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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당하는 괴롭힘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③ 나의 ‘여성 경험’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세 ‘바바리맨’의 기억

 

내 지정 성별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모든 삶의 경험이 ‘여성의 경험’이라고 뭉뚱그려질 순 없다. 이 글은 ‘여성(나)의 경험’이 아니라 나의 ‘여성 경험’에 대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는 순간에 ‘여성’으로 여겨졌거나, 그로 인해 경험해야 했던 폭력에 관한 이야기. 특히 ‘길거리괴롭힘’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간밤에 악몽을 꿨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느 날 나는 나에게 교묘히 영향을 주고 있던 부정적인 기억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며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에, “언제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게 됐나요?” 라는 질문을 받고나서였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성기를 노출하는 자, 일명 ‘바바리맨’을 무섭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주 들려오는 바바리맨과 관련한 ‘카더라’ 이야기들은 씩씩하고 다부진 또래들 틈에선 조롱거리였다. 중학교 때 “니 그라니까 좋나?” 한 마디로 ‘그 새끼’를 퇴치한 경험담을 듣고 모두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니 그라니까 좋나?’라는 말의 신나는 리듬을 들은 사람은 누구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바바리맨이 맞는 모습도 봤다. 같은 고등학교 1학년들이 바바리맨을 붙잡았는데, 하교하다가 운 좋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기세 좋게 달려간 학생들이 정문 앞을 지나던 한 남자를 에워싸자, 바바리맨은 도망도 포기하고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얻어맞았다. 다시는 내 친구한테 그런 짓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지 야단을 치는지 모를 말을 들으면서. 곧 경찰도 출동했다.

 

나는 스무 살 때 바바리맨을 직접 보게 됐다. 당시의 나는 차가 끊기면 집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서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 인적은커녕 가로등도 드문 길을 새벽 서너 시에도 곧잘 다녔다. 아직 밝은 어느 길목에서 바바리맨이 나타났다. 그를 피해서 되돌아가다가 다른 행인들을 따라 다시 그 길로 돌아갔더니, 몇 분 만에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처음 든 감정은 경멸이었다. 경멸스러웠으니까. 그리고 크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단지 처음으로 귀가 길에 비명을 질렀다는 게 기억난다.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매우 놀랐기 때문이다. 발소리는 이어폰을 끼고 조깅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앞서 달려갔다. 뜻밖에, 바바리맨은 나를 다소 위축시킨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런 가능성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 ‘너는 여자다!’

 

▶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길거리괴롭힘 방지 캠페인 ⓒ잇을


가끔 곱씹어보기는 했다.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했을까? 나도 충분히 ‘니 그러니까 좋나?’ 라고 물을 수 있었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것 자체가 아쉽진 않았다.

 

내가 화가 난 건 누군가의 성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괴롭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바리맨의 만행은 ‘너는 여자다!’ 라는 강요라고 해석되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남자 앞에는 나타나지 않으니까. 바바리맨은 길목에 서서 행인들의 성별을 스캔하다가 나를 여성이라고 속단했다. 내가 스스로 정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이라고 강요당한 기분은 별로였다. 이런 식의 스트레스를 계속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여성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런데 사실 그다지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남자로 여겨지는 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철썩 같이 누구네 아들로 불리곤 했다. 나는 여자거나 남자라는 것이 ‘신체적 조건’에 관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내 성별이 혼동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것이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역시 쉽게 혼동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성별로 보이건 간에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십대 때까지도 그렇게 나는 다소 특수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바바리맨 류의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익숙한 귀가 길에 나타난 바바리맨을 통해서 ‘내가 여성으로 보인다’는 것의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원한 적이 없는 하나의 조건, 즉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 앞에 바바리맨이 나타났을 때, 나는 앞으로도 아무 공간에서나 위협을 당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이라는 성별로 살아간다는 것에서 뒤따를 수 있는 불쾌하고 부당한 일들. 악취가 풍겨왔다.

 

나는 어떤 성별로 살아가든지 그것 그대로 괜찮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바리맨과 그와 비슷한 무리들은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여성은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을 괴롭힌다. 여성답지 않게 행동하는 여성에게는 공격하려 든다. 나는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피곤하다. 내가 만약 다친다면,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인 ‘너는 취약하다!’가 기정사실화되는 것 같아서 불쾌하다. 그들은 공격해놓고 ‘너는 공격받으니까 취약하다’고 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난 더 위축되었다. 그리고 분노가 오랫동안 들끓었다.

 

추행과 공격과 모욕…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일

 

나는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말은 거의 듣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그런 평가가 뒤따랐다. ‘여자답지 않게’ 머리카락을 밀고 ‘남성복’을 입을 때, 남성이 아닌 사람을 좋아할 때, 주변인들은 굳이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묻거나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덕분에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더 잘 찾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여자다움에 대한 그 공포민담 같은 이야기를 경청할 생각이 없었다. 남성들은 맞추지 않아도 되는 그 기준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누구에게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그 기준으로 여자다/아니다를 가르는 주장에 동조할 생각도 없었다.

 

성별이 두 개이고, 반드시 택일하게 강요하는 세계에서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는 일이 가로막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일까? 그 사람이 나였다. 혹은 정말로 내가 여자였다면, 나는 ‘그런 여자’였다.

 

전철 안에서 친한 지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등 뒤에서 “레즈들”, “사귀나봐”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레즈비언으로 보였다 해도 우리 사이에 불쾌함은 없었다. 단지 ‘레즈들’이 사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실례지만 지금 그 말을 들었거든요. 근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주지 못한 게 아직도 안타깝다. 내 정체성에 대해 설명했다고 해서, 그들이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또 나는 “저렇게 입고 다니는 남자는 정말 싫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내 옷차림이 거리의 공해라도 되는 듯이 내뱉은 그 말이야말로 공해였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이 길거리괴롭힘 사례를 모으기 위해 퀴어문화축제에서 진행한 부스. ⓒ잇을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몇 가지 표식으로 상대를 속단하는 일은 흔하다. 두 개의 성별이 서로 다르며, 쉽게 구분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타인의 성별을 맞추려 든다. 만약 성별이나 젠더 표현을 이유로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면,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다양한 젠더 표현을 한 사람들이 겪는 괴롭힘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나이, 장애 여부, 인종을 이유로 한 차별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말하려면, 공공장소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 장애인, 외국인 등에게 꽂히는 무례한 시선, 폭언, 물리적 괴롭힘이 없어야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길거리괴롭힘은 공공장소에서 성별, 성적 지향, 젠더 표현 등을 이유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낯선 사람이 ‘젊은 년이 어디서 담배를 피냐’고 호통을 치고, 가슴이나 엉덩이를 움켜쥐거나 가격하고, 욕설과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왁!’ 하고 괴성을 지르며 놀라게 만드는 것 따위의 일들이다. 훑어보거나, 달려오거나, 몸을 건드리면서 묻는 “여자냐, 남자냐” 따위의 말들. ‘여성은 이래야’, ‘남성은 저래야’ 한다고 훈계하거나 ‘성소수자를 처음 봤다’며 동의 없이 촬영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늘 발생하고 있음에도 누군가에겐 ‘없는 일’

 

길거리괴롭힘은 성별에 따른 규범을 이유로 해서 소수자에게 휘두르는 괴롭힘이다. 여성과 소수자들이 가장 빈번하고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차별이자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열하다. 그런 행위는 결코 실수가 아니라 명백하고 교묘한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표식으로 평가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하찮고 가벼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길거리괴롭힘 문제를 성토하기 위해 작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상퇴치 선언대회>를 개최했었다. 한 참가자는 자신이 길거리에서 당한 괴롭힘 경험을 이야기하면 남동생은 매번 ‘오해한 거 아냐?’라고 물었다고 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여성/소수자만 예민하고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마치 작은 일을 큰일로 번지게 만드는 것처럼 되고 만다. 더구나 일일이 화를 내기에도 너무 잦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담담해지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문제적 일상이 ‘없는 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몇 차례 일어나는 일인데, 누군가에게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 ‘없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

 

▶ 길거리괴롭힘에 대한 한 마디! (2015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아이다호 공동행동)  ⓒ잇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퀴어문화축제에서 길거리괴롭힘 경험을 모으기 위해 부스를 진행한 적이 있다. 부스에 방문한 참여자 거의 모두가 다양한 길거리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모 대학교에 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남성들은 길거리괴롭힘을 본 적조차 없다고 응답했다. 목격담조차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당장 오늘 퇴근길에 목격해도 놀랍지 않은 일들이, 같은 세대의 누군가에게는 전혀 포착되고 있지 않다니!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 이전에, 우리가 늘 이용하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일상적으로 다니는 길거리와 자주 이용하는 대중교통에서 성별, 성적 지향, 젠더 표현을 이유로 수많은 괴롭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지나치게 흘려버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길거리괴롭힘을 중단시킬 해결책은 무엇일까?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남성의 공간을 잘 분리하면 좋은가? 그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장소에는 모두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우리가 공공장소에 ‘함께 있는’ 것이고,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 모색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길을 걸어 다닐 때,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의 얼굴과 손을 쳐다보는 것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것 때문에 내 일상 전부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동성애자들’이라고 쑥덕거리고 ‘저 여자 옷차림 봐’라며 웃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일상을 살아간다. 수없이 나를 평가하는 시선들, 말과 행동들은 나의 한 부분을 만들어왔다. 이제 나는 그 ‘당연한’ 일상을 흔드는 것을 궁리한다. 계속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길거리괴롭힘에 대해, 차별과 혐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잇을/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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