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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헌사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정예로운 것들이 고물이 된다

 

경주 불국사 아랫동네 구정동 고물상 뜰에는 온갖 낡고 헌 물건들이 모여 있다. 전국에서 날라 온 크고 작은 수백 개의 항아리, 옛 시골 부엌의 문짝, 한옥 띠살문, 집 뜯어낸 고재(古材)들, 낡은 엘피판, 녹 가득한 유기그릇들, 다듬이돌, 옛날 다리미, 대패, 구들장, 돌확, 옛 기와, 낡은 재봉틀, 궤짝….

 

▶ 고물상 안은 온갖 고물들로 차 있다.   ⓒ김혜련

 

물건만 고물이 아니라 사람들도 고물이다. IMF 금융위기로 부도 맞아 술로 세월 보내다 고물상을 하게 된 예순 넘은 김 사장, 김 사장 주유소의 직원이었다가 이제는 고물 고치는 기술자가 된 ‘최가이버’ 아저씨, 시골동네 구석구석 다니며 고물 실어다 파는 임 씨, 일 있을 때마다 따라 나서서 몸을 쓰는 강 씨, 모두 다 한 물 간 고물들이다.

 

세상 모든 고물들 모아 둔 것 같은 쓰레기더미 한편에, 낡아빠진 평상 펴 놓고 술추렴들 한다. 옥수수 생막걸리에 밭에서 뚝뚝 따온 고추, 시골 빈집에서 주워온 항아리에 들어있는 묵은 된장 찍어 거나하게 마신다.

 

언젠가부터 이 고물들 속에 나도 끼어들었다. 고물 놋사발에 따라주는 탁주 한 잔 마시고 고물들 틈에 끼어 있으면 문득 다른 세상이 보인다. 머리 곧추세우고 한 없이 위로 오르고자 했을 때 보지 못한 것들, 품지 못한 것들이 편안하게 들어와 앉는다. 고물 속에 못 들어올 게 무에 있으랴.

 

석양이 들면 문득 고물들의 다른 시간이 드러난다. 이 고물들 세상에 둘도 없는 진수, 더 덜어낼 것 없는 정수(精髓)가 된다. 변재(邊材)는 썩어 사라져버리고 심재(心材)만 남은, 까칠하게 빛나는 나무들. 윤기 다 빠져나가 오직 흙 자체로 굳어 있는 옹기. ‘늙음의 고요함’으로 빛나는 몸, 세상 헛폼, 헛발길질 다 버린 진지한 몸. 다른 아무 것도 아닌 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하여 고물상은 갑자기 쓰레기더미 속 빛나는 생으로 환생(還生)한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고물들의 빛나는 공간이 된다. 고물이 되려면 진짜여야 한다. 가장 정예로운 것들이 썩지 않고 살아남아 석양빛에 알맹이들 반짝인다.

 

▶ 무엇이든 고쳐내는 고물 기술자 ‘최가이버’ 아저씨   ⓒ김혜련

 

낡고 오래된 것들에 담긴 ‘이야기’

 

난 낡은 것, 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끌린다. 좋아하는 것이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면 끌리는 것은 수동적이고 스스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다.

 

끌림의 역사도 오래다. 어린 시절 나는 쓰레기장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희열에 차서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헤집고 그 속에서 보물들을 발견하는 기쁨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가 보물로 골라낸 것들은 머리가 다 빠져 나가고 팔도 한 짝 없는 인형이라든가, 쓰고 버린 화장품 통이라거나 했지만….

 

할머니의 궤짝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늘 설레는 일이었다. 할머니를 조르고 졸라서 궤의 놋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의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안에서 나오는 건 오래된 무명천이거나, 실, 반짇고리, 버선, 저고리, 할머니가 참빗으로 곱게 빗어 모아 둔 머리카락 등이었다. 그것들이 풍기는 눅눅한 듯, 매캐한 듯한 냄새 또한 좋았다. 그 오래된 냄새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곳,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목화솜을 타서 다시 만든 이불을 덮을 때 느끼는 아늑함은, 세상이 별로 편치 못했던 내게는 드문 안락함이기도 했다. 오래된 물건들이 주는 다사로움, 거리감 없는 친밀감, 편안함, 아늑함은 가보지 못한 어떤 다사로운 곳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과 그리움을 가져다주었다.

 

새 물건은 정서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 물건이 지닌 자기만의 내력, 독특한 이야기, 어떤 표정이 없다.

 

▶ 개다리 밥상과 옛 놋그릇   ⓒ김혜련

 

이를테면 집에 있는 오래된 ‘개다리 밥상’은 자기만의 표정이 있다. 하도 낡아서 예전의 칠은 다 벗겨졌다. 한쪽 다리는 들려서 다리 밑을 덧붙여 놓았다. 살짝 불구인 다리를 깨금발처럼 들고 있는 밥상, 그게 안타까워 굽을 대어준 누군가의 마음.

 

한쪽 다리를 덧 붙여준 개다리 밥상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모자란 것들, 부족한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든다. 슬프고도 고적한 부드러움이 마음에 깃든다. 이름도 개다리 밥상, 흔하고 천한 밥상인데 그 ‘개다리’가 불구(不具)이기까지 한 이 물건의 삶에 대한 연민….

 

집 뒤편의 흙돌담은 집과 같이 백년의 세월을 건너왔다. 오랜 세월, 바람과 비와 햇빛에 바래 모든 불필요한 것들이 다 빠져나갔다. 그 담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서늘하다. 얼마나 많은 바람과 비와 햇살이 그 몸을 뚫고 지나갔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어떤 비바람의 요동도 그저 맞을 뿐인 저 온전한 받아들임, 숱한 세월의 부대낌 속에서 익혔을 단단한 고요함.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단단한 고요가 생겨난다. 군더더기 없는 정결한 마음이 싹튼다. 물질이 어떻게 정신으로 화(化)하는지 백년 된 담은 묵묵히 보여준다.

 

오래된 유기그릇도 그렇다. 옆에 두고 있으면 온기(溫氣)가 느껴진다. 따뜻하고 은근한 기운이 있다. 금(金)은 너무 번쩍이고, 은(銀)은 차가운데, 유기(鍮器)는 은은하다. 현대의 유기그릇도 좋지만 옛 유기가 더 좋다. 놋그릇을 주로 썼던 시절에 만들어낸 그릇은 현대의 세련된 유기보다 어수룩한 듯 제 맛이 난다. 물론 가격도 한 몫 한다. 현대 유기는 매우 고가(高價)다. 고물상에서 오래되고 낡은 유기그릇들을 싸게 구입해서 잘 닦는다. 닦는 품이 꽤나 들지만 녹이 쓸어 못 쓸 것 같은 그릇이 닦을수록 은은히 반짝거리며 살아나는 맛은, 닦는 수고를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잘 닦아서 제 빛을 살려낸 그릇은 자기만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어서 쓸수록 정이 간다.

 

집도 마찬가지다. 새 집에는 없는 것들이 낡고 헌 집에는 있다. 백 년 전쯤 산에서 베어왔을 소나무들, 울퉁불퉁한 나무를 서까래로 한 집.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들은 자신들이 서 있던 산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마도 그 산에서 못생기고 잘 자라지 못했을 나무들, 굵고 씩씩한 나무들 사이에서 자라느라 구불구불 제 몸을 구부리며 해를 향해 얼굴을 열심히 내밀었을 나무들, 그 옆에 있었을 작은 관목들, 풀들, 가끔씩 숲의 고요를 깨고 ‘퀑 퀑’ 울어내던 장끼의 울음소리…. 집을 지을 때의 행복한 마음들도 떠오른다.

 

▶ 백년 된 뒷마당의 돌담    ⓒ김혜련

 

비고, 바래서 아름다워지다

 

새벽달이 서쪽하늘로 넘어간다. 빛바랜 아침 달은 모든 생(生)들이 다 빠져나간, 말갛고 가벼운 뼈 같다. 기름기 한 점 없는 해맑은 얼굴 같은 빛바랜 뼈. 물기 맑은 햇살에 깨끗하게 말라 바스러진 단풍잎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존재감도, 미련도 없이 제 길을 가는 존재.

 

어린 시절 혼자 잘 놀았다. 그런 내게 낮달은 뭔가 모를 서늘함으로 다가왔다. 뭐랄까, 슬픔과는 다르고 초연함과도 다른, 뭐라 규정하기 힘든 느낌. 다 바래어 비어있는데 그게 참 아름다웠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서 내가 느끼는 정서에는 그런 느낌이 있다. 비고, 바래서 아름다워진 것.

 

씻기고 씻겨, 빛바랜 말간 뼈를 눈앞에 보는 것 같은 낮달을 좋아하는 것처럼 바래고 낡은 것들을 사랑한다. 내 삶이 낮달처럼, 정예로운 고물처럼 비고, 바래어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한 생이 참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박노해의 시 제목)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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