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닐 때 그 이름도 이상한 ‘강제+자율’학습에 반대하고, 두발제한명령에 항의하고, 학생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구성하는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섰을 때, 우리가 학교와 선생님들로부터 늘 들었던 얘기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울타리 대신 철조망이 된 공교육
생각해보면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을 때도,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을 때도, 뒷동네 아주머니들과 저녁에 2인조 배드민턴을 함께 쳤을 때도, 학내 서클에 가입했을 때도,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을 때도, 주위 어른들은 잊지 않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본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람이 저마다 가지는 본디의 신분”, “의무적으로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할 직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의 신분이자 직분은 학생이고, 그 신분과 직분에 마땅한 행동은 공부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어른들은 우리가 라디오를 듣거나, 콘서트에 가거나, 배드민턴을 치거나, 학내 서클에 가입하거나, 여행을 갈 때, 공부라는 ‘학생의 본분’을 인지시켜줬다. 그걸 보면, 어른들이 말하는 우리의 본분인 ‘공부’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콘서트에 가거나 배드민턴을 치거나 학내 서클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것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시험 준비만 하라는 얘기일뿐
사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라는 말 속에 담긴 ‘공부’의 의미는 학교나 학원, 도서실, 그리고 집에서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을 보며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우리에게 학생의 본분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시험 준비를 하라는 얘기다.
어른들은 우리와 배드민턴을 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여행 잘 다녀오라고 허락을 하면서도, 항상 우리가 시험 준비를 게을리할까봐 걱정한다. 십대 청취자가 자신의 방송을 듣길 바라는 DJ들이나, 십대 팬들이 자신의 콘서트에 오길 바라는 가수들도, “그래도 학생의 본분은 공부죠. 공부 열심히 하세요~”라는 인사성 말을 던지면서 부모들의 마음을 안심시켜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신과 입시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만이 학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학생의 본분이 학교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면, 학교생활은 수업을 받거나 시험을 치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학생들도 공부 이외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선생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권리가 있고, 서클 활동을 할 자유가 있으며, 만약 부당한 일을 겪으면 반대하거나 항의할 수 있다. 학생회를 만들고 운영을 하는 것도 학생의 본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학교 밖에서도 우리가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인생의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평소에 ‘공부 잘하는 것보다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면서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는 많은 것들보다 시험을 준비하는 ‘공부’를 우선시하며 “본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인간이 되는 공부는 학생의 ‘본분’에서 빠져있는 것인가요 라고.
학교생활을 잘 하라고 하는 선생님들도, 우리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문제점들을 이야기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면서 “너희의 본분은 공부”라고 강조하신다. 그 얘기는 결국 우리더러 시험을 준비하는 것 이외의 생활을 무시하고 오로지 학업에만 신경을 쓴 채 십대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학생의 본분”을 그렇게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학교나 선생님들과 관련해서 의견을 제시하거나 항의를 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든다. 일다▣ 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