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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적 사랑과 상상력의 실천 앞에서 

*이 글은 이 소설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다른 기사에서 인용한 바 있지만, 나는 최근 틈날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 』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소설은 권당 500쪽 이상이나 되는 분량에도 2009년 가장 사랑받은 문학도서로 손꼽힐 만큼 다양한 독자들에게서 읽혀지고 있다(현재 2권까지 발표되었고 3권이 출간될 거라는 설도 있다).
 
『1Q84』1권의 앞 쪽을 조금 읽자마자 바로 구입을 결정해버렸다. 유명작가라서 관심이 가긴 했지만 단지 그 뿐은 아니었다. 이 책은 처음부터 개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이면을 연결하는 모티브들에 애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고 싶은 소설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1권을 지나 이야기가 깊이 진행될수록 주제와 사건의 균열을 의심하게 하는 남성 중심적 해법에 맞딱뜨리게 되면서 기대감은 혼란으로 뒤바뀌었다.
 
<소외된 개인들의 내밀한 사연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2권 표지

소설은 두 주인공 아오마메(여성)와 덴고(남성)의 이야기를 일정분량씩 번갈아서 배치해놓고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세월을 보내왔지만 초등동창생이자 남몰래 서로에게 연정을 품었던 사이이다. 하지만 1권의 초중반부에서부터 덴고의 소설쓰기 작업을 통해 두 사람의 어긋난 시간들은 점차 얽히기 시작하고, 2권의 마지막부분에는 그들의 상징적인 해후가 암시되어 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아오마메는 부모의 맹목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또래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고, 그로인해 고독을 체화하며 (종교가 아닌) 실체에 집착하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덴고는 인색하고 몰인정한 아버지에게서 어머니 없이 자라난다. 그는 인생의 어떤 시점부터 신경증 같은 반복 증상을 체험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젖가슴을 빨리고 있던 어머니, 그 아주 먼 기억 혹은 무의식적 메시지와도 같은 한 장면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는 일이다. 그 순간 그는 세상과 분리되는 듯한 심리적 상태를 겪는다. 이 환각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관련된다. 그래서일까. 덴고는 끈끈한 인간관계를 잘 견디지 못한다. 학원 강사를 하러 외출하는 날과 연상의 섹스파트너가 그의 집을 방문하는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설을 쓰면서 혼자서 살아간다.
 
이미 알려진 바 있지만 이 소설은 시대적으로는 근대 이후의 일본을 다루고 있고, 광신적인 신흥종교집단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을 그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주제는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스며든 고독, 그리고 그 고독에서 비롯된 왜곡된 해결방식으로까지 퍼져나간다. 현실에서처럼 그의 소설에서도 인간이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각종 신념에 중독 되어버린 존재다. 그런데 국가와 같이 거대한 틀들은 제도로 포괄할 수 없는 인간성의 일부를 침묵시키면서 체제를 유지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일탈이 출현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아오마메는 여성학대 및 강간범 등을 찾아가 살해하는 킬러 일을 남몰래 수행하며 산다. 그녀는 단 하나뿐이었던 진정한 친구이자 의지처였던 다마키가 남편의 학대 속에서 자살을 택한 이후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녀가 일하는 스포츠클럽에 비슷한 이유로 딸을 잃은 거물급의 노부인이 회원으로 들어오면서 기묘한 인연은 만들어진다. 노부인은 그녀를 저택으로 불러들여 일대일 교습을 받다가 적절한 시기에 공모를 제안한다. 즉 사적 차원의 단죄이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폭력에 개인적이면서 극단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다.
 
살해방법은 포스트모던하게 피 한 방울 보지 않는 방식이다. 아오마메는 직업적으로 익힌 신체에 대한 전문지식을 이용해 목덜미의 치명적인 한 지점에 ‘아이스픽’이라는 주사바늘을 찔러 넣는 조용한 방법을 택한다. 어떤 독한 멘트도 냉혈한적인 포즈도 없다. 오직 규칙의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권력과 지성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묘사되는 노부인에게서도 격렬한 감정이나 불타는 복수심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독자들은 범행지시자인 노부인이 비이성적이기는 커녕 차분하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들은 법이 쉽게 처벌할 수 없고, 살수록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몰고 올 뿐이라고 판단되는 남자들만을 골라 다른 세계, 즉 죽음의 상태로 보낸다.
 
소설은 상실과 상처를 철저히 ‘개인적으로’, 즉 공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 나름의 방식대로 해결하려는 인간들의 모습들을 비춘다. 그리고 아오마메나 덴고처럼 거대사회에 엮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즉 사회적 자기정체성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자)들의 결핍감을 문학적으로 풀어내려 하였다. 뛰어난 문학작품들이 종종 그러하듯, 『1Q84』는 옳고 그름으로 판명할 수 없는 인간존재들의 울림을 한층 폭넓고 아름답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공동의 삶에서 가리어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이다.
 
“그것이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일그러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탈것의 존재방식이다.” (1권 _ 525페이지)
 

<초자연성이란, 현실을 부정할만큼 우월한가>
 
그런데 2권에서는 캐릭터들의 존재이유와 작은 이야기들 간의 상관성이 흐트러지며, 어떤 종류의 욕망이 이후의 전개를 휘어잡고 있음이 감지된다. 물론 1권에서도 하루키적 대중성, 가령 물신적 경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큰 주제와 중심 서사의 개연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여겨진다.
 
2권에서는 우선 1권에서부터 줄곧 애매모호하고 신비적으로 묘사된 열일곱 소녀 ‘후카에리’의 행적이 남성 중심적 서사의 에로틱한 소도구로 전락하는 기미가 엿보이기 시작하며, 아오마메가 마지막 타깃이었던 신흥종교의 ‘리더’―자기 딸을 포함 공동체 내의 여러 소녀들을 강간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남자―와 만나는 장면이 지나치게 신화적으로 설정됨으로써 사회 문제에 대한 추상적인 접근이 두드러지고 있다.
 
덴고에게 나타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후카에리는 산 속에서 폐쇄적인 꼬뮨 생활을 하다 도시로 도망쳐 내려온 인물이다. 그녀는 탁월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지만 난독증이라 문장은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작가지망생인 덴고는 그녀의 이야기에 감명 받아, 그 자신의 탄탄한 필력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리라이팅’ 해낸다. 자기중심적이며 권력적인 편집장 고마쓰의 계획과 지시대로 두 사람의 말과 문장이 결합하여 탄생한 「공기 번데기」라는 단편이 이 이야기의 근거지를 만든다. 유령작가 덴고의 활약으로 그 소설은 열일곱 미소녀가 천재적으로 써낸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져 대히트를 기록한다.
 
후카에리는 막강한 신흥종교단체 <선구>의 리더, 그러니까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마지막으로 죽이게 될 남자의 딸이다. 그녀는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덴고의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살려내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문자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나타난 후카에리는 점점 더, 예쁜 가슴곡선이나 매혹적인 외모로 덴고를 자극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잇는 역할이었는데 2권에서는 기이한 말만 연신 내뱉을 뿐, 덴고라는 남자에게 요술봉을 휘두르는 요정노릇 이상은 하지 못한다.
 
이 와중에 아오마메는 마지막 제거상대인 ‘리더’를 만나러 위험―자살을 하거나 성형수술을 해서 완전히 다른 이름의 인생을 사는 일 중에 한 가지를 택해야 했다―을 무릅쓰고 호텔방으로 향한다. ‘마셜아츠’라는 스포츠마사지 전문가인 그녀는 몸 전체를 파 먹히는 듯한 통증에 시달려온 리더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초대되었으나, 사실은 어린 소녀들을 강간한 이 남자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오마메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고, 시종일관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말한다. 게다가 그는 그녀에 의해 조용히 죽기를 희망하기까지 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그로인해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나 세계의 균형에 필요하다고 판단내린 것이다.
 
이에 아오마메가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얼마간 이해가 된다. 그는 흔히 떠올리는 아동 성폭력범의 모습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럴싸한 진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구 위의 무거운 대리석 탁상시계를 염력으로 들어올리고, 아오마메가 고이 간직한 사랑인 덴고의 존재 또한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지점에서부터 그녀의 판단이 흐려진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원래의 목적의식에서 벗어난 아오마메가 실제로 자궁을 파괴당한 소녀에 대해 되묻는 장면에서도 리더의 대답은 희극적이기까지 하다(“자네가 목격한 것은 관념의 모습이야. 실체가 아니야.”). 세상이라는 것은 오묘한바 언제나 단 하나만이 진리일 순 없으며,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별다른 설명도 없이 폭력에 대한 인식을 관념이라 칭하는 것은 자칫 얼마나 위험한 도약이며, 허망한 상상력인가.
 
누구나 리더를 만나기만 하면 현실의 처참함도 관념이지 실체가 아니게 될 테니, 어쩌면 하루키는 광신을 가장 잘 표상해낸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반어법일 경우에만 그렇다.
 
<고귀한 체험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지만 그보다 심한 충격은 덴고와 후카에리의 ‘교접’장면에서 온다. 자신을 잡으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아버지의 교단 사람들과 ‘리틀피플’이라는 가칭의 존재들을 피해 은둔했던 그녀는 다시 나타나 덴고 대신 세계의 변형을 예감하고, 그의 불안한 위치를 위해 ‘액막이’ 해준다. 그녀는 목적의식에 의해 옷을 벗는다. 그녀의 귀는 ‘비밀의 동굴처럼’ 철저히 미적인 모양새를 지녔고, 유방은 완벽한 반구를 이루고 있으며, 음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매끈한 하얀 피부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소녀의 성기는 이제 갓 만들어진 것처럼 생겼다.
 
그녀는 친히 다리를 벌리고 천천히 그의 위에 올라타 마법 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동작을 시작한다. 덴고는 그녀의 조그만 성기에 자신의 ‘너무 크고 또 너무 딱딱’한 성기가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이미 송두리째 그녀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처럼 묘사된다.
 
물론 후카에리가 전적으로 가상의 존재라면, 이를 현실의 성관계와 동일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더가 자신의 딸을 포함 어린 소녀들이 영적인 경험을 위해 자신 위에 올라타서 ‘자의적으로’ ‘교접’을 했다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한 상태에서, 또한 물리적으로 짓이겨진 소녀조차 관념일 뿐이라고 대충 선언하고 넘어간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나는 이 소녀의 섹스마법은 분명 문제적이다.
 
반복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설사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반복되는 상황은 어떤 주장을 발신하는 법이다. 주인공들이 목격하는 두개의 달은 설사 비현실적일지라도 하나의 하늘에 두 개로 떠오른 세계에 대한 공감할 수 있는 비유이자 상징이지만, 성폭력에 있어 그 대상은 분신이었다는 설정이 판타지에만 의존해도 되는 발상인지는 의심스럽다. 이 소설의 주요 키워드에 해당하는 ‘리틀 피플’이 분신(도터)과 실체(마더)는 나뉘지 않고 도터는 마더의 그림자라고 심오하게 설파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되어도 될 사유인지는 고민스럽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하루키가 문화적인 잣대에서 비롯된 표현방식을 사용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만 기입되어있는 특수한 욕망이 아니라, 남성적인 사회에서 생산․확장되어온 페티시즘(fetishism)의 세련된 한 사례라는 짐작이 든다.
 
꿈쩍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페니스에는 감각이 있다. 아니, 그것은 감각이라기보다 오히려 관념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2권_ 359페이지)
 
<남성주의적 판타지로는 사랑을 구원할 수 없다>
 
하루키의 몇몇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하나의 세계 안에서 또 다른 시간성을 구해낸다. 이것이 곧 ‘1Q84년(일본어에서는 숫자9와 알파벳Q의 발음이 같음을 이용한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1984년과 완전히 다른 해가 아니며, 이 두 가지 연도 모두가 세계를 하나로 구성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가져다 놓은 초현실적 사건들은 현실의 구멍(공백)을 어느 순간 대체해버린다. 그럴 때 현실은 부수적이며, 내적의지(믿음)야말로 중심 중의 중심이다. 세계의 이면이자 우주적 질서에 가까운 순간을 여성성기상품화의 어법으로 풀어낸 이 익숙한 독특함 앞에서 나는 주제와 사건의 균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키의 말처럼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이 정말 별개가 아니라면, 서로 꾸준히 끌어당기고 밀쳐내는 작용과 반작용 속에 세계의 균형이 있다면, 인물들의 역할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열띤 전환의 장에서 주어진 남성중심적인 해법은 앞선 감동을 뒤엎는다.
 
하루키의 이 소설이 내게 페티시즘 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가 외모를 상품처럼 묘사하고 고상한 소비취향을 존재가치처럼 서술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성이 도구화되어야만 가능해지는 영적 승화를 본질적인 층위처럼 그려냈기 때문이다. 상상과 실재(實在)의 경계를 탐구하려는 그 문학적 시도에는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지만 그의 작품이 결국 주관성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점에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인 믿음을 극복하는 것은 객관과 주관 사이를 끈질기게 연결하는 운동일 테니 말이다.
 
덴고는 후카에리에 의해 되살려진 아오마메에 대한 그리움 혹은 사랑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녀는 개념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야. 따스한 육체와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현실의 존재야.(...)”. 하지만 아오마메의 장에서 나타나듯 그녀는 덴고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왕국에서 ‘그의 신전 안에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녀는 광적인 도그마를 거부하려다 극단적인 유물주의자가 됐지만 덴고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지킬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비로소 구원의 배에 올라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도그마인 로맨티시즘(romanticism)에 바쳐져 버렸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의 지향점과 실천행위에는 간극이 있다.
 
그렇다면 『1Q84』에서 ‘사랑’ 은 복잡다단한 현실적 맥락이 제거된 개념이고, ‘희망’은 가부장제(정립)에 대항하는 여성성(반정립)을 덴고(혹은 하루키)가 통합하는 네오-남성중심주의의 실천인 걸까. 사회적으로 잘못 굳어진 가학과 피학의 구조들을 숭고함의 언어로 다루는 작업이 로맨스와 섹스만으로 설득력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전작들이 주로 남성 주인공의 폐쇄적인 공간성에 의존하였던 데 비해 이 소설은 침묵의 악순환을 끊는 소통에 보다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작품이며, 그렇기에 광범위한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실은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자) 이미지일 수도 있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순간 현실을 망각케 하는 몇몇 블록버스터영화의 스펙터클한 자극과도 다를 게 없어진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장면들이 문학적인 어휘와 철학적인 접근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만 빼면 포르노적 판타지와 일부 닮아 있다는 데에서 문득 소스라치게 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이 소설은 초월적인 사고가 연약한 인간에게는 지극히 폭력적일 수 있는 이유, 외부세계의 압력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적인 선택이 현실을 교묘히 외면할 수 있는 이유, 남녀의 결합을 과도하게 드높이는 제스처가 성정체성에 대한 보수적인 정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남성 일방적인 상상력에 의존하는 이유를 자기패러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도 반어법일 경우에만 그렇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이후의 이야기가 출간되어 그가 진실로 말하고 싶었던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동시적인 목소리를, 마침내 어느 한 쪽의 희생 없이 듣게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성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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