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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노력, 핀란드의 차별금지법

평등한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박강성주)



“앉, 으… 세, 요.”

발음이 이상한, 불안정한 목소리.

“실례지만, 뭐라고요?”

의심스러운 눈초리의, 지친 목소리.


한밤 중, 버스 정류장에서 장애인 남성과 비장애인 여성 사이에 오간 대화다. 여성은 버스 안에서의 작은 소동으로 강제로 내린 상태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성은 그냥 서있겠다고 말한다. 여기에 돌아온 답변은 “인종, 주, 의… 자.”


장애인 남성 옆에는 흑인이 앉아 있었는데, 이 장애인은 여성이 흑인을 의식해 옆에 앉기를 거절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말을 듣고 멈칫하던 여성은 오해받겠다는 생각에, 결국 그 자리에 가서 앉는다.


핀란드 단편 드라마 <좋은 사람>에 나오는 장면이다. 드라마의 내용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려 노력하는 어느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비록 드라마 속 설정이지만, 이 장면은 차별과 혐오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현실 속 핀란드에서 차별과 혐오 문제는 법제도적으로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차별금지법이 담고 있는 것


여기에 답하기 전에 밝힐 점이 하나 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한국이 핀란드를 따라가야 한다거나, 핀란드가 왜 이른바 ‘선진국’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 차별금지법이 꼭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른 나라의 경험을 살펴보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쓴다. 

▶ 평등한 세상을 이루는 방법.   ⓒ출처: 핀란드 정부 차별금지법 설명자료 중에서

 

핀란드의 경우 큰 틀에서 평등의 원칙은 헌법(Perustuslaki)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헌법 2장은 기본권을 다루고 있는데 6조에 따르면 “그 누구도… 성별, 나이, 출신, 언어, 종교, 신념, 의견, 건강, 장애 또는 개인과 관련된 그 밖의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같은 조항에서 특히 성별의 경우, 사회 활동을 하고 일하는 것과 관련해 성평등 원칙이 별도로 명확히 보장돼 있다.


차별과 관련된 포괄적인 사안을 다루는 법률은 차별금지법(Yhdenvertaisuuslaki)이다. 2004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는 2014년에 개정된 법이 적용되고 있다. 모두 6개의 장과 29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핵심적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차별 및 피해자화 금지’를 명시하고 있는 3장이라 하겠다. 특히 3장 8조는 “그 누구도 나이, 출신, 국적, 언어, 종교, 신념, 의견, 정치활동, 노조활동, 가족관계, 건강상태, 장애, 성적 지향 또는 개인과 관련된 그 밖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4장은 감시 기구에 대한 내용으로, 차별금지 민원도우미(옴부즈맨), 차별금지 평등심판소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중 차별금지 민원도우미는 차별?평등 문제를 전체적으로 감시하고 피해자 지원을 담당하는 전문기관이다.

 

5장은 피해자에 대한 보호 조치와 관련된 부분인데, 이에 따르면 재판 과정을 거쳐 피해자는 차별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아울러 차별적인 내용이 담긴 계약 등은 무효화되거나 고칠 수 있다.


2014년 차별금지법에 새롭게 들어간 내용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2014년 개정 당시 어떤 부분이 다듬어졌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수정 내용에 법의 범위와 위상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정부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감시 기구의 개편이다. 이전에는 ‘소수자’ 민원도우미가 주로 소수인종과 관련된 차별만 담당했는데, 이 기구가 포괄적 성격의 차별금지 민원도우미로 확대되었다. 또한 기존의 ‘차별심판소’와 성평등 문제를 담당했던 ‘평등위원회’가 차별금지 평등심판소로 통합됐다.


▶ 차별이 없는 사회. ⓒ출처: 핀란드 정부 차별금지법 설명자료 중


한편, 과거 소수자 민원도우미와 차별심판소는 내무부 소속이었지만 법 개정으로 이들이 확대?통합된 뒤에는 법무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또, 보도 자료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개정 당시 구체적인 차별 사유에 “정치활동, 노조활동, 가족관계”가 새롭게 들어갔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가 차별금지법을 만든 데에는 유럽연합의 영향이 컸다(Nousiainen, 2011). 바로 차별금지와 관련해 유럽연합이 2000년에 채택한 두 개의 지침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제도적 관점에서 성별에 기반한 차별과 그 이외 이유에 기반한 차별이 별도의 법률로 규정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2007년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개정을 목적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법률과 평등 기구를 통합하기 위한 방안들이 마련되었는데, 이에 대해 여성단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왜냐하면 평등 기구들이 ‘통합’될 경우, 특히 성평등과 관련된 기구의 위상과 자원들이 감소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우려가 다른 곳에서도 표출되었는데, 유엔의 여성차별철폐협약 위원회가 대표적이다.


그리하여 현재 성차별 문제는 별도의 법률(여남평등법, 1986년 처음 제정)은 물론 전문적인 감시기구(평등 민원도우미)에 의해 관장되고 있다. 실제로 차별금지법 1장 3조는 다른 법률과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성차별 사항의 경우 여남평등법에 별도로 규정되어 있다는 조항이 있다.


차별, 혐오범죄가 발생할 경우 처벌은?


그러면 차별 행위가 일어났을 때 가해자는 어떻게 되는가? 이 문제는 형법(Rikoslaki)에 규정되어 있다. 형법 11장은 전쟁 범죄와 반인도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11조는 차별금지법 관련 사항을 직접 언급한다. 이에 따르면 차별 행위 가해기관 및 관련자는 벌금형 또는 최대 6개월 형을 받게 된다. 형량보다도 차별 행위를 반인도 범죄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된다.

 

형법 11장 10조의 경우 (차별 범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 혐오 발언 및 표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인종, 피부색, 출생사항, 민족, 종교나 신념, 성적 지향이나 장애” 등과 관련된 위협, 명예훼손, 모욕 행위를 언급한다. 이 경우 처벌은 벌금형 또는 최대 2년 형을 받게 된다. 만약 위의 행위가 단순한 표현을 넘어 남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면, 처벌은 최소 4개월 형에서 최대 4년 형으로 높아진다.

 

▶ 유시 할라-아호 핀란드인당 대표는 혐오 표현으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문제가 된 대목이 판결에 따라 지워진 빨간색 문장들.  ⓒ출처: halla-aho.com/scripta

 

구체적인 사례로, 최근 정치권에 큰 논란을 일으킨 유시 할라-아호(Jussi Halla-aho) 유럽연합 의원 사건이 있다. 그는 올해 6월에 핀란드인당의 새로운 대표로 뽑혔는데, 의원이 되기 전인 2008년 6월 3일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다. 어느 극우주의자에 대해 2년 4개월 형이 선고된 혐오범죄 판결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할라-아호 대표는 여기서 이슬람교를 ‘소아성애자’의 종교로 일컫고 소말리아인들이 도둑질을 한다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2012년 벌금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유시 할라-아호는 법원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글에서 문제가 된 부분을 지워야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있는 한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2장 8조의 내용이다.


한국이 인권국가를 지향하고 있다면 차별금지법을 더 늦기 전에 만들어야 한다. 이 법을 반대하는 쪽은 주로 성소수자(동성애) 관련 사항, 곧 ‘성적 지향’이 차별 사유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누군가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존재를 지우려는 정치적 행위를 지속하며 확대해가고 있는 현실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는 빠져 있지만, 차별과 혐오 문제를 다루는 관련법과 기구가 하루 빨리 마련되길 빈다. 인권변호사 출신이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된 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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