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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법의 판단에 ‘정답은 없다’

사람들의 뇌리에는 헌법재판소가 정의롭고 사리에 맞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암암리에 내재돼있다. 그러나 <헌법의 풍경>의 저자 김두식씨의 생각에 따르면, 이같은 믿음은 그릇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는 법적 판단에 있어, ‘정답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저자는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판결문을 예로 들면서, 법원의 판결문 역시 ‘일반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 ‘성적 도의관념’, ‘건전한 사회통념’과 같은 가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음란’이라는 개념 자체가 ‘살인’이나 ‘강간’보다 훨씬 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법은 ‘절대적인’ 판결을 내려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저자는 왜 이처럼 법과 법조계에 대한 그릇된 상식이 생겨났는지를 한국 법조계가 처한 현실을 통해 설명하고 문제점을 비판한다.

법해석, 법조인이 독점해선 안돼

저자는 사법시험 합격 후 검찰에서 잠시 일하다가 ‘체질에 잘 안 맞다’는 이유로 검사직을 사임한 후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이류 법학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오히려 법조계의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조계의 문제점이 더 눈에 잘 띄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선 법전 용어가 지나치게 어렵고 일상적인 언어와는 뜻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문제로 꼽는다. 마치 고어로 가득 찬 개역판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한국 교회 목사들이 독점하듯, 법전에 대한 해석을 법률가들이 독점함으로써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법고시라는 시험 자체가 공부할 때는 힘들지만, 한번 합격하면 갑자기 신분상승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격자들은 특권의식을 암암리에 가지게 된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한다 하더라도 막상 합격한 후 위계서열이 엄격하고 인간관계를 잘 맺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법조계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과는 점차 멀어진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다.

법조계 인맥이 엽기적인 범죄 만들어

법률가들이 지닌 특권의식은 독재정권 시대에는 법이 정권의 손발로 작동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그 어떤 고문이나 조작도 법률가들과 완전히 무관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 남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위임 받았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성고문을 비롯한 각종 고문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음을 폭로한다.

그가 보기에 “이제 다 지난 일 아니냐”라는 소극적인 반응은 모자란다. 독재 정권이라는 괴물의 수족이 된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지 않고서는 고문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신분상승으로 인한 특권의식과 함께, 법률가들이 사법연수원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점도 문제다. 지금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1천명에 육박하지만, 3백명으로 제한되었을 시기에는 법조계 전체가 하나의 ‘가족’으로써, 인간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압박이 매우 심했다.

예를 들어 변호사가 사건을 처리할 때는 검사에게 이야기를 잘 해야 하는데 담당 검사를 모르는 경우보다 아는 경우가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판결에 있어서 독립성 보장은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인간관계를 잘 따져야 하는 한국 법조계에서 이것이 잘 지켜지기란 어렵다. 저자는 ‘차떼기’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는 이회창씨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가 평소에는 법조계 내에서 평판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법조계의 인간관계가 멀쩡한 사람으로 하여금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은 차별을 시정하는 '적극적 도구'

이같은 법조계의 현실로 말미암아 현재 한국사회는 시민들과 법 사이가 철저히 괴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 합격자가 1천명에 이른 지금의 상황에서, 소수자에 대한 법안 등 진보적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법은 지켜야 할 소극적인 대상이 아니라, 법안을 통해 의식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적극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국이 연령, 성별, 인종으로 인한 차별이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각종 차별이 삶의 현장에서 일상화되어 오히려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곳’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로 사회적인 갈등이 심각해진 역사가 깊기 때문에, 그 결과 광범위한 차별 금지법이 도입되어 어느 정도 의식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흑인, 여성,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가 상당히 쉬워졌다.

저자는 미국과 비교하면서, 한국 역시 차별 금지 소송과 같은 재판을 통해 분위기가 환기되고 차별적인 현실에 관심이 생겨나면 차별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론 차별 금지 소송처럼, 사회적 분위기를 환기하는 소송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소수 변호사들의 개인적인 노력을 벗어나서 구조적인 지원을 받아서 궁극적으로 시민들이 법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몇 가지 대안 제시를 하고 있다. 먼저 변호사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다양한 출신들로 채워지면 변호사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법 관련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게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대한법률구조공단과 같은 기관이 궁극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아래 들어가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 이상의 현실적인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김윤은미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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