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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집시’ 박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라드밀라 아닉①


독일에서 망명신청자(asylum-seeker) 신분으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이 연재는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 번째 에세이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The Europeans don‘t like us in “their” Europe)의 주인공은 로마니 민족인 라드밀라 아닉(Radmilla Anic)으로, 세르비아에서 자립을 원하는 여성들을 돕는 사회복지단체를 이끈 인물입니다. [편집자 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는 세르비아에서 온 로마니 민족 여성이다


먼저 나를 소개하겠다. 나는 세르비아에서 온 라드밀라 아닉(Radmilla Anic)이다. 나는 세르비아에서 10년 동안 싱글맘들, 특히 ‘로마니’(Roma, Romani) 민족 여성들을 위한 조직을 이끌었다.


※ 로마(Roma), 로마니(The Romani)는 흔히 집시(gypsy)라고 불리는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다. ‘집시’는 사실 ‘이집트인’이라는 의미로, 잘못 만들어진 표현이다. 고유한 소속 국가가 없고, 소수민족에 대한 핍박을 피해 떠돌며 살아야했던 이들에 대한 비하의 의미도 담겨있다. 이 글에서는 이탈리아 로마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로마니’로 지칭한다.


로마니 민족은 북인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유럽 사회의 구조적인 박해에 시달려 제대로 된 신분증이나 체류권, 인구통계도 없이 유령시민으로 존재한 경우가 많다. 로마니 사람들을 노숙이나 구걸, 절도, 영아 밀거래, 불법 공간 점유와 연관시키는 편견과 적대가 유럽의회서부터 거리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다. 로마니 민족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은 발칸반도로, 14세기 전후 루마니아 왕국에 의해 500여년 간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할 때 같이 자유의 몸이 되어 미국, 중남미, 호주 등으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으며, 현재 세계 여러 지역에 1천1백만 명 가량의 로마니 민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로마니 여성 조직을 시작한 것은, 로마니 여성들이 부양할 아이들이 있는데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직에서는 이들이 의지할만한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 여성과 아이들을 안전한 집으로 데려와 편히 잘 수 있게 했다. 살 집을 대신 알아봐준 것은 아니고, 독일로 치면 여성 쉼터와 비슷한 우리 숙소에서 두 세 달간 지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여성들은 새 집과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한동안 머물렀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 가능해질 때까지 우리가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그렇게 여성들이 생활의 기본적인 것들을 갖출 때까지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 숙소는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었다. 남편들이 알 수 없도록 집 위치를 비공개로 했고, 여성들은 나를 통해서 오면 됐다. 로마니 조직을 시작한 후, 나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내 번호를 알려서 연락 온 여성들을 직접 숙소로 안내했다.


우리 조직의 회원은 300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나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여성들이 전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25명의 여성들은 술 마시고 아내를 학대하거나 마약을 하는 남편을 두고 있었다. 우리는 법적으로 결혼한 여성들에게는 변호사를 붙여 이혼이나 고소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행히 이들 중 그냥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다.


마흔 살 된 여성이라면 이제 와서 어떻게 쉽게 일자리를 구하겠나? 이 경우 사회 보조금을 받게 된다. 나는 이런 여성들과 동행해서 행정 처리를 도왔다.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집을 찾을 때까지 옆에 있었다. 내가 맡은 케이스들엔 이전 결혼생활로 복귀해버린 이가 아나도 없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을 것이다. 돌아간 여성들은 심지를 단단히 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돌아가면 뭔가 나아질 거라 여긴다. 하지만 ‘그냥 나아진다’는 건 없다.


로마니 조직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벨그라드에 있는 관청의 확답이 있기까지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학교를 6년 밖에 안 다녀서 글을 쓸 줄 몰랐다. 그런데 우리 조직의 업무는 사실상 대학 졸업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일을 진심으로 가치 있게 여기고 나를 많이 존중하고 지지해준 동료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 <우리 자신의 언어로> 책에 라드밀라 아닉의 이야기와 함께 실린 사진. 화자는 로마니 민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출처: 국제여성공간)


세르비아 민주당의 보리스 타딕(Boris Tadi?, 2004~2012년 집권) 전 대통령은 우리 조직을 상당히 아끼고 지지했다. 그는 벨그라다 법의 궁전에 있는 자기 집무실로 우리를 초대하기도 했다. 싱글맘들을 위한 기금, 아이들 옷과 복지혜택 같은 것들을 제공하며 우리를 언제나 지지했다. 그 분 임기 동안에는 필요한 게 다 있었다. 하지만 로마니를 좋아하지 않는 차기 대통령 밑에서는 어려워졌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간 해놓은 게 다 흩어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새로운 대통령은 아예 다른 언어를 썼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했던 일 가운데는 여성들의 자의식, 이를테면 결혼생활에서 자기 인식을 바꾸기 위한 작업들도 있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숙소에 새로운 여성이 오는데 전부 많은 관심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호소하는 문제는 많았고, 나와 동료들 셋이서 거기 매달렸다. 들은 얘기를 다 문서화했다. 남편이 어떻게 학대했고, 생활비를 어떻게 술 사고 도박하는데 탕진했는지와 같은 것들. 이럴 때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나? 숙소에 들어온 여성들은 가정에 아무 보탬이 안 되고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는 남편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왔다.


어떤 이들은 남편의 폭력이나 의처증이 문제였다. 우리는 종종 한 여성의 문제를 다 같이 모여앉아 의논했다. 만약에 당사자 여성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으면 다른 여성들이 나서서 조언했다.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어떻게 더 현명하게 대처할지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항상 결혼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서로 사랑하는 동안에는 결혼생활도 잘 되지만 보통은 그게 오래가질 않는다. 우리는 어떤 아내나 엄마가 되어야하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지 얘기했다. 어떤 엄마들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아이들에게 자기 두려움을 전가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만다. 그런 이들은 삶의 안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여성들을 보호하고, 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보게 했다. 나만 해도, 내가 누구와 싸움을 붙을 수 있겠나? 아무하고도 안 된다. 여자는 항상 머리를 써서 먼저 생각하고 말해야한다. 물론 같은 것이 남자에게도 요구된다. 더 이상 아내를 막 대해선 안 된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삶을 살려면 매사에 평화롭고 차분한 방식을 취해야한다. 그럴 수 없는 남편이라면, 차분한 상태가 안 되는 사람이라면, 아내에겐 이혼할 시간이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


자, 이제 내가 왜 세르비아를 떠나와야 했는지를 말하자면 정치적인 얘기가 된다. 내게는 마피아와 경찰관 두 명이 얽힌 큰 문제가 있었다. 경찰관 두 명이 마피아와 결탁했다. 이 사람들은 계속 나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며 협박했다. 현직 경찰관들이 껴있으니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었다. 내 동생에게는 강제로 여자 다섯 명을 조달하라는 뚜쟁이 역할을 시켰다. 그러다 여자들이 붙잡히자, 동생은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돼 5년 형을 선고받았다. 내가 증거를 다 갖고 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59세의 동생은 작년 2월 체포됐다. 마피아 일당은 ‘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해코지하겠다’고 동생을 협박해서 형 선고를 받아들이게 했다.


이 자들은 우리가 로마니라서 우릴 혐오한다. 이건 누구나 안다. 나는 이 따위 불의를 더 이상은 못 참겠어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모든 협박과 뇌물 요구는 2년 정도 지속됐다. 우리는 구타나 살해를 안 당하려고 마피아와 경찰에 돈을 갖다 바쳐야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독일로 오기로 했다. 지금도 돌아가기 무섭다.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 그 다음에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자발적으로 경찰에 가서 이 모든 일을 고발할 순 있지만, 그러고 난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독일에 온 것이다.


내가 일군 여성조직은 사라져버렸다. 내 폴더와 책 같은 것들도 다 없어졌다. 한참 일하고 있을 때 우리 사무실과 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나는 조직이 정부에 공식 등록되었다는 문서들만 겨우 챙겼고, 나머지는 마피아 일당이 다 부수고 찢어버렸다. 전부 사라졌다.


나는 다섯 달 전에 와서 아이젠베아크(Eisenberg; 독일 중부 튀링겐 주에 있는 마을)에서 첫 번째 망명신청 면접을 봤다. 내 문제를 다 이야기했다. 마피아에게 협박당한 것, 경찰관 둘이 연루되어 있어서 못 돌아가는 것, 협박을 당했는데 신고할 수 없었던 것, 내 여동생을 체포해서 뇌물죄를 다 뒤집어쓰게 한 것. 증거로 가져온 문서를 다 제출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나는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 답을 듣고 너무 격앙되어 진술 중에 울기까지 했다. 돌아가라는 말을 듣는 게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고향에 가고 싶을 텐데 나는 정말 갈 수가 없다.


망명심사국 사람들은 나의 어떤 얘기도 특이 사항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나를 많이 지지하는, 에어푸르트(Erfurt; 독일 중부 튀링겐 주의 주도시)에서 온 반인종차별 액티비스트와 연락했다. 체류기한을 두 달 더 늘려 받았다. 제대로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실치가 않다. 특히 최근에 세르비아,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몇몇 발칸 국가들이 ‘안전지역’으로 분류되면서 그 후로는 난민들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난 아무데도 못 간다. 만약 독일에서 체류권이 보장 안 되고 아무 길도 열리지 않으면 나는 또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 나는 재심청구도 했지만 판사가 독일을 떠나라고 판결한 뒤에 내 케이스는 끝나고 말았다. 상고하지는 않고 있다. 그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어서.


나는 내 문제가 심각하니 체류권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렇게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독일 당국이 왜 망명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 로마니어를 하는 로마니 민족은 세르비아어도 할 줄 안다. 세르비아인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를 반기는 이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세르비아에서 받는 것과 마찬가지 홀대를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도 받고 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 독일에는 나치도 있다. 우리는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3개월짜리 체류 허가를 받고 그 다음에는 떠나야 한다. 그게 당국이 하는 말이다. 체류권은 없다.


대체 왜 우리 로마니 사람들을 싫어하나?


우리 로마니는 누구인가? 로마니 사람들은 보통 정치에 신경 쓰지 않고 정치인도 아니다. 대표자가 아니다. 그냥 보통의 삶을 살고자 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걸 사랑한다. 거의 모든 로마니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도 노래할 줄 안다. 대체로 문맹이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법은 확실히 안다. 좋은 일행이 되어주는 이를 반긴다. 상대방이 독일인이든, 영국이나 미국에서 왔든 신경 쓰지 않는다. 함께 있기 좋은 사람이라면 그런 건 상관없다. 우리 로마니는 그런 사람들이다. 대체 사람들은 왜 우릴 싫어하나? 난 아직도 모르겠다. 세르비아인들은 가령 로마니들이 아이를 훔쳐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왜, 자기 애만 일고여덟이 되곤 하는데 남의 아이를 훔치겠나? 로마니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즉시 ‘집시’라는 딱지가 붙는다. 가혹하다.


우리는 활기차고 밝은 사람들이다. 어딘가 가고 싶어지면 금방 코치(장거리 고속버스)를 잡아타고 길을 떠난다. 길에서 좋은 일행을 만나 거기 묵는다. 거칠 것이 없다. 나도 그렇게 살았다. 이런 라이프스타일로 생활하는 모습이 사진 찍혀 파리 전시회에 걸린 적도 있다. 그 전시는 스페인과 영국을 거쳐 세르비아로 돌아왔을 정도다.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면서 내게 연락해왔었다. 세상이 세르비아에 대해 한참 떠들던 시기였다. 그 때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로마니들은 유럽연합이 필요 없어. 우린 이미 유럽 구석구석 다 가봤거든.” 이 말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정말 그랬으니까. 우리 로마니들은 이미 유럽을 다 훑고 다녔었다.


▶흔히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는 모습. 마케도니아 수도에 로마니들이 모여사는 마을 Shukta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 theplaidzebra.com ⓒM.Tomoski)


나는 무척 가난하게 살기도 했다. 그래서 작은 사업을 하나 해야지 싶었다. 실업자에 빈곤 속에 사는 로마니 여자들을 많이 봤다. 나는 그 여자들이 거기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돕고 싶었다. 우리 오빠는 교육받은 사람이고 삼촌은 마케도니아 국회의원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됐나 보다.


텔레비전에서 로마니들이 어떻게 축제를 벌이고 춤을 추는 추는지 봤기 때문에, 나는 로마니인들의 단체를 열어 문화행사와 여러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겠다고 여겼다. 사람들에게, 세르비아인들에게 로마니들이 누군지 보여주고 싶다는 내 깊은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절대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문화를 사랑하는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 좋은 길동무이자 말벗임을 보여주는 것. 나는 형제자매들과 모여앉아 그 당시 우리에게 있던 약간의 돈을 어떻게 써볼지 의논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만일 돈이 더 있었으면 로마니들을 모이게 하는데 더 많이 썼을 것이다.


우리 커뮤니티에는 기본적으로 남녀 역할의 차이가 없다. 정교회 사회인 세르비아에 살면서도 우리한테는 이러한 역할 차이가 없다. 다수가 무슬림인 마케도니아에서는 다르다. 세르비아의 롬킨자(Romkinja;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로 로마니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나는 마음대로 외출하고 사람들에게 말 걸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생일이나 결혼 파티에서 남녀가 모두 같이 앉고 다 섞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무슬림들은 그런 기념 행사 때 남녀가 분리되기도 한다. 내가 이끌던 여성 조직은 여자들을 위해 일하니까 여자들끼리만 있었지만, 내게는 가끔 날 찾아와 어울리는 남자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우리 민족을 정말로 사랑한다. 롬킨자(로마니 여성)인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우리는 다재다능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7살짜리 로마니 아이는 정신연령이 사실상 14살쯤 된다. 나는 학교를 6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만일 수백 만 유로가 내게 있다면 로마니 커뮤니티를 돈독히 하는데 다 쓸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른다. 로마니들이 여기 에어푸르트에서 문화행사를 조직한다면 도시 전체가 초대받을 것이다. 우리는 벨리댄스나 다른 춤들을 보여줄 수 있고, 노래도 할 것이다. 정말 멋질 텐데. 그들은 우리 로마니인이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저 지고이너(Zigeuner; 집시를 부르는 독일어 표현.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라고 부를 줄만 알지. (※라드밀라 아닉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로마니 커뮤니티를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한 자료 

-로마니 커뮤니티가 루마니아와 영국 지역사회에서 겪는 제도적, 문화적 차별과 소외를 다룬 심층보도 “The Struggle for Survival of the Roma People: Europe's Most Hated”(VICE News) https://youtu.be/ALdlphTYdi4

-로마니 민족의 출신과 역사,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클립 “Gypsies, Roma, Travellers: An Animated History”(Open Society Foundations) https://youtu.be/Q6wSLfGBVGY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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