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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곧 막을 연다. 8월 26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리는 영화제에는 어김없이 좋은 작품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새로운 물결’ 섹션에 있는 다큐멘터리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 리사 로브너, 프랑스 영국, 2020)이다. 이 영화는 가장 앞서 전자음악을 했던 이들을 소개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 음악가를 기록한다.

 

▲ 8월 26일 시작되는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 리사 로브너, 프랑스 영국, 2020) 포스터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더 좋을 이야기를 몇 가지 해보려고 한다. 1900년대 들어서며 기술이 발전하고 재즈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이 태동할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클래식 음악이 사실상 전부였다. 21세기의 대중음악도 여전히 백인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는 편인데,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층 간의 격차가 지금보다 견고했던 당시에는 백인 남성이 클래식 음악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훌륭한 작곡가는 거의 대부분 남성이고, 열심히 자료를 펼쳐야 여성 작곡가가 겨우 한두 명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주자들도 남성이었고,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다 새로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2차 세계대전과 산업의 변화를 겪으며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권력 체계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집 밖으로 나와 일자리를 갖게 되면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음악 역시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기존의 악기가 아닌 것으로 음악을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190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며 기존 관념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술, 철학 사조 곳곳에서 생겨났다. 악기 소리가 아닌 것으로 음악을 만드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면서 1940년대에 구체음악(Musique Concrete)이 등장했다. 다양한 소리를 녹음하고 또 왜곡하여 그걸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기존 음악 체계와는 모든 것이 달라진 음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화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의 이야기는 그 즈음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전자악기인 테레민(Theremin,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 레온 테레민이 발명한 것으로, 연주자가 악기와 접촉 없이 악기 양쪽의 두 안테나에서 발생되는 전자기장을 손으로 간섭하여 소리를 냄)을 연주한 클라라 락모어(Clara Rockmore)의 이야기로 시작해, 전자음악뿐 아니라 음악 전체에 큰 영향을 준 다프네 오람(Daphne Oram)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 리사 로브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 2020) 중에서, 다프네 오람(Daphne Oram)의 모습.


어떻게 보면 다프네 오람이 만든 음악은 EDM(Electronic Dance Music)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 빅밴드의 스윙 재즈에 맞춰 플로어에서 춤을 추던 환경에서 그의 음악은 춤과 어울렸고, 지금 시점에서 샘플로 활용하여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만한 매력적인 요소도 두루 갖추고 있다.

 

*Daphne Oram - Bird of Parallax https://youtube.com/watch?v=8Oc0B6pkl4A

 

이어 영화는 베베 바론(Bebe Barron)을 비롯해, 드라마 <닥터 후>(영국 BBC가 제작한 SF 드라마시리즈로, 1963년에 첫 방송을 시작해 50년 넘게 방영된 화제작이다) 테마음악을 제작해 알려졌던 델리아 더비셔(Delia Derbyshire) 등 여러 여성 선구자의 당시 활동과 모습,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영향력을 차분하게 조명한다.

 

많은 사람이 1940년대 후반에 ‘구체음악’이라는 장르 이름을 붙인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를 기억하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그 못지 않게 뛰어난 음악가들이 더 멋진 시도를 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가시적 영역 밖에 있었고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전자음악의 등장 자체가 기존 관념을 해체하는 시도였기 때문에 여성 음악가에게 더욱 크게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전자음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자 대중음악부터 순수 예술까지 폭넓게 활동해 온 로리 스피겔(Laurie Spiegel)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여성은 여성이 작곡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 때, 특히 전자음악에 끌렸다. 전자기기는 우리로 하여금 남성이 지배하는 기득권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게 해줬다.”

 

▲ 리사 로브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 2020) 중


‘여성은 안 된다’는 공고한 통념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음악을 발전시켰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세상이 기억하는 이름은 그들보다는 좀 더 많이 회자된 존 케이지(John Cage)나 여타 대중음악 가수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업적은 ‘의미 있는 실험’ 이상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진화의 과정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기기의 활용과 기술적 성과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기계가 내는 소리를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심지어 끔찍하다고 했다. 전자음악을 하는 여성이 마녀가 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구자들은 음악을 만들어냈다. 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하거나 필름에 신호를 기입해 소리를 만드는 것부터 거대하고 어려운 모듈러 신스까지 여성들은 쟁취해냈지만, 훗날 제대로 언급되지 못했을 뿐이다.

 

*Sisters with Transistors [Official Trailer] https://youtube.com/watch?v=7r-3hlzpV7M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로도 훌륭하다.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것들이 어떻게 현재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영화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다. 자료만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음악가들의 투쟁과도 같은 성과가 담백하게 담길 수 있게 조율했고, 관객들이 이야기에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게 차분한 전개를 이어간다.

 

이미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영국 가디언지를 비롯해 몇 매체는 평점으로 만점을 주기도 했다. 전자음악의 시작이 궁금한 분들, 그리고 여성이 대중음악사에서 어떤 시작점을 만들었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고 싶은 분들은 꼭 감상할 수 있길 바란다.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은 8월 27일 오후 4시 40분, 29일 오전 10시에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볼 수 있다. 티켓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siwff.or.kr)에서 예매할 수 있다.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20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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