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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함께 살기’에 대한 사색 
 
외국에 터를 잡은 동생이 올 연말까지 이곳에 머물 예정이라며 이 땅을 찾았다. 바다를 사이에 놓고 떨어져 있으니 만나기도 어렵고, 평소 전화도, 인터넷 메일이나 채팅도 잘 하지 않아 서로 연락도 잘 못하고 지내는 편이다. 그나마 한 해 한 번씩 한 달 정도 다니러 오니까, 그때 얼굴도 보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10대 시절에는 가족이라며 함께 어울려 지내던 동생들도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나름의 생활을 꾸리고 있는 만큼,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좀더 각별한 친구처럼 생각할 따름이다. 핏줄로 맺어진 사이는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생각이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가족은 결혼, 혈연으로 맺어져야 한다?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 가족일까?

그러면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의 답을 찾아왔다. 개인적 경험과 맞물려 비롯된 물음이었는데, 좋은 가족이야말로 행복의 조건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탄생과 더불어 난 조부모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로 구성된 가족에 속했다. 비록 부부와 그들의 어린 자녀로만 구성된 핵가족은 아니었지만,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점에서 내 첫 번째 가족은 지극히 평범했다.
 
근대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는 핵가족이 가족의 전형이 된 듯하다. 때로는 내 어린 시절 가족처럼, 부부의 부모나 형제자매를 포괄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때, 가족은 경제의 기본단위로서 성적 욕구를 충족하고, 사회구성원을 재생산하며, 정서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성적 욕구를 소위 가족 밖에서 해결하는 사람들, 아이를 입양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거나 아예 아이를 갖길 원하지 않는 사람들, 폭력과 모욕이 오가는 가족이나 원수가 만나 부모자식이 되었다 생각하는 가족, TV나 애완동물이 매개되지 않으면 아무런 공감대가 없는 가정이나 각자 인터넷, 핸드폰에 빠져 대화라고는 없는 가정, 기러기 아빠나 가출청소년에게 가족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결혼과 핏줄로 맺어진 가족은 있으나, 가족의 근대적 의미는 빠져버렸다. 아니, 적어도 우리가 행복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가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 결혼제도와 핏줄에 기초해서 이상화된 가족, 그 이미지를 벗어나 소외되고 있는 가족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 없는 부부나 개와 같은 동물을 자식 삼는 부부, 자녀를 입양한 부부는 자신들의 핏줄을 잇는 자녀가 없다. 이혼 후 재구성된 가족처럼 자녀들이 부모 둘 모두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지 않거나, 한부모 가정처럼 부모 중 한 사람이 부재한 경우도 있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이성커플, 동성커플, 친구와의 동거처럼 결혼제도 밖의 가족도 있으며, 아예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는 독신도 흔하다.
 
이처럼 오늘날 근대가족 개념이 도전 받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족의 정의는 지속적인 변화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근대에 와서야 비로소 가족이 ‘사랑’을 내용으로 품었듯이, 현대에 와서는 입양이나 동성커플, 동물을 포함한 가족과 같이, 혈연이나 이성애에 기반한 사랑을 넘어 그 ‘정서적 친밀감’이 보다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상부상조, 정서적 유대를 넘어 정신적 성숙까지 도모할 수 있다면

 

'다양한 함께 살기'를 꿈꾸며 ©일러스트-오김승원


아무튼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결혼제도에 편입되고 싶지도 않았고, 아이도 원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화목한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긴 했지만, 적어도 아버지란 ‘가장’ 중심으로 굴러가는 가정이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독신으로 살 거야!’하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결혼이나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지, 홀로 외롭게 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가족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만큼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었다.
 
중년이 된 지금, 난 이혼한 여자친구와 둘이서 ‘혈연’, ‘결혼’과 무관한 가족을 꾸리며 살고 있다. 내가 이 친구와의 관계를 가족으로 명명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식사를 함께 하는 등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있고, 각기 독립적으로 경제를 꾸리지만 필요할 시에는 상부상조한다. 또,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격려하는 사이면서, 서로를 돌보고 믿고 의지한다. 결국 우리는 정서공동체이자 경제공동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결국 가족이란 결혼과 혈연으로 구성될 수는 있겠지만, 좋은 가족, 행복한 가족의 더 본질적인 부분은 그보다 ‘친밀감을 갖고, 서로 도우며 함께 생활을 꾸려나가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내 나름의 결론이다. 거기다, 정신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도록 상호 격려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가족이지 않을까?
 
다양한 ‘함께 살기’를 꿈꾸며
 
물론, 어떤 이들은 가족의 이름을 여전히 결혼과 혈연에만 고집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연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함께 살기’에 가족이란 이름이 적합할까? 지금껏 ‘가족’이란 이름을 가지고 ‘함께 살기’를 고민해 온 내 입장에서도 좀 갑갑하긴 하다. 이 시대에 어울리는 법적, 사회.경제적 기본단위로서의 ‘함께 살기’에는 ‘가족’과는 또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도 같다. 보다 다채로운 함께 살기를 포괄하려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관계가 있건 없건, 둘이서 함께 사는 것 뿐만 아니라, 결혼.혈연관계 없이 다수가 어울려 사는 것-예를 들자면 이혼한 여성 두 사람이 각자의 자녀들을 데리고 살거나, 여러 형제자매 가운데 세 명의 형제자매가 어울려 살거나, 전혀 남남인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경우 등-까지.
 
그렇지만 이름은 아무래도 좋다. 오히려, 다양한 함께 살기를 보장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진정한 시민연대계약과 같은 법제도적 장치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 각자가 다른 만큼, 함께 살기도 제각기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가족을 혈연과 결혼에 가두기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함께 살기’로 열어두는 성숙함이 절실하다. [일다 www.ildaro.com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함께 읽자. 오카다 미쓰요 <새로운 가족: 해체인가 변화인가>(소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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