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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관계에 대한 열 가지 의문

<치마 속 페미니즘> 다양한 사랑의 상상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치마 속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들어가며

 

이제까지 확인된 바로는 나는 양성에게 로맨스 끌림을 느끼고 이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이성애자다. 이 세계에서 사랑은 남녀 간의 성적, 로맨틱 끌림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누구에게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도 있고, 누구에게도 로맨틱 끌림을 느끼지 않는 에이로맨틱도 있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서 범성 로맨틱 이성애자였던 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는 사변적인 이야기들 말고 내가 경험한 구체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폴리아모리와 이성애, 양성 로맨틱 끌림이라고 이름 붙인 고유한 경험들을.

 

1. 왜 연애는 배타적이어야 할까?

 

청소년기부터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내던 이성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만나는 여자친구에게 로맨틱하기로 유명했다. 이벤트를 해주고, 그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와는 연락을 끊었다. 그 친구와 연락이 안 되면 ‘아, 여자친구가 생겼구나’ 생각했다. 처음엔 서운했다. ‘나와의 관계는 뭐지.’ 그러나 이내 이해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여자 친구들도 그를 이해했다. ‘여자친구가 서운해할 수도 있고, 자기 연애할 땐 그럴 수 있지.’

 

그 친구는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다시 연락해왔고, 여자친구가 생기면 또 모든 여자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로맨틱하고 멋지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의 태도가 화가 났다. 그에게 나는 인간이고 친구이기 전에 다른 ‘여자’로 취급되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가 나를 정말 소중한 친구로 인식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가 1:1 독점적 연애관계에서 로맨틱한 남자친구일 때, 나는 그에게 주변부의 여자가 되었다. 혹은 그의 여자친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경쟁자이거나.

 

‘왜 연애는 꼭 독점적이어야 할까’, ‘로맨틱은 왜 배타적이어야만 할까.’ 배타적 연애에 대한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다양한 사랑의 감각, 2015  ⓒ홍승희

 

2. 사랑이냐 우정이냐


스무 살 무렵, 정서적으로 친밀한 이성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집으로 놀러가 요리를 해먹고, 가끔은 섹스를 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너네 사귀는 거 아니냐’, ‘사귈 거면 사귀어라’ 라고 장난치듯 말했다. 우리가 가끔 섹스를 하고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다는 이유로 ‘관계를 규정하라’는 압박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고유한 관계라고 생각해. 나는 너에게 여자친구 아니면 여자사람 친구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그냥 지금 우리가 좋아.” 친구도 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친구는 시간이 갈수록 확실한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아니, 굳이 기존의 이름붙인 관계에 우리를 가두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 친구에게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후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이후로도 나는 그런 ‘애매한’, ‘우정도 사랑도 아닌’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소수 이성친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를 잠재적 연애 상대로 여겼다. 어떤 사람은 나를 ‘어장관리녀’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그들에게 여자 이상이 되지 못할까. 내가 남자였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일까. 마치 여자인 내가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면 남자들이 나를 연대가 아니라 연애의 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여자인 나는 그들 앞에서 잠재적 연애의 대상일 뿐인 건가. 우리는 왜 친구 아니면 연인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고민했다.

 

3. 나에게 필요한 게 ‘연인간의 사랑’일까

 

나는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일찍이 원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졌다. 정서적 안정이 부족해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연인 관계로 규정되는 것이 언짢았지만, 스무 살 때 만난 연상의 남자와 연인이 되면서 동시에 동거를 시작했다.

 

나에게 연애는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관계의 약속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동거를 시작했던 이유도 같다. 함께 잠자리에 들고, 아침을 맞이하고, 요리를 해먹고, 일상을 가꾸어가는 관계는 내 삶의 ‘토대’였다. 나에게 전통적인 가정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고 순결주의를 내면화했다면, 일찍이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남자친구와 동거 생활을 하면서 나는 점점 힘들어졌다. 관계를 규정하고 만나면 안정적일까 생각했지만, 나는 그와의 관계가 끝날까봐 불안했다. 질투심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가 여자 후배와 단둘이 만나면 무슨 일이 있을까봐 전전긍긍했고, 다른 여성들이 나의 경쟁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남자친구를 빼앗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와 나는 함께 정당 활동을 하고 학교를 다녔지만, 나에게는 친밀한 관계망이 부족했다. 겉으로는 만나는 사람들도 많고 연대하는 공동체도 많았지만, 깊은 속내를 교감하는 친구들이나 공동체는 적었다. 나의 빈약한 관계망만큼 그와의 관계에 집착하게 되었고, 집착은 질투와 불안을 더 커지게 했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 후 일찍부터 안정적인 관계망에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공동체는 없었고, 친구들은 각자의 길로 달려가느라 바빴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관계는 ‘연인’이라는 관계뿐이었다. 개인주의화되면서, 의지할 관계라고는 ‘이성애의 낭만적 사랑 신화’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건 남녀 간의 사랑이기 전에 친밀한 사람들과의 정서적 유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옛날 사람들은 원가족에서 벗어난 후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다. 사람들은 마을과 가족공동체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고,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마을공동체의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교류하며 결혼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모두 무너져버렸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나의 정서적 안정을 채우기 위한 연애 말고, 규정짓지 않고도 서로를 믿고 교감하는 성숙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4. 우리가 왜 꼭 이별해야 하는 거지?

 

이런 고민을 할 때 즈음, 동거를 하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족보다 가깝고, 친밀하고, 뜻을 함께했다. 왜 우리는 꼭 이별을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소중한 인연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런 우리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이별을 하는 게 안타깝기보다 비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연애관계에 대한 규정이 답답했다. 사귀지도 않았다면 이별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상대와 ‘당신만 바라보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고도 믿음의 관계는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5. 나하고만 섹스 해야 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이별한 후 연락이 끊겼지만, 여전히 연락을 하면서 지내는 사람도 있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정을 나눴던 사이기 때문에 여전히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만나서 섹스를 하게 될까봐’ 불안해했다. 우리의 관계가 다시 어물쩡하게 애매해지고, 이도저도 아닌 관계가 되는 게 싫다는 것이다. 그들은 섹스를 연애관계에서만 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 아니면 원나잇이나 섹스파트너와만 하는 은밀한 것으로 여겼다.

 

‘섹스’를 여전히 가족처럼 가까운 헤어진 연인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할 때만 섹스를 할 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쉬운 여자’이거나 반대로 ‘성적으로 개방적이지 못한 여자’로 취급됐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던 건 섹스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었을까. 나하고만 섹스를 하는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까. 가부장제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여성이 아무 남성과 섹스를 하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위험이 있으니까 1:1 결혼을 시작하게 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1:1 독점적 연애관계, 결혼제도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6. 질투가 사랑의 본질일까

 

나도 동거를 하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할까봐, 로맨틱 끌림이 있을까봐 불안해하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그 불안과 질투심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라고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오랜 시간 좋은 선후배로 지내던 사람이 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나는 그 사람과 밤새 대화를 하면서 눈물을 나누고 손을 맞잡았다.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그의 집에 찾아가 섹스를 했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여자친구에게 나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폴리아모리(polyamory, 일부일처제와 일대일 독점적 연애관계에 비판적인 다자 연애)를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계속 다 같이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질투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고 깊은 감정을 나누어도, 그가 행복한 것이라면 그냥 좋았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여자친구에게 나의 존재를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도 그때는 나의 감정과 관계에 확신이 없었고, 그의 마음과 함께 그의 파트너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폴리아모리’를 알았다면, 나는 그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그와 나는 점점 멀어졌고, 가끔 만나 안부를 묻고 감정을 교류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처음으로 질투심이나 불안, 나만 바라봐야 한다는 약속이 없이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부터 나는 성애적, 로맨틱 끌림이 있는 사람과 만나면 ‘관계를 규정하지 않을 것’과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겨도 계속 만날 것’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시작했다. 연인관계로 서로를 규정 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의 역할극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나는 그가 만났던 여자친구 목록 중 한 ‘여자’로 대상화되지 않아서 좋았다. 이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이 흐르는 대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그렇듯, 이런 관계에서도 갈등은 여전히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과도 섹스를 한다는 사실에 견디지 못하겠다며, 섹스 도중 나와 만나지 못하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여성 파트너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갈등과 과정이 ‘비독점적 연애관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이긴 했지만, 폴리아모리를 지향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눈 사람들도 있다.

 

7. 마초의 궤변으로서의 폴리아모리

 

나는 폴리아모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나를 추행했던 진보적인 교수는 늘 폴리아모리를 말했다. 그때는 ‘폴리아모리’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양다리와 외도, 개방적인 섹스에 대해 수업 시간마다 이야기하곤 했다. 그에게 폴리아모리는 “개방적인 섹스”였다.

 

최근 문단 내 성추행 가해자들이 ‘폴리아모리’를 운운하면서 자유로운 성생활을 피해자에게 설파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교수가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고 ‘구속되기 싫고 쿨한 폴리아모리스트’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란한’ 여성에게는 걸레라는 딱지가 붙고 ‘문란한’ 남성에게는 카사노바, 바람둥이라는 귀여운 별명이 붙는 이 사회에서, 남성이 폴리아모리를 말하는 것은 성적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페미니즘과 폴리아모리는 함께 성찰하고 공부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초가 말하는 것처럼, 폴리아모리는 ‘내가 내 욕망대로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지 않고도, 인정하고 존중하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에 가깝다. 내가 아는 폴리아모리스트는 선천적으로 인격이 훌륭하거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온전하게 사랑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8. 이성에 대한 끌림만이 사랑일까

 

페미니즘, 폴리아모리 철학을 만나면서 관계에서 더욱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성적 지향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해온 사랑의 습관을 점검하고 사랑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해 전, 시민단체 모임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그녀와 나는 처음 만났지만 아주 오랜 친구처럼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면서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해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큰 눈망울에 빠져들 것 같은 느낌, 고요하고 포근한 느낌이 좋아서 내내 눈을 마주치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나와 말하는 방식, 생각하고 느끼고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우리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이어폰으로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여성의 날 행사에 나가 길거리 부스를 구경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녀가 계속 생각나고, 그립고, 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이 뭘까 이상했다. 동성 친구들과의 친밀한 느낌과 다른, 로맨틱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싶기도 했고, 더 많은 장소를 함께 다니고 싶었다. 그녀는 곧 외국으로 떠났고, 우리는 연락이 끊겼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내가 동성에게 로맨틱 끌림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이성에게 로맨틱 끌림을 느끼고 이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던 것이 ‘이성애 신화 사회’에서 학습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정말 이성애자일까? 고민되었다. 감정은 정치적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감정도 사회, 문화적 산물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을 공부한 후부터 남성에게서 로맨틱 끌림을 느끼기 힘들어졌다. 남자 역할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나 역시 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남녀의 ‘연애’는 공기 빠진 풍선 같았다. 그러나 몸의 습관은 여전히 이성애를 지향했다. 이성과 로맨틱 끌림을 나누고 섹스를 하면서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대화도 잘 안통하고, 주파수도 다른 남자들과 왜 꼭 교감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아졌다.

 


9. 또다른 사랑의 관계, 퀴어플라토닉

 

1년 전, 나는 무성애자 케이씨를 한 강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케이씨는 누구에게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다. 그는 퀴어플라토닉 관계(queer-platonic, 육체적 끌림 없이도 애정을 나누는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폴리아모리를 지향하거나 1:1 모노아모리를 지향할지는 만나는 사람과 함께 결정하고 만들어간다고 했다. 그는 기존 질서가 만들어낸 사랑의 규칙이 아니라, 그들만의 규칙을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갔다.

 

그를 만난 후, 나는 나의 퀴어플라토닉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다. 예를 들면, 매일 매일의 기운과 꿈까지 통하는 친언니. 언니와 나는 서로를 소울메이트라고 부를 정도로 정서적으로 긴밀하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우리가 ‘가족’ 관계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언니와 깊은 영혼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자매간의 애정’이 아니라, 실은 우리 같은 이런 관계가 퀴어플라토닉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정으로 치부되고 분류되었던 많은 관계가 실은 ‘퀴어플라토닉 관계’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 사랑의 관계는 너무도 많았다. 사랑의 범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구나!’ ‘사랑할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기존의 사랑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우리가 사랑의 규칙을 만들어 가면 되는구나.’ 따뜻한 연결감과 해방감이 느껴졌다.

 

10. ‘남녀 간 배타적 연애’가 사랑의 일부일 뿐이라면

 

이성애, 1:1 독점연애, 그리고 결혼이 ‘사랑’의 서사를 독점해왔다. 사실 ‘연애’ 담론이 보편화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개인과 개인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차별을 뚫고 주체적인 사랑, 자유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성역할과 이성애 신화, 그리고 가족이데올로기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는 결혼 상대를 고르기 위한 과정으로 취급되고, 연인 간의 동거는 ‘임시’ 결혼 상태로 여겨지곤 한다. 자유연애도 결국 결혼제도, 가족제도를 위한 과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사람의 진실된 친구도 없는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친구, 성숙한 사랑 하나 경험하기 힘든 현대인은 ‘연애’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연애과잉시대다. 사실 우리에겐 진실되고 친밀한 정서적 관계가 필요한 게 아닐까.

 

‘우정 아니면 사랑’이라고 관계를 규정하기 바쁘다. 1:1 독점연애와 일부일처제를 ‘정상성’으로 부추김으로써, 동성은 내 애인을 빼앗는 잠재적인 적이 된다. 내 가족, 내 연인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나는 이상하다. ‘다른 여자(남자), 남의 가족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내 여자(남자)랑 내 가족만 지키면 돼~’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껏 다양한 관계와 섹슈얼리티를 경험할 자유를 박탈당했다. 다양한 성적 지향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스펙트럼이 다양화되고 있다. 동성결혼-평등결혼이 생겨나기도 하고, 결혼과 가족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비혼주의자들도 많아졌다. 1:1 배타적 독점연애가 아닌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와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 성적 끌림 없이도 애정을 교감하는 퀴어플라토닉 관계 등, 관계의 방식과 끌림의 내용도 다양화되었다. 다양한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분류하고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관계와 존재를 자체로 인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남녀 간의 정상적 ‘연애’ 담론이 이 많은 스펙트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 보편적으로 공유된다면 어떨까. 연애정상성 뿐 아니라 결혼신화와 가부장적 가족신화, 그리고 모성신화까지 부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더 많은 퀴어플라토닉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다양한 섹슈얼리티 담론은 새로운 가족공동체, 그러니까 인류 문명의 새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관계의 작동방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창한 상상도 한다.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 모리스 블랑쇼(프랑스 작가, 1907-2003)의 말처럼.

 

# 나가며: 온전하게 만나기

 

지금 나는 폴리아모리스트를 지향하면서 한사람과 동거를 하면서 살고 있다. 나의 동거인도 폴리아모리를 지향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가꾸어가고 있다.

 

▶ 우리의 공간, 2016  ⓒ홍승희

 

나의 동거인은 피부에 그림을 그리는 타투이스트다. 우리는 많지 않은 수입을 함께 쓰면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먹고, 그림을 그리고, 집 여기저기에 그림과 천을 매달아 놓았다. 안전하게 피임하기 위해 나의 동거인은 몇 개월 전 정관수술을 했다. 아이를 굳이 낳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버려진)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비인간 동물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비혼을 지향하며, 내가 사랑하는 ?퀴어플라토닉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면서 작곡 모임에서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에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삶을 나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우리’라는 관계의 우주는 독창적이고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서로를 연인관계에 가두거나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서로만 바라보겠다는 언약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나는 나의 동거인이 더 많은 감각과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폴리아모리는 꼭 ‘다른 사람도 만나야지!’라는 태도가 아니라 상대의 감각과 감정을 존중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폴리아모리의 알맹이라고 생각한다.

 

동거인은 종종 말한다. “만약 승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가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이든) 힘들겠지만 견뎌야겠지. 진짜 수행을 하겠네.” 살아가는 게 그렇듯 만나는 과정도 모두 수행이 아닐까. 불확실한 삶을 받아들이는 연습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일이다. 어렵기 때문에 의미 있다. 그 마음은 점점 더 나를 투명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웹툰 <독신으로 살겠다>(글/그림 선정성)에 나오는 폴리아모리스트 필립 포유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이나 자유, 존엄 같은 건 재벌이 독점하지 않았는데, 당신들 손에 쥐고 있는데!! 그걸 제대로 할 생각은 왜 못하지? 우리 개개인이 진짜 사랑을 하는 날, 혁명의 날은 온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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