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13) ‘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연극하는 그녀, 양성애자 고리님의 과거 현재 미래
 
벌써 인터뷰 칼럼의 열세 번째 주인공을 소개할 시간이 돌아왔네요. 계획대로라면 26회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오늘로 정확하게 절반의 시간을 걸어 온 셈입니다. 처음 인터뷰 칼럼을 기획했을 때, 총 5부로 나누어 기획을 했었습니다. 1부는 나와 가족, 2부와 3부는 가까운 친구들과 레즈비언 관련 활동을 하는 분들, 4부는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들, 5부는 다시 저의 개인적인 관계들로 돌아와 이성애자인 친구들과 지인을 만난다는 기획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연극하는 고리님이랍니다. 고리님이 '2부, 가까운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의 마지막 주인공인 것이지요. 지난 5월 27일, 여성운동을 하는 아자님을 만난 같은 장소에서 고리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인터뷰는 '공식 질문'인 '왜 레즈비언이에요?'로 시작해야 했지요. 하지만, 이 질문은 고리님에게만큼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성애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고,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 난 양성애자라고 생각해요. 현재 시점 그렇다는 얘기죠. 뭐랄까요, 내가 여자를 만날 때는 레즈비언인 것이고, 남자를 만날 때는 이성애자인 것이고,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양성애자인 거죠."
 
현재 고리님은 누군가와 교제를 하고 있지 않으니 '양성애자'인 것입니다. 이성애자가 되기도 하고, 동성애자가 되기도 하고, 양성애자가 되기도 하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와 같은 고리님의 생각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고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요술 방망이를 들고 변신하는 만화 주인공'이 떠오르더군요.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양성애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만나는 건 아니에요. 나는 양성 모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양성애자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동성과 교제를 하는 동안 특별히 '나는 이성을 좋아하기도 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요. 억지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정체성, 개념 문제를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개념적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할 때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있어요."
 
‘양성애자‘를 향한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의 부정적 시선들
 
최근에는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만,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는 소위 '양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했었지요. 이를테면, 양성애자를 '박쥐'라고 표현하면서 '언제든 자기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해 갈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봤던 것이지요. 이런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불편한 일은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내 주변에는 양성애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였는지 그런 터부는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은 없어요. 다만,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아직 정체화하지 않은 채로 중간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시선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해요. 커플 관계 안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지만, 내가 이성교제를 했다는 사실을 다소 불편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사람이 양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과 교제를 할 경우에 이런 문제들이 종종 생기기도 하더군요. 이를테면, 파트너가 양성애자이니, 파트너를 '언제고 남자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해버린다거나, 과거 이성교제 경험이 있는 파트너와의 성적인 관계 안에서 '파트너가 이성과 성관계를 맺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호소하는 경우들 말입니다. 양성애자에 관한 이와 같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는 분명한 편견이고, 고정관념이지요)에 관해서는 고리님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다고 하네요.
 
짧게라도 왜 그것이 '편견'과 '고정관념'인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제 경험상 파트너들은 언제고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떠나는 길이 이쪽인지, 저쪽인지는 중요하지 않죠. '여자랑 바람나는 것은 괜찮고, 남자랑 바람나는 것은 안 된다'? 제 생각입니다만, 누구를 만나 떠난들 그 대상이 누군 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레즈비언이라고 어디 안 떠납니까? 제 갈 길 걸어가는 것인 인생인데, 이별하는 그 사람의 행로에 그리 연연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교제 중인 상황에서 '너는 나와 헤어지면 분명히 남자를 만날 위인이야!'라며 저주를 퍼붓는 이도 있던데요, 이는 '빨리 헤어지자'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또한 파트너의 과거 성관계 경험을 문제 삼는 것 역시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동성 교제 경험이 많은 레즈비언 파트너의 과거 경험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문제는, 파트너가 양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양성애자'인 파트너에 관해 갖는 부정적인 생각들, 걱정들이 진짜 '문제'인 것이지요. 다시, 고리님과의 대화로 돌아가겠습니다.
 
변신하는 만화 주인공처럼,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고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성훈이라는 남자 친구를 짝사랑 했었고,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진원이라는 남자 친구에게 푹 빠져 있었답니다. 현재는 배용준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요. 이렇듯 과거 이성인 누군가들을 충분히 사랑했던 경험이 있음에도 저는 스스로를 '양성애자'라고 정체화하지 않죠. 왜 고리님은 스스로를 양성애자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양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다음은 이에 관한 고리님과 저의 대화 내용입니다.
 
고리 : 현재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과거에 경험이 있다'라는 사실보다, '현재 내가 원하는 관계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재 시점에서 관계를 진전시킬만한 욕구를 이성에게 느끼느냐, 동성에게 느끼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언니는 배용준을 좋아하지만...
 
박김수진 : 배용준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니까요!
 
고리 : 네네. 배용준님을 사랑하지만,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잖아요.
 
박김수진 : 아니, 그거야 배용준님이 나를 전혀 몰라 문제이지, 만약 배용준님이 나를 사랑해주신다면야 알 수 없는 일이죠. 
  
고리 : 그렇다면, 정말 배용준이 나타나서 언니에게 '당신이 정말 좋다. 연애하자'라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진전된다면, 그 때에 언니는 현재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현재에요. 현재 언니는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것이 편한 것이고, 언니가 그렇게 선택한 상태인 거죠.
 
‘레즈비언의 사랑’을 소재로 연극을 만들면서 정체성 문제를 탐색하다
 
현재 고리님은 연애를 "쉬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쉬려고 쉬는 것은 아니라고도 하네요.
 
"이제 공연도 끝났으니까,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를 찾아야죠."
 
고리님은 대학 재학 시절에 연극 모임 활동을 했었어요. 현재는 대학원에서 연극 연출에 관해 공부하고 있고요. 고리님은 대학 시절 연극 모임을 통해서 레즈비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레즈비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다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마초들 사이에서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동아리 내에서 남자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틀이나 법칙을 따르는 것이 너무 싫었고, 벗어나고 싶었죠. 그러던 중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어요. 여성주의자들끼리 모여서 밴드를 결성해서 공연도 하고,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주로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활동을 했었는데, 항상 레즈비언이 등장하거나, 레즈비언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연극을 만들었어요."
 
이 시기에, 고리님은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오히려 레즈비언을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고, 레즈비언을 등장시키는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통해서 레즈비언 정체성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10대들이 팬픽이나 야오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인 듯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겁이 없었어요. 레즈비언을 소재로 연극을 만든다는 게 겁이 날만도 한 일이잖아요. 아마도 당시에는 내가 분명하게 레즈비언으로 정체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을 깊이 하기 시작했어요. 나  뿐만 아니라 당시에 함께 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그런 상태였죠. 연극 활동을 하는 동안 자기 정체성 문제를 탐색할 기회를 가졌던 거죠."
   
저도 2005년엔가 고리님과 친구들이 함께 만든 레즈비언 연극을 한 편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몇몇 학교와 레즈비언 바(Bar)에서 공연을 했었지요. 그 연극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여성과 교제를 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어요. 그런데 파트너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선을 보러 다니고, 둘의 관계가 삐걱거려요. 그런데 힘든 시간을 보내던 주인공이 엄마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거예요. 기억 속 엄마의 옆에는 항상 엄마의 친구가 있었던 거죠. 엄마와 엄마의 친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거죠. 주인공이 기억을 따라 오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은 엄마를, 엄마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결혼 문제로 힘들어하는 파트너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희망을 찾게 되는 거죠. 기혼 여성인 엄마와 또 다른 기혼 여성인 친구 간의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현재 주인공을 어렵게 하는 점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죠."
 
고리님이 생각하기에 연출에 있어서도, 연기에서도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리님도 기억하고 있고,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 그 연극을 본 많은 레즈비언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었지요. 레즈비언의 삶과 고민을 녹여낸 연극이었고, 그런 연극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니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극을 보고 굉장히 좋아하셨고, 눈물 흘리는 분들도 많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시기도 했어요. 그건, 연극을 아주 잘 만들어서도 아니고, 연기를 아주 잘해서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상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활동을 하던 고리님은 결국 연극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극 연출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리님은 어떤 소재들, 어떤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나는 '상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연하다'고 하는 것들에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진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항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고, 갈등하는 과정을 겪게 되죠. 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들이라 나는 연극을 통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문제제기하는 연극을 만들어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최근에는 무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연극과 관객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면 일어난 그 무엇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등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현재는 아직 공부하는 과정에 있으니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 해요."
 
그런데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연극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연극을 공부하고,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걱정이나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경제적인 면이 제게 큰 고민거리죠. 지금도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미래를 생각하면 어떤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저는 계속 열심히하다보면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벌면서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부유하게는 살 수는 없을 테지만요. 만일, 하다하다 너무 힘들고 형편이 안 되면, 진로를 바꾸죠, 뭐."
 
인터뷰를 마치면서 고리님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어요?"
 
"사실, 졸업 후의 삶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상태에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잘 해보자 생각하며 살거든요. 물론 기본적으로는 앞서 말했듯이 연극을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죠. 하지만 실력도 운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아, 막연히 하는 생각이기는 한데요,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다양한 욕망, 예술에 관한 것들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싶기도 해요. 가끔, 아직 내가 철이 덜 들어서 미래에 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요."
 
미래에 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놓을 필요는 없죠. 현재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고리님의 머리 뒤에도 노란색 쟁반이 보이는 듯 하더군요.
 
얼마 전에 고리님이 연출을 한 작품을 감상한 적이 있어요. 뭔가 복잡하고 깊이가 있는 연극 같았는데, 이해력 부족한 저는 혼란에 빠진 채로 귀가 했었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고리님이 그 연극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가 '혼란에 빠져도 괜찮다'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고리님에게도 직접 건넨 말이지만, 다시 한 번 고리님께 부탁드리고 싶네요.
 
고리님, 앞으로 계속 연극 일 하게 된다면, 가끔씩이라도 레즈비언 등장하는 연극 만들어 주세요. 이성애가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 한 번 레즈비언이면(이성애자이면) 죽을 때까지 레즈비언이기만(이성애자이기만)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래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진 채로 귀가하도록 하는 그런 연극 만들어 주세요. 제가 친구들 많이 데리고 연극 보러 갈게요.   (박김수진)
 
[Over the rainbow] 여성운동하는 레즈비언 아자님과 대화 | 퀴어-종교인 지훤의 '탈반의 기억'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