형적인 가부장제 안에서의 관계 맺기, 그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한 일 같다. 그 밖의 다른 상상을 해나갈 수 있는 곳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 나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지 않고 생각한 바를 좀 더 잘 실현해나갈 수 있는 다른 식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기.


‘섹슈얼리티’는 지금껏 나를 너무 많이 쥐고 흔든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 지점이 내가 나의 섹슈얼리티를 가장 잘 고민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고민의 과정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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