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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임대기업 소유 주택의 국유화…찬반 투표하는 베를린 시민 (하)

 

베를린 시민들은 오는 9월 26일, 대형 임대기업이 소유한 주택을 국유화하는 내용의 시민청원에 대한 찬반 투표를 앞두고 있다.

 

이 시민청원의 근거는 독일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Grundgesetz) 14조다. 사유재산과 상속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사유재산의 사용이 일반의 복리에 기여할 의무도 담고 있다. 또한 일반의 복리를 위해 사유재산을 국유화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유재산의 국유화를 적절히 보상할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되어야만 가능하다. ‘도이체보낸 국유화’ 운동 측은 독일 기본법이 국유화를 명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주택문제 해결, 베를린시가 실패하자 시민들이 나섰다

 

베를린시의 시민청원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서명운동 시작 후 6개월 이내에 2만 명 이상의 서명이 모여야 한다. 또한 청원 신청 후에는 4개월 이내에 베를린 유권자의 7%인 약 17만 명 이상의 서명이 모이면 법률적 효력을 갖는 시민투표가 실시된다.

 

주택 국유화 시민청원을 위한 서명운동은 시작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택 임대료 상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와 함께 시작된 서명운동은 첫날인 2019년 4월 6일에만 이미 1만5천여 명의 서명을 모았다.

 

▲ 도이체보낸 국유화 운동은 2018년 6월 77,001명의 시민청원 서명을 베를린 내무부에 제출했다, 출처: https://dwenteignen.de/2019/06/77-001-unterschriften-pro-enteignung-an-senat-uebergeben


도이체보낸 국유화 운동(베를린에서 가장 많은 주택을 보유한 부동산 임대기업 도이체보낸을 시민청원 운동에서 상징적으로 사용함)은 2019년 6월까지 77,001명의 서명을 모아 시민청원을 신청했다. 하지만 베를린 시 정부가 시민청원 신청을 승인할 때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청원의 내용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를 정확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였다. 도이체보낸 국유화 운동은 정부의 지연 전술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으며, 베를린시의 내무부 장관인 안드레아스 가이젤(Andreas Geisel, 사민당)이 빠른 행정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행정법원에 고발하기도 했다.

 

국유화 운동의 대변인인 모헵 샤파기아(Moheb Shafaqyar)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시민청원에 대한 모욕적인 지연 전술”이라며 시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미 서명을 제출할 때 명망 있는 헌법 전문가들의 법률적 검토가 끝난 문제이며, 시 정부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도이체보낸 국유화 운동 측의 적극적 항의, 그리고 사민당과 함께 베를린시의 연정에 참여하는 녹색당과 좌파당 의원들의 비판이 제기되자, 결국 2020년 9월 베를린시 내무부는 도이체보낸 국유화 청원을 승인했다. 약 14개월 만의 일이었다.

 

국유화 운동 측은 올해 2월 26일, 시민투표를 성사시키기 위한 서명운동을 정식으로 시작했다. 규정된 4개월의 이내에 약 35만 명의 서명을 모아 필요 숫자인 17만1,783개를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끌어냈다. 코로나19 시국인 것을 고려한다면 대단한 성과이다. 결국, 지난 7월 1일 베를린시는 도이체보낸 국유화 시민투표를 승인했다.

 

독일 언론은 그사이 베를린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집세 동결 법안’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무효가 된 것 또한 시민들의 적극적 서명 참여의 요인으로 꼽았다. 계속되는 시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사민당-좌파당-녹색당 연립 정부는 원칙적으로 주택 국유화에 반대해왔다. 특히 사민당의 반대 입장이 강했다. 대신 시 정부는 임대료를 동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2020년 2월, 베를린 정부는 주택 임대료를 5년간 동결하는 내용과, 건축 연도에 따른 1㎡당 임대료 상한가가 포함된 법안에 합의했다. 총 150만 가구가 적용받는 파격적인 법안이었으며, 대부분의 베를린 주민이 법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합의안에 따라 임대인은 새로운 세입자에게도 이전 임대료 이상의 월세를 받을 수 없다. 만약 전 세입자가 임대료 상한가보다 높은 집세를 내고 있었을 경우, 새로운 세입자는 그보다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또한 이미 상한가보다 높은 집세 계약을 맺고 있는 사람도 집세가 상한가보다 20% 이상 높을 경우, 해당 관청에 임대료 인하를 신청할 수 있다. 베를린 시장 미하엘 뮐러(사민당)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주택 국유화 청원 운동이 새로운 임대료 동결 안의 신속한 결정을 촉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15일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베를린의 집세 동결 법안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렸다. 집세의 가격에 대해서는 베를린시가 아닌, 연방정부가 입법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결정으로 인해 미하엘 뮐러 시장과 베를린 정부는 이미 위헌 판결이 날 위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모험을 감행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판결 직후에는 베를린에서 진행 중이던 임대 계약들이 중단되고, 집세가 갑자기 상승하는 소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판결 이전까지 정책의 적용을 받아 집세가 인하된 경우는, 인하분 집세가 재청구되는 사태도 발생했다.

 

투표 이후, 무엇이 올 것인가

 

9월 26일 베를린 시민들이 투표를 하게 되는 내용은 ‘거대 민간 임대기업의 주택 국유화를 위해 베를린 시 정부가 법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찬반이다. 구체적인 법안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법안은 아래 5가지 항목을 포함해야 한다.

 

-베를린에 3,000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한 민간 임대기업의 주택을 국유화한다.

 공기업, 지역 또는 세입자 주택조합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국유화된 주택은 공공기관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공동경제 방식으로 관리한다.

-국유화된 주택의 관리는 주민, 세입자, 베를린 시민의 민주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택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은 해당 주택의 사유화를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국유화 해당 기업에는 시장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보상한다.

 

만약 투표가 성공하면 9월 이후 새롭게 출범하는 베를린시 정부는 주택 국유화를 위한 법안을 마련해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된다. 지난 4월 <타게스슈피겔>지가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실시한 베를린 시민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7.1%가 주택 국유화에 찬성했다. 반대는 43.7%였다. 하지만 시민투표가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법안이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 정부가 법안을 마련해도, 시의회가 이것을 통과시킬 의무는 없다. 이미 베를린 시의회는 2018년 시민청원에 의해 시 정부가 마련한 베를린 테겔 공항의 운행 지속에 관한 법안을 부결시킨 전례가 있다.

 

▲ 베를린의 적-적-녹 연정을 이끌고 있는 시장 미하엘 뮐러(사민당, 우측)와 부시장인 클라우스 레더러(좌파당, 중앙)와 로마노 폽(녹색당, 좌측) 출처: Sandro Halank, Wikimedia Commons, CC-BY-SA 3.0, CC BY-SA 3.0


현재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은 주택 국유화에 대해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연정을 주도하는 사민당의 경우는 계속해서 주택 국유화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사민당의 새로운 시장 후보인 프란치스카 기파이(Franziska Giffey)는 국유화에 찬성하는 정당과는 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사민당 내에서 국유화를 지지하거나 적-적-녹 연정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당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녹색당의 경우는 국유화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민투표가 통과될 경우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녹색당의 베를린 시장 후보인 베티나 야라쉬(Bettina Jarasch)는 언론 인터뷰에서 국유화를 정책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시민투표에서는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시민투표가 정치권에 변화를 위한 압력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베를린 시의회 선거 지지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좌파당은 주택 국유화에 공식적으로 찬성하는 유일한 정당이다. 좌파당은 주택 국유화에 찬성하는 유권자들이 같은 날 치르는 다른 선거에서도 좌파당을 선택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베를린 주택 국유화 시민 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불분명하다. 찬성표가 과반을 넘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지 않는 법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사민당, 기민당, 자유당 등이 강력한 반대 입장인 것도 주택 국유화 실현의 방해 요소이다. 하지만, 시민 투표가 가지는 민주주의 가치를 외면하는 것도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또한 시민 투표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주거 문제를 안정화할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압력을 정치권에 주고 있는 것도 긍정적 신호로 해석된다. 9월 26일 선거가 베를린 주택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필자 소개] 김인건. 대안학교에서 철학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적 평등을 주제로 석사를 마치고 여행가이드를 하며 통번역, 독일 소식을 한국 언론에 소개하는 일을 해왔다. 환경과 지속가능한 삶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움벨트(Umwelt)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어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역사 속 사회의 변화 과정과 이를 해석하는 이론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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