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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업계도 ‘워라밸’ 가능해야죠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혜진: 건축설계사, 베를린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혜진 이주 이력서 


이주 7년차

2011-201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1년간 건축학과 교환학생

2013-2014년 베를린에서 어학연수 및 대학원 진학 준비

2014-2016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과정

2016-2017년 베를린 소재 소규모 설계 사무소에서 근무

2018-현재 350여명 규모 글로벌 건축회사 베를린 지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야근 잦은 한국을 떠나 ‘일과 삶’ 두 마리 토끼 잡으러 독일행


혜진은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난다. 일기를 쓰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발코니 식물들에 물을 준다. 조깅이나 요가, 명상으로 하루를 열기도 한다. 이렇듯 에너지가 많은 아침 시간을 활용해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고 난 뒤, 회사로 출근한다. ‘좋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니 아침에 가뿐히 일어날 수 있고, 퇴근 후에는 부담없이 편히 쉴 수 있다. 혜진은 강도 높은 정신 노동인 건축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자신만의 ‘워라밸 생활 습관’ 덕분에 큰 스트레스 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야근이 너무나 잦았던 한국 직장을 다닐 때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 대학에서 건축과를 다니며 실무 경력도 함께 쌓아가던 혜진은 ‘내가 건축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숱하게 했다. 업계에 야근 문화가 뿌리깊어 오래도록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없는 삶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설계 공모전 참가 때문에 사무실들은 밤낮없이 돌아갔고, 윗사람 눈치 보느라 하는 불필요한 야근도 많았다.


인턴인 혜진은 정시에 출근해도 막상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 작업 지시를 내려줄 상사들이 전날 밤샘 근무 때문에 오전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후 3시가 넘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밤 10시가 되어서야 퇴근하고, 다음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개선할 방법은 없는지, 늘 이럴 수밖에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대다수 업계 사람들은 ‘건축 일이 다 이렇다’는 반응이었다. 건축설계 자체는 적성에 맞고 즐거운 일이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혜진은 외국에 나가 건축대학원에 진학하고, 이후에 현지에서 취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년간 교환학생으로 가 있었던 독일에는 영감을 주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많았고, 사회 분위기가 한국보다 느리고 여유로워 마음에 들었다. 이주는 시간과 노력 면에서도 효율적인 선택 같았다. 한국에서 취업 후 3~5년 경력을 쌓고 건축사자격시험을 치는 것이나, 독일에서 어학 1년, 대학원 2-3년 후 취업, 실무 2년 끝에 건축사자격발급(신청제)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엇비슷할 것이었다. 혜진은 새로운 경험과 여유로운 삶에 앞날을 걸어보기로 했다.


회사에서 설계 도면과 모델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하는 혜진의 모습 (출처: 인터뷰이) 


한국에서 싸들고 간 숙제,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건축 


혜진은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원서를 넣을 때 사실 건축과만을 지망했다. 다른 이과계열 전공과 달리 예술과 기술, 인문학과 공학 등 다양한 분야가 접목된 학문이라는 점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또 막연히 건축물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첫 학기 때부터 이미 혜진은 공부에 큰 재미를 느꼈고, ‘내가 하고 싶은 건축’ ‘좋은 건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리노베이션(Renovation; 건물 구조체의 변경 없이 시설물의 노후화 억제 및 기능 향상을 위해 외관이나 내부 일부 혹은 전체를 개‧보수하거나 증‧개축하는 것을 의미. 오래된 건축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존 및 개선시키는 것)이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은 건물의 생애 주기가 너무 짧아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이 담고 있는 가치가 큰데, 저평가되어 있어요.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 아직 더 쓰일 가능성이 있는 건물들도 재개발로 다 없어지는 것을 많이 목격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이런 문화가 바뀔 수는 없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죠. 오래 지녀온 것을 보존하고 오히려 부각시키는 건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잘하고 있거든요. 우리는 무조건 빨리, 싸게 건물을 지어 올려 수익을 내려다 보니 허물고 새로 짓는 경우가 많고 ‘한국 건축’만의 정체성이 없다는 지적도 많아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수업들을 골라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로 ‘Stahlversuchshaus’ 프로젝트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리패브리케이션(Pre-Fabrication; 공장에서 골조를 생산하고,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공법)으로 지은 건물에 대한 리노베이션 안을 만드는 과제였다.


혜진이 석사 1학기 때 직접 만든 Stalversuchshaus 프로젝트 모델 사진 (이미지 출처: 인터뷰이)


본래 설계자는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입면 변경이 가능한, 거주자의 개성을 반영하는 집’을 의도했지만, 대규모 아파트 같은 획일적인 공간이 보편화된 지금은 그런 건축물이 좀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혜진은 과거 모더니즘의 산물인 그 건물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은 보존하고 내부 공간을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바꿔서 프리패브리케이션을 둘러싼 시대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화장실과 부엌 등 기본 공간을 유지하되, 거주자가 이웃과 소통하고 자기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 공간을 추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계속됩니다) 

 

이어진 기사 전체보기: 혜진이 본 독일 건축의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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