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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간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 내과 입원병동에서 일하며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여성집단이기 때문에 저평가되는 노동

 

나는 간호사다. 간호사는 병원뿐만 아니라 학교, 기업, 항공사, 공공기관, 국제기관에서도 일하고 있으며, 병원 안에서도 다양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 중 나는 24시간 돌아가는 내과 입원병동의 간호사로, 소위 ‘탑5’라 불리는 국내 대형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에 다니면서 일관성 있게 배운 것은, 간호사가 전문직이며 그에 따라 책임감 있고 질 높은 간호를 제공해야 하고 그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직장에 들어오고, 학벌 등 대학 시절까지 가지고 있던 나의 배경이 가려진 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간호사’라는 직함만 가지고 이 사회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간호사가 전문직으로 평가되지 않고 저평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한국 사회 내에서 학력, 학벌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3년제 대학을 나와도, 4년제 대학을 나와도 간호사는 간호(학)과를 졸업해 국가고시만 통과하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3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전문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는 모든 간호대학을 4년제로 통합하기로 합의되었고, 이미 많은 대학들이 4년제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대중들에게 간호사란 충분한 학력과 학벌을 가진 집단은 아니다.

 

또한, 나는 간호사가 단순히 ‘여성집단’이기 때문에 저평가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워낙 대학에 다닐 때부터 간호사가 여성집단으로만 취급되는 것이 싫었다. ‘양성평등’ 시대에 ‘딸 바보’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자존심도, 자존감도 높은 나였지만(혹은 나였기에) 여성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불리함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당시 유행하던 ‘알파걸’(여러 방면에서 남자보다 뛰어난 여성)이란 말도 싫었고, 그냥 배운 것처럼 정직하게 전문가 집단으로만 평가 받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직장에 와보니 내가 주장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간호사가 여성집단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실임을, 그로 인해 부딪히게 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전문적인 직종과 성애화된 시선 사이

 

간호사라는 단어를 포털 검색란에 입력하면,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간호사 되는 방법’이 제일 많이 검색된다. 그 다음은 역시 성애화된 시선이다. 적절하고 공식적인 애티튜드(attitude)를 갖춘 간호사들이라면, 섹시 심볼과 간호사를 결부시키는 것에 아주 학을 떼는 반응을 보인다. 전문직으로서의 모습과 가장 거리가 먼 이미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한간호협회의 역량은 요 근래 더더욱 논란이 많지만, 어쨌든 대중매체에서 간호사를 성애화 하는 것만큼은 꾸준히 막아내고 잘 항의하고 있기에, 공식적인 장에서 간호사란 직종이 성애화된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이 직업군은 정말로 젊은 여성이 많다. 이 시대는 여성들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끝없이 주장하며, 매력적인 여성과 성애화된 여성을 동일시하곤 한다. 또한 그 매력적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업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이 젊은 여성들에겐 압박 아닌 압박으로 다가오고, 이 지점에서 정말로 능력 있고 똑똑한 젊은 간호사들은 갈등하게 되는 것 같다.

 

대면 업무인 병동간호사에게 있어, 나의 매력을 주장하면서 나의 전문적인 지위를 함께 주장하는 것은, 특히 한국 현실 속에서 쉽지가 않다. 신뢰를 쌓는데 있어서 나의 말과 태도, 표정, 자세, 그리고 내가 내뿜는 ‘오오라’는 중요하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자기계발서 책 제목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외모 노동’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만, 외모 노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단순히 예뻐야 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너무 학생같이 보이거나 어수룩해 보이거나 어려 보이거나 하면 환자들은 간호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저거 신규 간호사 아니야? 실습학생 아니야? 너에게 나를 맡겨도 돼?’ 하는 시선을 던지기 마련이다.

 

‘나는 젊어서 환자/의료진인 당신보다 세상사는 모를 수 있고, 아직 기술적으로 미숙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신뢰하고 의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환자의 건강 상태를 돌볼 기술이 있고, 질병과 간호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전문가이므로, 나를 믿고 내 간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십시오’ 라고 매력과 강점을 주장해야만 한다.

 

쉬운 방법은 외모 노동을 강화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는 전문가적 인상을 저해한다. 속눈썹까지 붙인 풀 메이크업을 하고 힐을 신고 정시보다 30분 늦게 출근한 예쁜 의사가, 비단 30분 늦게 출근했기 때문에 덜 전문가적으로 보이는 건 아닐 때가 있는 것이다.

 

호감 가고 신뢰 가는 인상을 팍팍 주면서 동시에 전문직인 나를 주장하는 것은, 그 시소를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적어도 2년을 지각없이 실습하고 과제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취직이 될 거야 하면서, 휴학 한번 해보지 않고 알바 한번 해볼 시간 없이 학업에 매진하며 자란 이 나이대가 가진 내공에선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간호사는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감정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와의 ‘치료적 의사 소통’(의사 소통을 통해 치료 효과를 얻기 위해 간호사들이 사용하는 의사 소통의 기술)을 위해 친밀한 관계를 맺고 깔깔깔 웃으며 대화하다가, 이것이 너무 사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된다. 그러다가도 또 딱딱하게 전문가적인 면모를 살려 의료적인 말만 해서는, 환자들이 불만을 갖는 일부 권위적인 의사들의 의사 소통 방식과는 어떻게 다른 걸까, 환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십상이다.

 

이 저울질은 분명히 감정 노동이지만 뭐랄까, 어느 정도의 감정 노동을 기꺼이 하면서 환자의 정서를 보듬는 게 또한 간호사의 애티튜드(attitude)이며 ‘돌봄’이라는 간호의 정수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하지만 또 금세, 왜 이걸 간호사만 해야 하는 거지? 이것은 여성집단이 감정 노동을 잘 할 것이라는 높은 기대치 때문은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또한 이러한 능수능란한 감정 노동이 오히려 일정한 거리 두기를 통한 전문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그렇다. 진퇴양난이다. 정말 내공이란 것이 쉽게 쌓이는 것은 아니랄까.

 

한편, ‘성애화=여성스러움’의 시대에서 여성스러운 직업으로 분류되는 것은 뭔가 연애 혹은 결혼 시장에서 단기적으로, 단편적이나마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간호사의 이미지는 성애화되면서도 돌봄 노동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성적인 이미지까지 있고, 그 점에서 ‘좋은 신붓감’이라는 착각에 편승하려면 할 수도 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또 있으니까. 물론 현실적으로 진짜 시장 안에서는 ‘벌이가 좋다’는 점이 더욱 강점이 된다.

 

간호사는 말초적으로도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나의 일터에서는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성 역할이 반전을 맞이하곤 한다. 환자들은 내가 수액을 바꿔 달아 드리려고 까치발을 하고 있으면, 참 무겁겠다며 안쓰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창고를 정리하고 필요물품을 보충하다 보면, 수액백이 10개씩 들어있는 수액 박스를 두세 개씩 한 번에 옮기는 것은 다반사다. 100kg 몸무게의 환자도 욕창 생기지 말라고 체위를 변경해드리는 게 간호사다. 혈액, 체액, 타액을 다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친구가 겪은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남자환자 소변검체를 받아달라고 함께 온 딸에게 부탁했는데, 딸이 조심스럽게 “제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여서요. 도저히 아빠 소변을 받지 못할 것 같아요” 하면서 간호사에게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직장에서만큼은 ‘간호사는 여자가 아니구나’ 싶었다. 

 

             ▲  아침 채혈을 준비하면 카트 위는 이것저것 한 가득.   © 가막살나무 
 

가끔 자조적으로 화이트칼라는 확실히 아닌 것 같고, 블루칼라인 것 같긴 한데 컴퓨터 업무도 많아서 ‘스카이블루’라고 불러달라고 우스개 소리한다. 여성스럽지 않은 것은 사회적 성별 역할 분담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결혼을 통해 퇴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간호사들은 훌륭한 생계부양자가 된다. 요즘 시대에 맞벌이가 아니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장’인 경우도 많다.

 

물론 가장인 여성들은 간호사 집단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세상 도처에 있다. 또 엄청나게 일하지만 일하는 것에 비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도 도처에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말을 하면 여타 여성집단에 비해 평균 소득이 높아서인지 꽤 욕을 먹긴 한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으로서 주어지는 책임감과 역할, 노동량에 비해 소득이 너무 적다. 이것 역시 전형적인 여성직종의 특징이겠지만, 이로 인한 이직률은 간호사 이직 원인의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3교대 근무, 4D(dreamless)라고 불리는 현실

 

나는 본래 뭔가 역할이 하나 주어지면 그것이 1순위이고 여타 다른 일들은 전부 2순위로 미루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이 꽤 빡빡하다고 느낀다.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낮 근무(day duty), 오후 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오후 근무(evening duty),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밤 근무(night duty), 여덟 시간을 기준으로 3교대 근무로 돌아가며 일하고 있다.

 

어떤 duty에서 일하게 될지는 4주마다 주기적으로 나오는 ‘번표’를 봐야만 알 수 있다. duty배정에 있어 규칙은 없다. 약속을 잡고 싶으면 4주 전에는 잡아놔야 미리 번표 신청을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연차가 낮으면 ‘눈치가 보여’ 토요일, 일요일은 신청할 수 없다. 그렇게 받은 오프라도 급작스런 병동 상황 변화로 어쩔 수 없으면 오프는 ‘잘린다.’

 

남들 쉬는 날 쉬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이고, 주휴(일정한 요일을 지정해 돌아가면서 쉬는 것)가 없는 병동은 3교대에 오프가 들쑥날쑥 이라 취미학원 하나 제대로 다닐 수가 없다. 임신 순번제, 결혼 순번제 등은 나의 직장에서는 사라졌지만, 인계와 인계로 24시간 노동이 맞물려 돌아가는 일터에서 누군가의 갑작스런 임신이나 결혼 등으로 나의 duty가 통째로 바뀌는 것은 신체적으로 참 힘든 일이긴 하다.

 

day 출근을 하는 날이면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씻고 밥을 먹고, 4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5시에 병동에 들어가 30분 동안 병동 내 소독물품들 개수를 확인하고 아침 경구약과 수액 등을 준비한다. 새벽 5시 30분에 30분간 인계를 받고, 6시부터는 환자를 직접 돌본다. 6시부터가 명시되어 있는 근로 시간이다.

 

이때부터 여덟 시간 동안 환자의 열과 혈압, 통증 등을 체크하고, 항암제를 포함하여 먹는 약, 주사약, 외용약, 수액 등을 투여하며, 수혈을 하고, 각종 검사를 보내고 받고, 수술을 보내고 받고, 입퇴원을 시키고, 중간 중간 이벤트와 요구 사항, 이상 소견,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해결하고, 필요하면 다른 의료진과 의사 소통하고,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일 등을 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간호를 한다.

 

evening과 night duty 일은 또 다르지만, 그것도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간호다. 인계를 주는 시간까지 내가 맡은 시간 내에 일어난 일들을 다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이 잔업이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칼퇴를 할 수도 있고, 중환자가 있었다면 몇 시간이고 집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모두가 ‘인정할만한’ 중환자라면 특근 수당을 신청할 수 있지만 대체로 병동에서는 특근 수당을 신청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일 이외에 여타 시간을 이용하여 간호사 자격 유지를 위한 필수 교육과 보수 교육을 듣고, 병동 내 연구나 컨퍼런스 등을 진행한다.

 

나는 이제 3년차로, 어느 정도 일하는데 요령이 붙어 잔업 시간이 길진 않다. 그렇지만 신규 때는 별일이 없더라도 일이 느려서 새벽 4시 30분에 병동에 나가면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끝나는 기염을 토했다. 제발 하루에 12시간만 일하면 좋겠다고 울부짖곤 했었다. 여전히 우리 병동의 신규들만 보더라도 일과 잠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병원 내 환자 중증도가 높아질수록(결국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일수록) 간호사는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 (물론 꼭 그렇진 않고, 같은 병원 내 병동간 중증도 차이는 보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한 나 같은 말단 간호사에서 벗어나 승진하게 된다면, 전문직으로서 특성에 더 부합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영향 범위를 갖게 되고,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간호사 평균 임금을 따졌을 때 일반 근로자 평균 임금보다 낮은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얘기한 만큼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현재 받는 임금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임금인지 의심스럽다. 교대 근무인데다, 위험한 질병, 바이러스와 세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가끔은 환자에게 맞기도 하는데 위험 수당도 없다.

 

전문가로서의 개인적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교육을 받고 수료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석사, 박사를 해도, 정말 개인적인 만족일 뿐이고 이후 언제 있을지 모르는 기회에 대한 대비일 뿐이지, 병동 내에서 하는 일이 달라지거나 승진과 연관되지는 않는다. 이런 ‘보상 없음’이 3D를 넘어 4D(dreamless)라고 불리게 되는 현실인 것 같다.

 

사실 간호 수가(의사들이 행위에 따른 돈을 받듯이 간호사들이 행위에 따라 돈을 받는 것. 현재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의 행위료는 일괄적으로 병실비에 포함되어 있다)조차 제대로 없는 현실이다. ‘젊은 여성집단’으로 읽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이라고만 보기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저평가되는 경험을 하면서, 전문직 집단으로서의 전략 부족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달까.

 

사람들은 간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 7월 18일 오후 7시 서울역 광장. 보건복지부 간호인력 개편안 반대 시위. ©국민건강권 수호를 위한 전국간호사 모임 
 

사실 저평가라고 얘기하기 무색하게, 대중은 간호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입원이라도 해봤다면 병동간호사의 일면을 본 적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기대하는 바에 비해, 해내고 있는 일에 비해, 얼마나 저평가되어왔는지 간호사 이슈들은 쉽게 묻히곤 한다. 의료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간호인력 개편’ 사안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당사자인 병원 경영자와 간호사, 간호조무사 정도인 듯하다.

 

실질적으로 높은 성과를 내고 있는 ‘보건진료 전담공무원’(구舊 보건진료원. 농어촌 지역에 살면서 일차 의료를 담당하는, 제한된 처방권을 가진 간호사)이나, ‘가정전문간호사’(병원에 소속되어 의사의 협진과 처방 하에 퇴원환자를 관리하는, 가정전문간호 석사 과정을 밟은 전문간호사), ‘방문간호사’(보건소에 소속되어 국가가 관리하는 만성질환자 등을 방문 관리하는 간호사) 제도는 활용하지 않은 채, 새로운 비용이 드는 원격 진료 따위나 정책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분명 몇 번의 대규모 규탄 대회도 열렸고, 시위도 이어가고 있지만, 여론이나 정책 결정자들은 별말이 없다. 밥그릇 싸움이라거나,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정도로만 얘기된다. 비가시화란 이런 건가 싶다.

 

저평가, 비가시화, 부수적인 노동, 보조적인 일. 이런 단어들을 보면 ‘가사노동’이 생각나곤 하는데, 어떤 논의에서는 간호사의 노동을 얘기할 때와 꼭 들어맞는 것 같다. 간호사는 정말로 병동의 살림꾼이다. 의학 체계에 맞추어 병동들은 소화기외과, 호흡기내과, 종양내과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병동의 주인은 간호사다. 간호사는 병동을 정말 꾸려나간다.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행하는 간호도 하지만, 병동 자산인 모니터 기계가 몇 개 있는지, 집게가 몇 개 있는지 개수를 세고, 소독을 맡기고, 휠체어가 다른 병동에 가 있는지 확인하고, 제세동기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검체냉장고 온도가 적정한지 확인하고, 어느 병실 화장실 손잡이가 망가졌는지, 콜벨(응급상황 시 간호사를 호출하는 기구)이 망가졌는지, 병실 내 온도가 적정하고 환풍기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등 온갖 다양한 일을 한다. 이런 잡다한 일도 간호다.

 

야금야금 환자에 대한 직접 간호 시간을 잡아먹는 이 일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일일까? 아니다. 환자를 위해 꼭 필요하고 병동이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비용으로 환산되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그럴싸하게 알아주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을 간호사는 알고 있다. 충전기를 잘 꽂아 놓지 않아서, 매일매일의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심정지 상황이 발생했는데 제세동기가 작동하지 않아 처치가 지연된다면? 경우에 따라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 매일매일의 잡다한 일의 가치를 알기에 비가시화되는 일이어도, 가시화되려는 움직임이 별로 없더라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점도 가사노동과 참 비슷하지 않나 싶다.

 

“환자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감정 노동’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 직업의 윤리와 밀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드러지는 건, 역시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관계 속에서다. 다양한 계층과 계급, 나이의 환자들이 입원하고, 나는 겉보기에 젊은 여성일 뿐이며, 환자들은 나에게 높은 학력이나 의료서비스를 요구하지 않는다. 여러 번 입원하면 그제야 간호사들의 능력이 자신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전까지는 아는 범위 안에서, 자신이 기대하는 상황 안에서 젊은 여성을 대하듯 대할 뿐이다. 젊은 세대들조차 ‘아가씨’, ‘언니’는 일반적 호칭이고, 자기 사업체 사람도 아니건만 아랫사람 부리듯 이것저것 해달라는 경우도 많다. 소리 지르고 위협하며 신체적 위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간호사인 나도 화낼 수 있다. 환자를 막 대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이 대하면 결국 후회할 뿐이다. 예전에 한 간호사가 트위터에 ‘3초면 환자를 죽일 수 있다’고 올려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그랬을까 싶지만, 참 경솔한 발언이다. 환자들은 어쨌든 병원 내에서 약자니까. 그들은 어딘가 아프기 때문에 입원했고, 간호사는 어떤 식으로든 환자에게 영향을 미칠 힘이 있다. 그러니 그 영향력을 인지하고 간호사 윤리 강령에 맞게 환자의 옹호자(advocacy)로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전문직 간호사로서의 ‘품위’인 것이다.

 

사회는 젊은 여성노동자에게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간호사에겐 책임질 것이 정말 많고, 그래서 ‘책임’이란 말이 참 무섭다. 인계 받는 동료의 한 마디, “환자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라는 말이 아주 생명을 깎아내는 것만 같다.

 

간호사는 참으로 저평가된 직업이지만, 법정에서만은 아니다. 의료 사고를 통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간호사는 대중에게 읽히듯 의사의 보조적 역할로 읽히지 않고 주체적인 전문가로서 의료 사고를 방지했어야 할 책임을 가진 존재가 된다. 환자에게 처방이 도달하기까지 일정한 프로세스가 있다면 가장 마지막 방어선에 간호사가 있다. 만약 간호사가 무지해서, 태만해서, 혹은 상황이 안 좋게 흘러서든 그걸 걸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간호사의 책임이 되기도 한다.

 

신규 간호사는 분명 존재하지만, 트레이닝을 마치고 1대 1로 교육해주던 프리셉터 없이 독립적 간호를 제공하기 시작하면, 그는 한 사람의 면허를 가진 간호사이며 전문가이다. 잘못된 일에 핑계나 변명은 있을 수 없다.

 

한편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밖에서 환자가 진심으로 나에게 다가올 때 참 어렵다. 나 역시 20대 후반으로, 살면서 이것저것 겪어보기도 했지만 나보다 어린 환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물어올 때, 나보다 두 배는 더 산 어르신들이 자신의 미래를 물어올 때, 그리고 나의 한마디가 그들의 의사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건 참 힘들다.

 

내가 일하는 병동엔 희귀질환 혹은 암환자가 40명 정도 입원해 있다. 환자 삶 전체에서 간호를 제공하는 ‘전인간호’(全人看護) 개념을 이상적으로 배워왔고, 간호사가 의사 결정을 도와줄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배워는 왔지만, 정말 나의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가 전문가인 것은 의료서비스 안에서이지, 환자의 인생에서도 내가 전문가이기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코디네이터 역할로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서로 연결해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 정도다. 이런 면에서 연차가 쌓여간다는 것은 적재적소에 적당한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일인 것도 같다.

 

간호사는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내가 간호사가 된 것은 무슨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생 일할 수 있는 전문직이었으면 했고, 사람과 만날 수 있는 일이기를 바랐다.

 

현재 내 온갖 것을 소진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직업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게 꼭 싫지는 않다. 나의 직장에는 꼰대는 있을지언정 마초는 거의 볼일이 없다. 직장에서 ‘여자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커피 따위 안 타고, 사서 마시면 된다. 접대할 일 없고, 마음만 내킨다면 동료들 커피까지 살 만큼은 돈도 번다.

 

환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을 집으로 갖고 가는 일은 없으며, 내 일만 시간 내에 잘 해내면 출근 전 퇴근 후 시간은 무엇을 하든 간섭 받지 않는다. (물론 이게 매우 힘들다. 잘못하면 전화 오고, 전화 오면 자다가도 깨어나 반드시 받아야 하며, 다시 병원으로 불려나가는 수도 있고, 몇 날 며칠 괴로워하거나 하이킥을 하며 잠에서 깨거나 악몽을 꿀 수도 있다.) 유니폼을 착용했을 때 단정하기만 하다면 밖에서 뭘 입고 다니는지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삼선을 끌든, 거지꼴을 하든, 명품도배를 하든, 헐벗고 다니든,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다.

 

싱글로 산다면 맛집 탐방하고, 후원하고, 뭐 하나쯤 질러도 나 하나 먹여 살릴 생활비는 번다. 결혼 제도에 편입한다면 결혼, 임신, 육아 휴직 등 복지가 나쁘지 않다. 심지어 건강은 결국은 모두의 관심사며 필수 조건이고 언젠가 많은 사람들은 아프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권력이기도 하다. 다양한 계급의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여성들이 있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과 애증들이 있지만, 모든 귀결점은 ‘일’이며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이 모든 것은 일만 하기에도 충분히 바빠서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이 직업이 맘에 드는 것은, 적어도 이 사회에 해가 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다는 점이다. 뼈빠지게 일했는데 그 일이 결과적으로 이 사회에 해가 되는 일이라면, 전혀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면,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나는 간호학이 참 좋은 학문이라고 생각하며 간호사가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자랑이다. 다만 단순히 나의 자랑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도 인정받고 합당한 대우로 답해졌으면 좋겠다. ▣ 가막살나무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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